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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6회 전국 고교생 문학콩쿠르 수상작

등록일 2018-06-27 작성자 학과관리자 조회 5577
<운문부 장원>

「수학자의 가방 속에서」

독수리기독학교 3학년

최혜나

당신의 서류가방 속엔 모양을 알 수 없는 공식들이 담겨 있지요 네모 속에 세모, 세모 속에 동그라미 가방 안주머니에선 손바닥 위, 곡선을 이룬 방정식들이 쏟아져나온다 매일 부등호를 입에 물고 있는 아빠 당신은 왜 어려운 공식들을 수집하고 다니나요? -쌓여가는 세모를 버려둘 수 없었어. 가방 손잡이 위로 날카로운 모서리들이 튀어나와있다 밤마다 아빠는 암흑 속에서 가방을 비우곤 했다. 어둠 속에서 조각난 공식들이 쏟아진다 수학자의 칠판처럼 어지러운 기호들이 가방 속에서 섞여간다 슬픔을 제곱해보세요, 불어나는 무게 다시 슬픔을 나눠보세요. 세모 나누기 세모=? 슬픔은 유일하게 측정할 수 없는 기호였다 그 질량을 가늠할 수 없어 당신은 결국 녹슨 컨버스를 가방 속에서 꺼내들고, 동그라미를 그릴 거야 모서리가 없는, 꼭짓점이 사라진 도형만 채워넣을래 이를테면 곡선으로 둘러싸인 원기둥이나 구 같은 것들, 아빠의 네모난 서류가방에서 쏟아진 공식들이 비탈길 아래로 굴러떨어지고 있다 기울어진 아빠의 어깨축을 잴 수가 없어 나는 오늘도 각도기를 꺼내든다 <운문부 차상>

「도장공」

선일여자고등학교 3학년

박은선

여름 나무의 잎맥은 항상 목이 말라 있었다. 햇빛 아래에서 까만 피부는 더 까맣게 칠해졌다 밀대로 페인트를 문댈 때마다 꺄르르하고 퍼지는 웃음 페인트로 얼룩진 가방, 한숨을 쉴 때마다 가방에 튄 페인트가 둥글어졌다 햇빛은 도장공의 턱 끝에서 뚝뚝 떨어졌다 얼룩진 가방 속에 낡은 장비들이 서로 엉켜있다 일대로 밀면 펴지는 한숨 도장공은 덜 마른 페인트에 지문을 새겼다 벽이 마를수록 뒷꿈치가 해진 아이의 운동화가 선명해졌다 벽들의 젖은 모서리는 말라가고 있었다 습한 바람이 도장공의 등에 달라붙자 얼룩진 면티가 얄팍한 허리를 감쌌다 눈 밑에 묻은 페인트는 닦아도 닦이지 않았다 초록색의 멍이 된 얼룩, 가방의 지퍼를 닫을 때면 덜 닫힌 반지하 창문 밑 잠든 아이의 모습이 욱신거린다 도장공의 머리 위에 떠 있는 해는 언제나 둥굴 것이다 도장공의 가방은 바닥에 긴 그림자를 늘리고 있다 참새는 옥상 안테나 위에 앉지 않는다 도장공의 머리 위로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쏟아져 내린다 <운문부 차하>

「쉿, 비밀이에요」

고양예술고등학교 1학년

이혜린

쉿, 제가 풍선처럼 커다란 비밀을 말할 테니 두 입술을 붙이고 잘 들어봐요 사실 말예요, 저는 저 이름의 주인이 아니랍니다 백일장에서 시를 못 쓰겠다고 눈물을 턱 끝에 주렁주렁 매달고 빳빳한 신사임당 여러 장 내밀길래 저도 두 손 내밀고 고개를 끄덕였지요 이름에 대충 끼워 맞춘 몸뚱아리를 이끌고 들어섰어요 “안녕하세요, 신분증 부탁드려요” 하얀 손금 위로 신분증 올려놓자 갸웃하는 고개 흔들리는 동공을 볼 수 있었어요 웃으며 들어가는 제 엉성한 뒷모습을 한창 쳐다보았겠지요 제 가방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묻더라고요 놀랐어요 입을 위아래로 이마에서 턱까지 벌리며 놀랐어요 이걸 알아차릴 줄이야 이건 정말 비밀인데요, 축 처져있는 사람의 머리와 뭍에 나온 물고기마냥 팔딱팔딱 움직이는 심장이 들어있답니다. 걱정마세요 깨끗하게 씻어 이물질 하나 없으니까요 혹여나 들키면 도망갈 수 있게 똑똑하고 민첩한 머리와 겁먹지 않는 심장을 준비해두었을 뿐이에요 뭐, 반입금지는 아니잖아요? 어렵지 않아요 지금 이 단발머리에 멍청하고 겁많은 머리통을 두 손으로 움켜쥐고 훅하고 뽑아내면 돼요 하얗게 솟아오른 목뼈 위에 새로운 머리를 꽂고 가슴의 뚜껑을 열어 심장을 갈아 끼우기만 하면 되는 걸요 여기까지 들었다면, 어쩌면 당신은 제 가방을 검사하려 들지도 몰라요 풍선처럼 부풀었던 비밀이 당신의 손 끝에 팡 하고 터져버리겠죠 그러면 안돼요, 쉿 이건 전부 비밀이니 아는 척 하지 말아요 단지 조용히 눈을 감아주세요 모두가 밤을 맞은 그 사이에 저는 깔끔한 목뼈에 새로운 머리통을 이렇게. <운문부 차하>

「거짓말의 형태」

양주고등학교 2학년

김예림

외할아버지는 거짓말을 메고 다니셨다 아파트 경비일을 하셨던 외할아버지, 밤새 뜬 눈으로 보초를 서는 날이면 서로의 등을 맞댄 반원의 로고가 달빛에 반사되고 있었다 손가방이 필요하다고 하셨다 연신내 시장, 명품 가방을 싼 값에 판다는 상인의 말에 삼만원을 주고 샀을 짝퉁 샤넬가방 갈고리 같은 로고가 외할아버지의 밤 속으로 침투했다 날카로운 모서리 속, 당신은 가방을 베개 삼아 까무룩 쪽잠에 들었다 중국에서 넘어왔을 가방 속엔 당신이 모아왔던 작은 거짓말들이 들어 있었다 경비일은 괜찮냐고 물어왔던 질문에 매번 괜찮다고 했던 3음절은 오래전 끊었던 담배 속에 뒤엉켜 있었다 정리정돈이 되지 않았던 짝퉁 가방 속, 헝클어진 물건들은 외할아버지의 기관지를 혼잡하게 만들어 자꾸만 마른기침을 했다 조약돌 같은 알약을 삼킬때마다 더욱 날카로워지는 샤넬 로고 나는 가끔 고양이의 발톱같은 갈고리에 찔려 아파하곤 했다 폐 속에 수몰되셨던 외할아버지 아직도 당신의 책장엔 어깨를 깊이 파고들었던 거짓말이 놓여있다 이젠 아무도 믿지 않는 괜찮다는 말 달빛이 기우는 밤이면 나는 여전히 그믐달 같은 갈고리에 찔려 흐르는 진물을 닦아내고 있다 <산문부 장원>

「겁 많은 토끼를 구슬리는 법」

전주기전여자고등학교 2학년

박나연

책장 너머로 시선이 느껴진다. 굳이 고개를 들어서 그 앞을 보지 않아도 나는 금세 파악해낼 수 있었다. 내 앞에서 날 응시하는 사람의 상태는…. 한 마디로, 겁을 먹었지만 그것을 티내지 않으려고 되려 상대를 노려보는, 아직 상황 판단이 힘든 아기 토끼와도 같았다. 내가 옆으로 이동하면 반대편에서 나를 보며 그대로 움직이는 이 겁 많은 아기 토끼로 말할 것 같으면, 경계심이 넘쳐나는 토끼라고 할 수 있겠다. 어쩌다가 치부를 들켜버린 그 애는, 정말 어쩌다가 치부를 들춘 나를 마치 초면인 사람마냥 경계하고 탐색했다. 한순간에 자기를 꿰뚫어본 사람이 눈앞에 있다면…. 심지어 내가 엄청난 경계심을 가지고 있다면, 나라도 이와 비슷한 반응을 보일 것 같긴하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이 아기 토끼에게 이만큼의 관심도 없다. 그러니까, 토끼는 혼자 겁내고 혼자 경계하고 혼자서 저렇게 열렬한 시선을 보낸다는 것이다. 책을 골라서 나는 그 애를 뒤로 한 채 우리가 –실상은 그 애 혼자서였다- 마주보고 서 있던 책장을 빠져나왔다. 도서관 열람실에는 사람이 한 명뿐이었다. 물론 저 뒤의 토끼를 제외하고, 나도 제외하고 말이다. 사람이 워낙 없어서인지 사서로 보이는 그 한 명은 고개를 뒤로 젖히고 얕은 잠을 청하고 있었다. 나는 저쪽 창가 근처 자리에 앉아서 쏟아지는 오후 햇살 아래에 책을 펼쳤다. 아, 그림 좋다. 라고 생각하던 참에, 어미 따르는 새끼오리마냥 나를 쫓아와 옆에 앉아버리는 그 애 덕분인지 조금 산통이 깨진 것 같았다. 나는 싫은 기색 같은 것 내비치지 않고 책읽기에 몰두했다. <달과 6펜스>였다. 그 애는 내가 책을 읽는 내내 나를 흘긋흘긋 바라보다가 펜을 들었다가…. 정신 사나운 짓만 반복했다. 그러다 문득, 그 애는 내가 펼쳐 놓고 있던 <달과 6펜스> 45페이지에 손바닥 반절만한 크기의 포스트잇을 붙였다. 그리고 거기 쓰여 있는 말은 정말 하찮아서, 내 독서를 방해하는 한낱 낙서로 보이기도 했다. ‘야 너 나한테 할 말 없어?’ 약간은 짜증이 나기도 한 탓에 그 애의 손에서 펜을 빼앗아 든 나는, ‘그런 거 없어.’라고, 휘갈기다시피 썼다. 그 애의 손에 펜과 포스트잇을 쥐여주며, 나는 다시 마음의 안정을 되찾고 책에 집중하기로 마음먹었다. 스트릭랜드가 집을 떠난 직후의, 아주 흥미진진한 장면이었는데 말이다. 한 번 끊어진 흐름을 잇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 글자들을 억지로 머릿속에 욱여넣으며 애써 옆에 앉은 그 아기 토끼를 무시했다. 한참 정적이 일고 나서 그 애는 헛기침으로 말문을 열었다. “너, 그거 막, 말하고 다닐 거야?” 토끼는 망상이 너무 심하다. 내가 그 작은 비밀 하나 알았다고 그걸로 자길 협박이나 할 줄 알았나 보다. 나는 어이가 없었지만 그 애를 열심히 어르고 달래고 안심시켰다. 한참이나 그를 구슬린 끝에, 드디어 그 침통한 입가에 아주 엷은 미소가 뜨는 걸 볼 수 있었다. 나는 그 미소를 보고 난 뒤에야 평화롭게 책을 다시 눈에 담을 수 있었다. “그럼 나 이제 책 좀 보게 내버려 둬.” 가시 돋친 말이었음에도 마냥 좋은 모양이었다. 책을 읽다 슬쩍 본 그 애의 표정이 너무도 누그러져 있어서, 나도 모르게 순간 웃음을 지어버리고 말았다. 문득 쳐다본 72페이지의 한 구절이 눈에 들어왔다. ‘찰스 스트릭랜드는 묘하게 사람을 끄는 힘이 있었다.’ 그건, 토끼도 마찬가지였다. 블라인드 사이로 들어오는 빨갛고 노란 빛이 기분을 좋아지게 만들어서, 나는 책을 덮고서 이제 경계심이 사라진 토끼에게 말했다. “야, 밖으로 나갈래?” 그 애는 환하게 웃고,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책을 원래 꽂혀 있던 자리에 꽂아두고, 이제는 새끼오리가 아닌 그냥 친구처럼 옆에서 걷는 그 애에게 어깨동무를 했다. 우리는 평소와 같았고, 달라진 게 없었다. <산문부 차상>

「도서관에서 생긴 일」

고양예술고등학교 3학년

황지원

“화장실에서 누가 울고있던데……. 무슨 일인지 알아?” “어, 그거 옆 반 애.” 친구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여섯 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의 도서관은 고요했다. 도서관은 친구가 앉아있는 데스크 쪽에만 불이 켜져 있고 안쪽은 어두웠다. “야 근데……. 손목이랑 발목이랑 막 밧줄로 묶여있고 옆에는 무슨 소설책들이 있던데……. 괜찮은 거 맞아?” “어, 그거 내가 했어.” 친구는 서가를 정리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내가 뭐라고?하고 다시 묻자 친구는 또 태연하게 말했다. 그거 내가 했다고. 우리 학교 대부분의 학생들은 도서관 내부에 화장실이 있다는 것을 몰랐다. 출입문 뒤쪽에 위치해있는데다가 애초에 도서관에 오지 않으니 모르는 게 당연했다. 가끔씩 도서관을 찾는 아이들마저도 수행평가나 학원 숙제 때문이었다. 친구는 학생 사서였다. 대출과 반납을 도와주고 서가를 정리하는 일을 했지만 도서관을 찾는 이가 없었으므로 사실 할 일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도서관에 화장실이 있다는 것은 친구를 통해 알게된 거였다. 그런데 화장실에 사람이라니. 나는 학원 숙제를 테이블에 버려둔 채 친구를 바라보았다. 친구는 나에게서 등을 돌리고 여전히 서가 정리에 몰두하고 있었다. <808~813 문학>코너였다. “야……. 미친 거 아니야? 사람을 왜 가둬?” “나는 책을 열심히 안 읽는 애들이 싫어.” 무슨 뜬금없는 소리야? 나는 얼굴을 찡그렸다. 친구는 그 애가 도서관에서 책을 안 읽고 있었다고 말했다. 노트북을 켜고 수행평가를 하고 있었다고. ‘나는 책 같은 거 몰라요’하는 표정으로 PPT를 만들고 있었다고. 그래서 그랬다고 말했다. 도대체 책을 열심히 안 읽는 거랑 감금이랑 무슨 상관이 있는 걸까……. 나는 고민했다. “그래서 내가 걔를 가두면서 뭐라고 했는지 알아? 나는 열심히 하지 않는 사람들이 싫다! 열심히 하지 않는 사람들은 아름답지 못하다! 그러고선 소설책 몇 권도 넣어줬어. 읽으라고. 야, 열심히 하는 사람들을 봐. 얼마나 아름다워?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세계를 만들고 가꾸어나가는 사람들 아니니?” 열심히로 만들어진 세계라……. 그런 것은 생각만해도 소름돋았다. 애초에 그런 게 존재하기는 해? 존재한다해도 오랫동안 지속될 만큼 단단하고 견고해? 그렇게 묻고 싶었지만 친구가 너무 황홀해하는 표정을 짓고 있어서 그냥 입을 다물었다. 열심히 책을 읽는다니, 그런 게 가능한지 잘 모르겠다. 중간고사 시험범위였던 「소나기」를 백날 분석해도 잘 모르겠고 그게 도움이 되는지도 모르겠는데. 열심히 해서 되는 게 있다면 친구는 지금쯤 문학 선생님의 것을 능가하는 지식이 있어야 한다. 저녁 일곱 시까지 매일 도서관에 틀어박혀서 책만 읽으니까. 친구는 심취해서 열심히에 대한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다. 나는 피로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어쨋든……. 나는 책을 열심히 읽지 않는 애들이 싫다고.” 친구가 나를 돌아보았고 나는 움찔 놀랐다. 서가 쪽은 어두워서 친구의 긴 머리가 어둠에 잠식된 듯 보였다. 아니, 그것은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게 아니라 학원 문제집을 쳐다보고 있는 거였다. 나는 슬그머니 문제집을 가방에 넣었다. 친구는 내 동작 하나하나를 꼼꼼히 살피는 듯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주시했다. 친구의 눈동자가 나를 따라왔다. 나는 허둥지둥 도서관을 빠져나왔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아무도 없는 긴 복도를 달렸다. 열심히. 가랑이가 축축했다. <산문부 차하>

「속」

덕원여자고등학교 3학년

김고은

도서관이 무너졌다. 특이하게도 분홍색 벽을 가졌던 동사무소 3층, 고작 교실만했던 작은 공간을 떠올린다. 아동 도서에는 낙서가 있고, 다른 책들도 다 오래되어 책등이 닳아 있었다. 그곳에서 내가 제일 좋아했던 것은 그 어떤 책도 아닌, 내 또래 아이였다. 새로 생긴 도서관 창밖으로 보이는 황폐한 거리, 그 중심에 묻힌 비밀을 끄집어낸다. 나는 옛날부터 도서관의 정적을 좋아했다. 책장 넘기는 소리, 종이가 스치는 소리, 가끔은 그곳의 눅눅한 책 냄새까지도. 하지만 우리 학교 도서관은 너무 시끄러웠다. 종종 게임기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산만한 곳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재개발 때문에 사람이 적은 옆동네 도서관을 자주 찾아갔다. 곧 수명이 다할 것처럼 깜빡이는 전등은 음산한 느낌을 주기도 했다. 수림이를 만난 것은 망가진 전등 빛조차 들지 않는 외국 문학 책장 앞이었다. 손에는 누렇게 색이 바랜 책이 들려 있었다. 긴 치마가 살랑였다. 우리는 대화 하나 없이 친구가 되었다. 항상 같은 책장 앞에 머물렀기 때문이었다. 나가는 시간이 맞는 날에는 동사무소 2층 로비에 앉아 자판기 커피를 뽑아놓고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다른 책을 읽을 때에도 항상 수림이 손에 들려있던 책은 도서관 책이 아니었다. 너덜너덜한 책등은 책을 너무 많이 읽어서, 색이 바랜 것은 관리 부실 때문이었다. ‘자기 앞의 生’이라는 제목을 가진 책에서 수림이가 제일 좋아하는 인물은 롤라라는 여자라고 했다. 나는 읽어본 적 없는 책이었기 때문에 그냥저냥 고개를 끄덕였지만, 수림이는 꽤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건 비밀인데, 롤라 아줌마랑 내가 비슷하거든.” 곧 동사무소가 철거된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서서히 수림이에 대한 의심을 품기 시작했던 것은 그 해 12월이었다. 수림이는 내가 어느 시간에 도서관을 가도, 마치 기다렸다는 듯 항상 먼저 않아 책을 읽고 있었다. 친구라고 생각했던 시간이 무색하게도, 나는 수림이가 다니는 학교조차 모르고 있었다. 어째선지 오지 않는 수림이를 기다리며 하염없이 책장을 넘기던 것은 크리스마스 다음날이었다. 난방이 잘 되지 않는 바람에 손이 굳어 책을 읽기가 힘들었다. 깜빡이는 전등 소리가 오늘따라 유독 시끄러웠다. 그건 창밖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소란을 피우는 사람들의 손엔 커다란 판이 들려있었다. 재개발, 보상금, 강제 이주, 철거……. 눈을 찡그리며 글씨를 읽던 나는, 그곳에 있어서는 안될 글씨를 읽었다. 시선을 옮겼다. 누렇게 바랜 책을 든 수림이였다. 그 애는 내 쪽을 보고 있었다. 도서관으로 올라온 수림이는 언제나처럼 발목을 덮는 치마를 입은 채였다. 그 애는 말이 없는 나를 데리고 창가로 향했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창밖을 가리켰다. 그곳엔 아무 것도 없었다. “저게 우리 집이야. 쫓겨났지.” 이제 여기서도 떠나야겠지, 하는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수림이는 손에 들린 낡은 책을 책장에 꽂았다. 그 애는 놀란듯한 나를 보며 살갑게 웃었다. “무언가를 제일 숨기기 좋은 곳이, 도서관이래.” 그 애는 살짝 치마를 들추며 말했다. 치마 속에 입은 바지가 드러났다. 그리고 그는 뒤돌아, 도서관을 걸어나갔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이제 고등학교 3학년이고, 내 손에는 빛바랜 책이 들려있다. 전등이 깜빡이지 않는 도서관에, 새로 들어온 책을 펼친다. 얼마 전에 1쇄가 나온 새 책이다. 두 책의 제목은 똑같다. 새 책에는 그림이 좀 더 많을 뿐이다. 새하얀, 책장을 넘긴다. 남들과 다르게 그려진 롤라 아줌마의 모습을 손가락으로 훑는다. 살랑이던 치마 속, 나만 아는 그의 비밀을 떠올린다. <산문부 차하>

「비밀」

고양예술고등학교 2학년

이수련

<월계화>가 속삭였다. 연지야, 오늘은 나 빌릴거지? 응? 나는 한쪽 귀를 틀어막고 노트에 황정은의 문장을 따라 적었다. 슥슥슥. 도서관에는 흑연이 종이 위에서 갈리는 소리만 들렸다. 연필을 세게 쥔 탓에 손이 저려왔지만 계속해서 황정은의 문장을 적어 내렸다. 마지막 문장을 남겨두고 있을 때 즈음 <월계화>가 다시 속삭였다. 오늘은 나 읽어주기로 약속했잖아. 약속 했으면 지켜야지. 나는 펜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월계화>가 있는 800번대 책꽂이로 걸음을 옮겼다. 붉은색 표지에 은박으로 제목이 새겨진 <월계화>가 제자리에서 쿵쿵대며 흥분했다. 나는 검지 끝으로 천천히 책등을 쓸었다. <가나>, <국경시장>, <그 개와 같은 말>……. <월계화>를 지나쳐 그 아래 칸에 꽂힌 <바늘>을 집었다. 출판사와 저자명을 확인하고 표지를 넘겨 첫장을 읽기 시작했다. <월계화>는 원목 책장과 딱, 딱, 하고 부딪히는 소리를 내며 주의를 끌었다. 내가 힐끔 쳐다보자 그대로 고꾸라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하는 수 없이 <월계화>를 주워 제자리에 꽂으려는데 이번에는 목소리를 죽이지 않고 내게 따지는 투로 말했다. “맨날 읽을게, 읽을게, 하면서 왜 한번도 나를 꺼내지 않아? 내가 얼마나 널 기다리는지 너는 모르지?” “내일 백일장 있어서 그래. 지금 내가 무명작가 소설읽을 시간이 어딨냐. 내일 읽을게, 내일 <월계화>를 제자리에 끼우자, 그 애는 표지를 떨면서 우는 소리를 냈다. “아, 알겠어. 조용히 해. 지금 읽을게.” 그 애를 다시 꺼냈다. 책은 사람 손을 많이 타지 않은 듯 모서리가 뾰족했다. 책을 반으로 펼치자 쩌저적, 하고 소리가 났다. 나는 가장 뒷장으로 넘어가 책정보를 읽었다. “ 저자 김사탕. 1판. 1쇄. 출판사 이름이, 처음 들어보는데? 저자 이름 왜이래. 본명이야?” “ 그건 아닌데, 그냥읽어봐. 재미있어.” 나는 고개를 갸웃하고 첫장으로 돌아갔다. <월계화>는 긴장한 듯 목을 가다듬었다. 너무 재미있어도 놀라지마. 나는 천천히 검은 글자를 읽어 내려갔다. 문단을 넘어갈수록 눈썹이 찌푸려졌다. 모태솔로인 여자가 대기업으로 첫 출근……. 가다가 정장을 입은 남자에게 커피를 쏟아……. 알고보니 그 남자가 전무……. 야 잠깐만, 지문에 왜 이모티콘이 나와? 나는 붉은 표지를 덮고 책꽂이에 쑤셔넣었다. “너 라이트 노벨이었냐? 라이트 노벨 주제에 문창과 지망생인 나한테 친한척을. 내가 상을 못 타는 이유가 있었네. 소름돋아.” 배신감이 컸다. 분을 이기지 못하고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월계화>가 책장 선반쪽으로 기어나와 내게 애원했다. “아냐, 연지야. 라이트 노벨이 뭐가 어때서.나 네가 생각하는 그런 나쁜 책 아냐. 조금만 더 읽어봐. 우리 친구잖아, 응?” “입 닥쳐! 친구같은 소리하지 마. 근묵자흑이라더니, 너 때문에 내 수상실적이 이 모양이었던 거야.” 나는 800번대에 꽂힌 그 애를 꺼냈다. 이런 것도 문학이라고. 씩씩대며 책장을 가로질러 아무 곳에, 두꺼운 종교서적들 사이에 쑤셔넣었다. “네가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내가 얼마나 잘해줬는데. 친구도 없는 게 말 좀 걸어줬더니 기어 오르는구나.” 나는 손으로 귀를 틀어막고 <바늘>을 읽었다. 중얼중얼, 주문처럼 소리내어 읽었다. “그딴 순수문학해서 누가 보기나 할 것 같아?” 구석에서 <월계화>가 소리쳤다. 나는 그쪽으로 빠르게 걸어가 붉은 표지의 책을 꺼냈다. 그것을 바닥에 두고 마구 짓밟았다. 도서관 가는 것을 좋아하진 않지만 친구가 대신 반납을 해달라고 부탁해서 어쩔 수 없이 들렀다. 유리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섰는데, 박연지가 책을 짓밟으며 씩씩대고 있다. 평소에도 멀쩡한 놈은 아니라고 생각 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