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제 8회 콩쿠르 수상작(김연신, 이균영, 최시한, 박남준, 조미...
등록일 2015-06-26
작성자 학과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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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부 장원>
다리
김연신(경기고)*
강물은 검게 희게 밤같이 퍼렇게 바위같이 까맣게 정오 같이 하얗게 얼룩 덜룩 얼룩 덜룩 눈을 부릅뜨며 검붉은 볼을 태우며 소리지르며 이를 드러내며 꿈틀 꿈틀 끔틀 헤어서간다. 너무 목이 말라 깨어나듯이 목이 타들어 와서 깨어나듯이 난간에 서서 동상을 싸매었던 붕대를 던져버린다. 겨울의 신음들을 던져버린다. 잠을 못 잔 밤들과 그때 이어져 오던 고양이 울음을 떨어버린다. 흩어지던 발길과 시선들을 거두어 던져버리며 ‘칼춤을 출테다.’ 난간에서 떨어져버리는 겨울상처 조각들 앞에서 내가 무척이나 거만스럽다.
던져버리는 나의 손가락 끝에서 겨울의 흔적을 떠는 손가락 끝에서부터 시작되는 전율, 내일 내일 내일 수도없는 내일의 햇살들이 나의 손을 잡고 춤을 청한다. 무곡을!
하늘을 가로지르는 나무에 이파리 흔들리듯이 만리를 소리치는 강 위, 다리의 돌마다 마다에서 무곡을.
강물은 소리치며 검게 희게 퍼렇게 까맣게 얼룩 덜룩 얼룩 덜룩 꿈틀 꿈틀 헤어서간다.
*시인/교보문고 상무이사, 『시를 쓰기 위하여』(1996), 『시인의 바깥에서』(1999)
<시부 가작 2석>
다리
이균영(경복고)*
꽃 피는 계절은 서러운가
나의 세포를 스미어 지나는
저 꽃잎.
떠나 보내는 눈망울에는
꽃바람 이는 잔잔한 사람이 있어
이렇게 하늘안고 서 있으면
당신의 기쁨도 아픔도
악수의 체온처럼 젖어와
다리 위에서
당신과 또 당신이 만나거든
우리는 하나같이
꽃잎되어 흐르자.
다리 위에 서면
자분정(井)치솟던 젊은도
님처럼그윽한 곳에서 흐르는
여울물 같아져
나는 말하지 않고도
당신과 당신 가슴에서 이루어져
노래하자.
새벽이면
살아나고 싶어하는
생동의 몸짓 속에서
-계절이 달려간 창을 열면
언제나 그렇 듯-
나는 솔로몬의 영화에도
귀먹은 벙어리
사랑 담긴 꽃잎 보며
홀로 서 있자.
*소설가(작고)
<시부 가작 1석>
그늘
최시한(용산고)*
점심나절
열아홉 내 키만한 나무아래 누우면
가만히 누군가 손을 내민다.
수없이 찢어져 너풀거리는
그의 윤나는 손톱 그림자에서부터
수액의 거울 속
은밀히 숨어있는 파편 틈사이로
나느 비단뱀처럼
기어들고 만다.
산은 꾸겨진 소짓종이같이
이쪽으로 미끌어지고
바람속에 문신을 던져대는 것은
흔들리는 삼림
거기서 뜨거운 흑인을 만나고 외국
어로 노래를 부르며 웃고 웃고 웃다가는 황
금빛화살을 훔쳐 붉은 열매를 향하여 배고픈
활을 버티고……앗 해는달처럼 떨어졌다
정신없이……
*소설가, 숙명여대 국문과 교수. 『허생저을 배우는 시간』등 다수
<소설부 장원>
5월이 오면
박남준(성신여고)
고개를 쳐들면 얼굴에 온통 푸른 물이 배일 것처럼 맑은 하늘이다. 마을에서 꽤 멀리 떨어진 곳까지 들어왔으니 벌써 한 나절은 되었을 게다. 워낙 깊은 산골이라서 돌보아 주는 이도 없었을 텐데 군데 군데 만발해 있는 벚꽃이 화려하다. 한 여름인 양 내리쬐는 뜨거운 태양탓으로 어린아이에서부터 힘센 장정들까지 모두들 지쳐버린 눈치들이다. 허 노인은 젊은 것들이 왜 그리 패기가 없느냐고 호통을 칠까 생각도 해보았으나 아랫배에 힘이 가지 않아 미처 용기를 내지 못하고 만다. 저만치 뒤에 쳐져서 따라오고 있는 아낙네들이 머리에 꽃함지를 이고 있는 것이 마치 사람 아닌 진달래가 날아오고 있는 듯하다.
진달래, 그것은 허 노인에게 자식처럼 사랑스러운 꽃이다. 마을사람들을 이끌고 산을 오를때마다 노인은 꿈속에서만이 반갑게 이야기 할 수 있는 할멈과 며느리를 찾아나서는 듯 가슴이 설레이곤 한다. 마을을 품에 안고 둥그렇게 누워있는 달래산에는 해마다 봄이 되면 만발하는 진달래가 앞개울에 영롱한 분홍 그림자를 드리운다. 조용하기만한 마을이 생기를 띄고 분주해지는 것은 바로 4월이거의 끝나가는 이때부터이다. 도시에서 온 사람이면 누구나 으레 허 노인을 찾기 마련이다. 노인의 힘을 빌어서 달래산의 진달래로 화주를 담는다고 했다. 노인은 그때마다 마을 사람들을 모아 앞장을 서서 산을 오르는 것이다. “에구, 다리야. 쪼금만 쉬어갔음…….” 벌겋게 달아오른 볼에 잔뜩 심술을 불어넣은 채로 투덜대는 아이의 청으로 모두들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비탈진 산 아래에서부터 길게 늘어앉은 마을사람들의 행렬이 꾸불 꾸불 뱀의 모양을 이루고 있다.
“아버님, 올해는 우리가 한 발 늦었죠 ”
어느 결에 덕이가 옆에 앉아서 웃고 있다. 그를 보자 노인은 이내 죽은 외아들을 생각해냈다.
“……글쎄말여. 진달래가 많이 시들었구만.”
“아버님도 내년부터는 그만 쉬도록 하세유. 아직 팔팔한 우리네가 어찌…….”
“무슨 말여! 이깟 산을 오를 힘이 없을 까봐서 이 홀애빈 아직 안 늙었단 말여.”
벌컥 화를 내던 노인의 가슴이 저려온다. 덕이의 말처럼 자기는 이제 늙었는지도 모른다. 유난히 고추장을 맛있게 담그던 며느리와. 두 늙은이 죽을 날이 가까워졌다면서 등을 쳐주던 할멈이 오늘따라 왜 그렇게 그리워지는 것일까 툇마루에 깔아놓은 진달래가 시들까 두려워 물을 끼얹으며,
“아부님! 화주도 맛이 쓴가유 ”
쾌활하게 웃음짓던 며느리가 시름 시름 앓다가 달래산의 꽃이 거의 질 무렵 세상을 뜬 것은 재작년 5월의 일이었다.
“아부님, 어머님 진지는 누가 해 드리나유 ”
입에 거품을 잔뜩 문 채로 꿈결처럼 뇌까리며 죽어간 며느리였다. 방앗간 집 덕이는 살아왔는데 겨우 석달 남짓 채우면 되는 제댓날을 외면한 채 죽어 돌아온 남편을 여의고 몇 날밤을 울어 지새우던 착한 며느리였다. 게다가 할멈까지 이듬해 봄에 덜컥 세상을 뜨자 허 노인은 의지할 데 없는 외톨박이가 되어버렸다.
“덕이 이 사람아, 우리 할멈이나 메느리가 이맘때쯤이면 모두 진달래를 함께 따겠다고 벼르던 일이 생각나는구만…….”
따끔하던 눈시울에 엷게 번지는 눈물을 소매 끝으로 문지르며 허노인은 꺽 꺽 딸국질을 한다.
“어젯밤 꿈에 꺽, 할멈과 메느리가 꺽, 나타났단 말여. 자꾸만 산에를 꺽, 올라가자고 그러드구만.”
고개를 숙인 노인의 목 뒤로 드러난 꽤재재한 동정이 퍽 가련하게 보인다.
“지가 왜 아버님 심정을 모르겠어유. 정말 힘에 부치실 것 같아 그랬지유.”
거무죽죽한 덕이의 얼굴에 짧막한 경련이 스치다 만다.
“이 늙은 것이 주책없게스리 자네에게 화를 내서 안?畸만? 그러나 진달래를 딸 힘이 벌써 죽어버린 건 아녀.”
모두들 허노인을 바라보며 아무 말이 없다. 꼬옥 감은 노인의 눈꺼풀에 잔주름이 물결진다. 아이들이 누르고 앉은 풀꽃이 발밑에서 애처롭게 살랑거린다. 나무 그늘에 내려놓은 꽃더미가 해면처럼 부풀어 있는 것이 폭신한 그 위에 한번 누워봤으면 하고 어린 사내아이 하나는 생각했다.
깊은 산속에는 이름 모를 새도 많다. 나무 위 높은 곳에서 다투어 가며 지저귀는 새의 맑은 울음소리가 시원스런 바람결과 더불어 사르르르한 졸음을 몰고 오고 있었다.
<수필부 장원>
아카시아
조미하(성동고)
나는 시골에서 초등학교를 다녔습니다. 길게 신작로가 지나쳐있는 ‘목골’은 나의 고향이기도 했습니다. ‘목골’은 어머니가 태워주시던 요람같은 곳이었습니다. 마을 서쪽엔 개울이 흐르고 있었고 산엔 나무가 무성했습니다. 학교는 산비탈에 서 있었습니다. 학교라고 해야 전교생은오백명도 안되었습니다. 그 때 나는 같은 마을에 살고있는 영희와 같이 학교엘 다녔습니다. 그러나 집에서는 영희와 다니질 못하게 했기 때문에 나는 집에서 미리 나와 학교 가는 길에 있는 큰 고목나무 밑에서 영희를 기다리곤 했습니다. 나무가 무척이나 컷기 때문에 그 뒤에 숨어 있다가 영희가 오면 ‘왁’ 하고 띄어나가 놀래주기도 했습니다. 영희와 같이 다니는 것이 무척 재미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딴 애들은 모두들 영희와 같이 놀려고 하지 않고 문둥이라고 놀려대면서 피하는 것이었습니다. 언젠가 어머니가 학교에 오셨습니다. 나는 선생님한테 불려가 어색한 표정으로 영희와 놀지 말라던 선생님의 얘기를 들었지만 나는 언제나 고목밑에서 영희를 기다렸습니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우리는 신작로 길을 따라 걸었습니다. 영희가 자기 아버지가 그리로 올거라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신작로를 따라 걸으면서 아카시아 꽃잎을 땃습니다. 가로수가 아카시아 나무로 되어 있기 때문에 초여름이면 하얗게 아카시아가 피어 향긋한 냄새로 풍겼습니다. 나는 나무에 올라가서 아카시아 꽃잎을 따서 영희에게 던졌습니다. 아카시아 가시가 따갑기도 했지만 아카시아 꽃잎의 맛이 좋아서 자꾸만 땃습니다. 나는 나무 높이 올라가다 가지가 부러지는 바람에 떨어졌습니다. 내가 정신을 차린 건 얼마되지 않아서 였습니다. 눈을 뜨자 영희는 파랗게 질린 채 울고 서있었습니다. 나는 얼마 다치지는 않았지만 걷기가 힘들었습니다. 영희가 부축을 해주어 고목나무 있는 곳까지 와서 영희한테 집에 가라고 했지만 영희는 울고만 서 있었습니다.
그날 나는 다리의 통증 때문에 울면서 어머니에게 낮에 있었던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머니는 ‘영희하고 놀지 말랬잖아. 걔 아버진 문둥이야 문둥이’ 하며 어머닌 영희네 집으로 갔습니다. 나는 몰래 쫓아갔습니다. 어머니는 영희 어머니에게 야단을 하는 것이었지만 영희어머닌 용서만을 비는 것이었습니다. 그 다음부터 영흰 고목나무밑엘 오지 않았습니다. 학교에도 오질 앉았습니다. 나는 그날 그런 일이 있은 후 영희에게 죄스러웠습니다. 어머니가 너무 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영희에게 아카시아 딴 것을 주려고 했지만 영흴 만날수가 없었습니다. 한번 영희와 개울가에서 마주쳤을 때에도 영흰 그냥 도망가버렸습니다. 어느날 한 남루한 남자가 영희네 집을 찾아와 영희와 영희어머닐 데리고 그 신작로로 떠나갔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형사가 문둥이 집안이라 잡아가는 것이라고 좋아하는 표정들이었지만 나중에 들은 얘긴 소록도로 영희 아버지를 만나러 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하얗게 아카시아가 피어있는 이 무렵이면 나는 영희를 생각하면서 아카시아가 지는 날까지 허탈한 마음으로 손이 가볍게 떨리고 있음을 감지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