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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제 26회 콩쿠르 수상작(이상덕, 이영, 김유리, 임지희)

등록일 2015-06-26 작성자 학과관리자 조회 775
<시부 장원> 등불 이상덕(성동고) 불을 켠다. 물먹은 불빛 하나로 밤 보다 긴 편지를 쓴다. 어머니 아무도 뵈지 않는 이곳에서 울까 울까 했는데 이미 울어버린 눈물이 많아 더 이상 흘릴 것이 없던 당신 어두운 눈물 안으시고 웃음으로 대하신 당신 앞에서 속으로 속으로만 오열하던 못난 자식을 용서해 주십시오 어머니 당신은 어둠을 사르는 꽃무늬 물결 눈물로 맺은 빛의 씨앗 밝히소서 밝히소서 당신이 일어선 그 자리를 밝혀 주소서 헛딛지 않을 자리 마련해 주소서. <시조부 우수 1석> 바람소리 이  영(부안여고) 메아리 따라 가끔 뒷짐 진 그 일월로 해묵은 인정 속에 빛살은 여물어서 하늘 연 싱싱한 나무 가슴으로 뇌인다. 가슴 속 늘 푸른꿈 울울이 엮어가며 나무의 잔 가지만 흔들어 본 자리에 시비도 타협도 없는 중중함의 한 풍경 세월의 수렁길을 촘촘히 걷다 보니 꿋꿋한 마음으로 퍼부은 꿈의 자락. 추억의 가지 끝에서 등불 하나 밝힌다. <소설부 우수 1석> 미명 김유리(대전 성모여고) 정미는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끈끈한 땀이, 병원 이름으로 총총한 환자복에 배어들었다. 에어컨이 고장 났다고 대신 가져다 놓은 선풍기는 연신 더운 바람만 뿜어대었다. 그 때 간호원이 들어왔다. “정미야, 약 먹을 시간이야.” 정미는 돌아 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자, 고집 부리지 말고.” “싫어요 싫단 말여요. 그딴 약 다시는 안 먹어요. 내 얼굴을 좀 봐요!” 어깨에 얹혀 졌던 간호원의 손을 뿌리치며 정미는 소리를 질렀다. 숯덩이처럼 까맣게 되어버린 정미의 얼굴은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다. “금방 괜찮아져. 빨리 나아야지.” “차라리 이 병원에서 평생 살겠어요. 퇴원해도 모두 나를 피할 거예요. 나병에 걸렸던 사람인걸요.” “그렇지 않아. 완쾌가 가능한 상태니까.”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니 소용없어요.” “이러면 안 돼. 빨리 약 먹자.” 벌떡 일어 선 정미는 간호원을 밀치고 달려 나갔다. “정미야! 정미야!” 간호원이 따라서 나왔을 때에 정미는 시야에서 벌써 떠나 있었다. “김 간호원. 정미 양이 또 약을 먹지 않겠다던가 ” 약 쟁반을 들고 서 있는 간호원을 보고, 양 박사는 말을 건넸다. “네 큰일 이예요. 밥에다 약을 몰래 넣어 먹도록 하지만 효과가 있을 것 같지 않아요.” “DDC를 복용하는 환자마다 말썽이니 걱정이야.” “정미는 사춘기를 지내잖아요. 그런데 그보다 다른 걱정이 있는 것 같아요. 가족들의 문병도 거절하고 있거든요.” 정미는 김 간호원과 양 박사가 들어가는 것을 보고선 숨었던 곳에서 나왔다. 병원 건물의 오른쪽 구석에 빈 약상자를 쌓아두는 곳이 있었다. 언젠가 정미는 이 상자들 사이에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두었다. 그 바로 앞을 지나가면서도 정미가 숨어 있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정미는 고개를 푹 숙이고, 슬리퍼 소리를 일부러 크게 내며 걸었다. 며칠 전 자기가 잠든 줄 알고, 어머니와 언니가 나누던 대화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엄마 아무래도 파혼해야 겠어요. “정미 때문에 ” “그런 사람인 줄 몰랐어요. 차라리 잘된 일인지도 몰라요. 동생이 나병에 걸렸다고, 저까지 의심하더군요.” 어머니는 손수건으로 눈두덩이를 찍어냈다. “정미가 이렇게 된 걸 숨겼어야 했는데…….” “아녀요. 동생을 숨겨 가면서 결혼하고 싶진 않아요.” 침묵이 흘렀다. 며칠 전 어머니와 언니의 대화 속에서 빠져 나온 정미는 머리를 떨었다. 그러나, 자기 때문에 언니가 불행해진다는 생각은 털어지지 않았다. 차라리 자기가 식구들에게 잊혀지길 바랬다. 구차한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 동정을 받으며, 다른 사람들의 손가락을 받으며, 그리고 가족에게 짐이 되면서 까지. 문득 고개를 들었다. 2층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그 곳엔 이젠 치료할 수 없는 나환자들만 있었다. 간호원들과 의사를 제외하고는 출입을 금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 번 가보리라 생각했다. 마침 간호원들과 의사들의 점심시간이었다. 수위 아저씨의 눈을 피해 뒤쪽으로 돌아갔다. 보일러실이 있었다. 정미가 입원해 있는 병동과 같은 구조라면 보일러실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을 것이다. 사용하지 않아 먼지가 뽀얗게 앉은 손잡이를 돌렸다. 소리 없이 문이 열렸다. 다행히 그들을 직접 보고 싶었다. 어떻게 살고 있는지 자신의 앞길을 보고 싶었다. ‘2002호’. 노크도 없이 문을 살며시 열고 들어갔다. 한 아주머니가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 노란색 털 쉐타였다. 보고만 있어도 더위가 타 들었다. 노무도 열심이어어서 정미가 들어 온 줄도 모르고 있었다. 침대 위에서 흰 앞치마, 장갑, 마스크까지 하고, 대바늘을 움직이는 손은 무척 더뎠고 신음 소리가 들렸다. “한 여름에 무슨 털 쉐타예요 ” “누구지  여기는 들어올 수 없는데 어떻게 들어왔지 ” 약간 놀라는 듯 했지만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1병동에 있는 환자예요.” “빨리 가. 여기 있으면 안 돼.” “괜찮아요. 여기 멀리 있을께요.” “그럼 조금만 있다가 가야 한다.” 걱정이 됐지만 장여사도 사람의 목소리가 그리웠다. 뜻밖의 이 손님이 반가웠다. “꼬마 옷 같은데요 ” “응 내 아들 옷이지 보내주려고. 지난겨울부터 짜던 것인데 손이 이렇게 생겼으니.” 정미의 눈은 갑자기 차가운 빛을 발했다. “그 아들이 옷을 받고 기뻐할까요  문둥병에 걸린 어머니가 짜준 옷이라고 외면할 텐데.” 가슴을 찌르는 듯한 말이었다. 그러나, 장여사는 놀라지 않았고, 동요되지 않았다. “난 그렇게 생각지 않아.” 계속 뜨개질을 하며 말을 했다. 마스크에 입이 가려져 있었기 때문에 되도록 천천히 또박또박 말을 이어갔다. “난 내 아들에게 정성을 주고 싶은 거란다. 아들이 외면을 하더라도 내 마음을 전해 주고 싶어. 내게 남아 있는 것 모두를 말이야.” “글쎄요. 차라리 아들에게서 빨리 잊혀지는 것, 그것이 정말 아들을 위하는 길이 아닐까요 ” “언젠가는 잊혀지겠지. 하지만, 나에게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보람되게 보내고 싶단다. 보통 사람들에게 주어진 시간보다 나에겐 너무도 적은 시간이 남아있지. 이 시간동안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산다는 것이 나에겐 큰 힘이 돼.” “가족들에게 짐이 될텐데요 ” “누구든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있어. 짐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자기의 생에 주어진 시간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보내는 거라고 난 생각해. 지금 이곳에 있는 환자들 모두에겐 실망이 있었지만, 삶의 의욕을 찾아가고 있어. 자신에게 주어진 일, 환자에게도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지.” 긴 이야기가 힘들었던지, 장여사는 길게 심호흡을 한 번 했다. 더운 공기가 침묵의 방 분위기를 눌렀다. 정미는 울고 있었다. 그렇게 매서운 질문을 던졌던 자기 자신에게 놀랐고, 장여사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부스스 일어났다. “이만 가볼께요.” “그래, 아 잠깐만! 이름이 뭐지 ” “정미예요. 강정미.” “나 정미에게 하나 부탁해도 될까 ” 정미는 무엇이냐는 듯 고개를 들어 장여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뜨개질 할 줄 아니 ” “예, 약간요.” “그럼 이 옷 끝마무리를 해서 우리 집에 부쳐 줘. 주소는 책상 속 메모지에 있어.” “아주머니가 다 하시지요.” “다음 주 월요일에 오른 손을 절단해야 하는데 다 끝내지 못할 것 같아서…….” 정미는 말없이 주소와 털 쉐타를 받아들고 방을 나왔다. 가슴 한 구석이 환해옴을 느꼈다. 장여사는 마스크를 벗었다. 정미의 차가운 말들에 따뜻하게 대답해 줄 수 있었던 것은 자신도 그런 시간들을 겪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분비물이 묻는 것을 걱정해서 끼었던 장갑을 어렵게 벗었다. 방으로 돌아온 정미는 책상 속에 감춰 두었던 약을 꺼내어 물과 함께 털어 넣었다. 검게 된 자신의 얼굴을 전혀 거스름 없이 보아주고, 자신의 잘못된 생각마저 고쳐 준 아주머니를 생각했다. 자신보다 더 나쁜 생활 속에서 그녀는 삶을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정미는 자신의 할 일을 생각했다. 누가 자신을 따돌린다 해도 해야 할 일이 주어져 있었다. 누구라도 밤을 맞게 된다. 그러나 이 밤을 잘 견딘 자만이 눈부신 아침을 맞이하게 된다. 정미는 고비를 넘겼다. 어두운 밤을 지나 새로운 날에 대한 희망을 안은, 미명의 시간을 껴안고 있는 것이다. 새삼 밝아진 웃음으로 털 쉐타를 무릎에 놓았다. 병문안 올 가족을 기쁜 마음으로 맞을 수 있을 듯 했다. 닫혀졌던 창문이 활짝 열렸다. <수필부 장원> 침묵 임지희(정의여고) 나는 침묵을 사랑한다. 살이 있는 생명의 진실한 침묵을 사랑한다. 새벽이 밝아오는 거리, 아무도 나와 있지 않는 거리의 고요한 침묵을 사랑한다. 나의 긴 잠을 깨우고 출렁이는 희망의 몸짓으로 일어서는 아침의 침묵은 뜨겁게 달궈져 있다. 아름드리 솟아나는 햇살. 내 긴 속눈썹에 내려앉아 이내 내 눈에 눈물을 고이게 하는 햇살의 여린 침묵을 나는 사랑한다. 이상을 쫓아 나르던 갈매기 조나단의 날개짓같이, 자신의 모든 열정을 사르는 이의 침묵은 너무 아름답다. 박꽃 핀 뒷집의 트레몰로 곡조를 사랑했던 어느 배우의 쓸쓸한 눈빛. 그리고 그가 남긴 마지막 침묵은 그가 한 어떤 대사보다 모든 이들에게 깊은 감동의 속살이 된다. 밤마다 외로운 숫사슴처럼 눈망울을 굴리며 별을 헤던 젊은 시인의 애잔한 침묵은, 믿음이 되고 순사한 삶의 時로 빛난다. 내가 사랑하는 벗의 침묵은 어떤 말보다 더 진실한 우정을 가슴 깊이 전해준다. 내가 좋아하는 조각가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은 침묵하고 있기에 신비롭고 깊이 있는 조각으로 숨 쉬는 지도 모른다. ‘생각하는 사람’을 볼 때마다 나는 조각의 온몸에서 묻어나오는 깊은 고뇌와, 우리가 소유한 생의 작은 알맹이마다 스스로 침묵을 잉태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산의 정상에 서면, 푸근한 온기와 더불어 침묵이 소유한, 우리가 수많은 몸짓과 언어로 다 채우지 못한 삶의 빈자리를 느낀다. 어쩌면 나는 이 빈자리를 침묵하기 위해 사는 것은 아닐까  밤마다 내 창가에 잦아드는 별과의 대화는 침묵에서 침묵으로 이르는 끝없는 길이다. 나는 그 길을 걸으며 고향에 돌아온 것 같은 아늑감과 길 끝에 있을 미지의 만남을 그려보곤 한다. 나무의 견고한 기둥과 하늘로 다가서는 줄기의 푸른 그리움은 비와 바람과 계절이 잉태한 침묵 속에서 빛깔을 더해간다. 나의 침묵은 이별보다 더 외롭고, 시보다는 자유로운 몸짓을 갖고 있다. 나는 나의 침묵을 사랑한다. 가끔씩 내가 터뜨리는 삶의 소리 있는 웃음보다 우연히 조그만 삶의 기쁨을 알았을 때 머금던 부드런 침묵의 미소를 영원히 머금고 싶다. 내가 아픔과 그리움으로 방황하고 슬퍼했을 때 친구는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너의 그리움을 달래기는 힘들겠지만 더 큰 비상을 위해, 너는 싱클레르처럼 알을 깨는 고통의 침묵을 겪어야 해.” 친구는 나에게 침묵의 의미를 일러주었다. 밤이 온갖 역경을 견디며 아침을 창조 하듯이 우리의 진실한 삶을 빛내기 위해 침묵은 꼭 필요한 외로움일 거라고. 내가 느끼는 많은 침묵의 덩어리는 조금은 쓸쓸하고 조금은 외롭지만, 나의 삶을 채워주는 진실한 빛이 되는 게 아닐까. 내게 주어지는 타인의 침묵을 사랑하며, 바라볼 수 있는 해맑은 눈동자를 갖고 싶다. 침묵은 가장 진실한 삶의 모습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