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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제 30회 콩쿠르 수상작(강종헌, 홍명옥, 김영임)

등록일 2015-06-26 작성자 학과관리자 조회 834
<시부 장원> 소리   강종헌(서령고) 내 소중한 이가 말했다 시간이 흐른 뒤에 그립고 그리운 건 늦봄을 접는 등나무 덩굴 꽃이라고 내 소중한 이를 생각하며 낮에도 밤에도 이른 새벽참에도 단절된 내 시간을 접는다 홀로임으로 등꽃 향기에 안겨본다 아직도 익숙지 못한 눈빛으로 향기는 그리움으로 외로울 수 밖에 없는 시간속으로 이끈다 낭만이라 현실을 방관하고 그리움에 거리를 헤매고 민중이 아쉬워 책을 들었고 시간이 덧없다 술에 의존했던 그 날 그날 내소중한 이는 열의 끝벽을 넘고 내겐 열의 끝이 다가온다 열의 끝은 외롭기만 할거라던…… 아직도 깨지 못한 나의 눈빛 등나무 꽃가루 빗방울이 콧등을 흐른다 흑…… 들려오는 힘찬 노래의 소리 다른 세상의 열 끝 같은 순수 눈을 비비며 비속을 헤친다 오늘밤 내 소중한 이에 떠오르는 영상속에 모든 위로와 포근함 속에 글을 띄운다 열의 끝에 외로움 열의 벽을 넘을 순박한 설레임으로 <소설부 가작 1석> 어느 날   홍명옥(강릉여고) “원한 맺힌 귀신들은 모두모두 물러가고 이제는 저승으로 훠이훠이 가거라…….” “징징징 징지징. 징지징지 징지지…….” 아까부터 바깥이 소란한 듯 싶었따. 나는 이불을 걷고 일어나 앉았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아까부터 꿈결인 양 징 소리며 북소리며 장구소리 같은 것이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 쓴 나의 귓속으로 흘러 들어왔다. 신경쓰지 않으려고 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소리는 더욱 커져 온 집안이 떠나 갈 듯 했다. 아마도 굿판이 벌어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기어이 할머니께서…… 나는 문을 벌컥 열지 않고 나무틀 사이의 빗바랜 창호지에 손가락으로 구멍을 뚫었다. 그리고는 게슴츠레한 눈을 비비며 그 구멍에 갖다 대었다. 역시, 굿판은 한창 절정에 이른 듯 했다. 흰 무명 저고리나마 깨끗하게 빨아 입고 연신 손바닥을 비벼 합장하시는 할머니께서 연방 허리를 접었다 펴시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울긋 불긋한 무당의 옷과 돼지머리며 시루떡이며 한 상 잘 차린 음식들도. 동네 사람들이 빙 둘러싸고 구경을 하고 있었다. 무당이 방방 뛰며 주문같은 사설을 늘어놓고는 부채를 접었다 폈다 했다. 굵게 패인 할머니의 주름살 박힌 얼굴이 왠지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눈을 창호지로부터 떼었다. 여전히 머리가 깨어질 것만 같았다. 나는 두려웠다. 그 무언가가 자신을 조금씩 죄어오는 것만 같은 석연찮음을 떨칠 수가 없었다. 자꾸만 똑같은 꿈을 꾸었다. 아버지, 사막을 헤매는 그 초라하고도 아쉽고도 안타까운 아버지의 뒷모습이, 끝없이 펼쳐진 사막을 다리를 질질 끌며 그 어디론가 계속 가고만 있었다. 아무리 불러도 목소리는 나오지 않고 아버지께선 얼굴 한번 돌리지 안으셨다. 작열하는 태양이 하늘에서 흐물거리고 모랫바람이 여기저기에 언덕을 만들며 살갗에 따갑게 와 닿았다. 하늘은 보랏빛이었다가 점점 검어져 가고 하늘 저쪽 끝은 사막과 맞닿아 있었다. 나는 항상 제자리만을 맴돌며 헤매이고 있었고 아버지와의 거리는 점점 멀어져만 갔다. 그럴 때마다 가슴이 바작바작 타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가슴을 쥐어뜯고 싶었다. 답답함, 왠지 모를 답답함. 그 어둡고도 암울한 답답함이 나를 미치게 할 것만 같았다.  아악!  벼랑 아래로, 끝도 없는 벼랑 아래로 차라리 영원히 떨어져 버렸으면……. 아버지 어렸을 적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별로 없다. 아버진 항상 굴석진 골방에 누워 계셨다. 좀처럼 밖에 나오시는 적이 없었다. 언제나 말이 없으셨고 밥도 조금밖에 안 드셨다. 그래도, 난 아버지를 속으로 좋아했다. 아버지는 키가 무척 크셨다. 그리고, 손가락도 희고 길어서 마치 우리 초등학교의 여 선생님 손 같았다. 아주 가끔씩 나를 불러 노래를 들려주시곤 했는데 항상 몇 소절 못 부르고 숨이 차 하셨다. 그때의 거친 호흡과 고르지 못한 숨소리, 그리고 쿨럭쿨럭 하시며 가슴을 움켜쥐셨는데 그러면서도 노래를 그만 두시는 적이 없었다. 그때마다 어린 마음에도 걱정이 되어 큰 눈망울을 굴리며 가슴 졸이던 일이 엊그제 일 같이 생각난다. 하지만, 아버지께선 그런 아련한 추억만 심어 놓으신 채 떠나셨다. 유난히도 기침을 심하게 하시던 날 이었다. 의사선생님이 다녀가시고 어머니와 할머니께서 몹시 다투는 소리가 들렸다. 집안 공기는 침울했고 가족들 사이엔 무겁고 눅눅한 우울과 쇳덩어리 같은 것이 달려있는 것만 같았다. 아버지께선 무표정이셨다. 며칠 뒤였다. 비 개인 오후였다. 마당에 도랑을 내고 내가 물장난을 하고 있는데 아버지께서 전에 한번도 본 적이 없는 한복에 두루마기를 입고 지팡이에 몸의 의지하신 채 마당으로 나오고 계셨다. 아버진 “애비 이제 간다. 세상으로 간다. 저기 저기…….” 나는 멀뚱히 쳐다만 보았다. 그리고 아버진 희미한 미소를 엷게 띄우신 채 천천히 집을 나가셨다. 그 모습이 어찌나 어린애 같이 맑으셨던지 나는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었던 것이다. 그 날 저녁, 읍내로 학교 갔던 형이 돌아오고 밭에 가셨던 할머니, 어머니께서 돌아오신 후에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아버지의 가출 때문에, 나는 아버지의 말을 그대로 전하고 뒈지게 맞았다. 아버지는 폐암이셨는데 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지 않으면 보름도 채 못 살 거라는 진단을 받으신 뒤 였던 것이다. 훗날 아버지에 대해 좀 더 알게 된 것은 아버지께서 얻은 지병과 여러 부수적 병들이 감옥에서 얻은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아직 뿌리내리지 못한 민주화에 대한 아버지의 지론이 사회 여러 모순에 수없이 부딪히고 그래서 깨어지고 조각나고 산산히 부서지고. 선두주자였던 민주화 운동의 결과로 투옥되고, 몹쓸 병을 얻고 사회에 대한 불신과 갑갑함으로 이제 무기력해지고 지친 몸을 이끌고 시골로 그 구석진 골방에서 혼자만의 고독과 외로움에 이를 갈고 치를 떨며 조금씩 조금씩 자신을 박제화 하고 계셨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도 아버지에 대한 말을 꺼내는 사람이 없었다. 아버지의 가출 이후로 어려운 살림에 짐이 되실 것을 아시고 휘적휘적 그 모진 세상에 산송장이나 다름없는 당신의 몸을 던지시러 가신 분, 아버지에 대한 생각 끝엔 왠지 모를 석연찮은 감정이내 가슴속에서 파도를 친다. 그리고 시린 파아란 하늘을 볼 때처럼 하릴없이 눈물이 난다. 아주 작은 그 기억의 끝에서 계시지만……. 형은 아버지를 참 많이 닮았다고들 했다. 유난히 희고 고운 살결이며 뚜렷한 이목구비 그리고 공부도 잘했다. 그래서 소위 일류대라고 칭하는 대학에도 무난히 들어갔다. 형은 우리동네의 자랑거리였고 우리집의 희망이었다. 형은 말수가 적었는데 그래, 형은 한 페이지의 침묵이었다. 항상 무언가를 말할 것 같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곤 했는데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그런 형이, 공부밖에 모르는 줄 알았던 혀이 데모를 하기 시작했다. 소위 말하는 운동권 학생이 된 것이다. 4월 어느 날인가 경찰이 집에 다녀갔고 방학도, 휴일도 아닌 어느 날 밤중에 내방으로 도둑 고양이처럼 들어왔다. 나는 깜짝 놀라 가슴이 멎는 줄 알았다. 이마에 피가 엉겨붙어 있었는데 옷이며 얼굴이 말이 아니었다. 좀처럼 흥분하지 않는 형이었는데 형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형은 아버지에 대한 모든 사실을 안다고 했다. 하지만, 아버지 때문만으로 이러는게 아니라고 힘주어 내뱉었다. 형은 피가 흥건한 이마며 얼굴, 손, 발을 치료하는 둥 마는 둥 하면서도 밤을 세워 편지를 썼다. 여등포 구치소로, 안양 교도소로…… 형이 사랑한다는 동지들을 위해, 형은 동지라는 말을 스스럼없이 쓰면서 그들을 그렇게 부를 수 있는 것이 매우 영광스럽다고 했다. 그들은 자신을 불행하다고도 생각하지 않고 희생되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며. 당당하게 주어진 일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길을 가는 것이라고. 국가 보안법이니 폭력이니 무시무시한 제목이 붙어 있지만 그들 또한 함께 술 먹고 꼬장 부리던 친구들이라고 했다. 형은 자기에게도 그런 죄목이 붙지 말라는 법이 없냐며 씁쓸히 웃었다. 그래, 언제나 법은 칼자루를 쥔 권력자들이니까, 맘에 들지 않으면 이 세상 아무리 착한 사람도 빠져나갈 수 없는지도 모른다. 형은 자신의 고통을 참으면서 그들에게 바깥 세상의 이야기를 전했다.  신선한 공기, 무르익은 햇살, 교정을 물들이는 푸른 신록, 봄을 타는 후배들의 넋두리들을 비둘기처럼 물어다 줄 편지를 썼다. 갇혀 있다는 것은 너무나 고통 스러운 일일 것이다. 사람은 원래 자유롭게 가고 싶은 곳에 가서 살고 싶은데서 살아야 하는 것이 본능인데, 젊은 그들이 육체적으로 묶여 있다는 것은 너무나 상상 이상의 고통이 아닐 수 없다. 형은 아주 조그만 것이라도 편지를 통해 그들이 느낄 고립감, 외로움과 싸우고 싶다고 했다. 날씨가 추워지면 어쩌냐는 걱정에 시멘트 바닥에 매트리스를 깔아 따뜻하니 걱정 말라고 말하는 그들이 자꾸 생각난다며, 그리고 오늘도 뒤를 돌아보며 돌아보며 거리를 헤매는 수배 받는 친구 녀석들도 생각난다며 눈물을 훔쳐내었다. 그들과 함께 감자탕에 소주 한잔 마시고 싶다며 나직이 말하기도 했다. 형은 내 가슴에 파문을 일으켜 놓고 돌아갔고 뒤늦게 이 사실을 안 할머니께서 피는 못 속인다며 길길이 띠ㅜ셨다. 그래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들 하지 않던가! 그런데 그런데 내 몸에서 역류하는, 내 혈관 깊숙이 흐르는 이 피는……. 어머니가 시름시름 앓다가 돌아가셨다. 주위 사람들은 화병이라며 모두들 혀를 찼다. 할머니께선 흰 소복을 입고 숨 죽여가며 눈물을 삼키셨다. 아마도 이 모진 세상에 두 형제를 남기신 채 당신보다 먼저 떠나신 것을 못내 원망 하시는 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눈물이  나오지 않아 쥐어짜듯 눈물을 짜내어 상주 노릇을 해야했다. 어머니에 대한 내 기억은 빛 바랜 16절지 마냥 덩그렇고 약간 허하고 약간 퇴색해 버린 어떤 그런 이상한 느낌이었다. 죽음, 어머니의 죽음 앞에 그저 깎아지는 듯한 벼랑을 언뜻 보았을 뿐이다. 끊어진 필름 마냥 언뜻언뜻 기억 사이로 비치는 어머니에 대한 막연한 감정. 춥다. 추워. 어머니가 떠난 뒤 비인 자리가 그래도 내 가슴 한 구석을 휑하게 만들었다. 자꾸만 추웠다. 아버지를 찾고 싶었다. 아직 죽음이 확인되지 않은 아버지의 잊혀져 가는 존재에 대한 의미를 저 세상 속에서 찾고 싶었다. 할머니께선 부쩍 왜소해 지셨다. 그리고 가끔 악몽에 시달리기도 하시고 헛소리도 해대곤 하셨다. 언젠가는 자꾸만 꿈에 미국에 간 작은 아버지가 보인다는 것이다. 아버지와는 대조적으로 공부에는 별로 관심이 없고 주먹이 세었다는. 그러던 작은 아버지께서는 홀홀단신으로 미국으로 행하신 것이다. 그 때 사람들에게 꿈으로 불타던 아메리카.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땅. 현대판 가나안. 사람들은 서울 상계동 누군가 맨손으로 건너가 자수성가 해 호강하고 산다는 소문 하나만 믿고 있는 것 없는 것 다 팔아 가지고 대부분 가진게 별로 없었지만 꿈의 나라 아메리카로 부툰 기대와 희망을 안고 무작정 배에 몸을 실었다. 허리띠를 바싹 [바른말 고운말을 사용합시다.]매며 겨우 3등칸 배삯이나 마련해 가지고 영어 단어 하나 모르면서, 그저 열심히 하면 돈 벌어 호강하 수있다는 그 꿈같은 이야기만 믿고서, 온갖 더러움과 추함, 욕지거리와 강도와 강간이 난무하는 그곳에서 마늘냄새나는 노란것들이라는 멸시와 천대를 노린내 나는 양키 놈들에게 받으면서 지독한 놈들이라는, 유태인같이 무서운 놈들이라는 모멸을 받으며 살아갈 그들이 무지개를 쫓아 가는 것이다. 작은 아버지도 그런 사람들 중의 하나였으리. 자유와 평화의 나라, 배운 것 없어도 무시 당하지 않는 나라라고 굳게 믿으며 그 흔들리는 배의 맨 아래칸에서 내장이 뒤집히는 그 배멀미를 해대며 우리나라의 90배가 넘는 그 나라에 갔을 것이다. 일제시대에 저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의 싸구려 노역군이었던 그 후예들이…… 그런데로 자리를 잡고 산다는 소식을 들었따. 그런데, 얼마 전 이었다. 한인 상가에 불을 지르고 사람들을 구타하고. 주먹 꽤나 쓴다는 작은 아버지도 그 거대한 흑인 폭동 무리들 앞에 무너져 보험도 들지 못한, 그 동안 피땀 흘려, 허리띠를 있는 대로 [바른말 고운말을 사용합시다.]맨 그 결과인 가게를 홀라당 재로 화해 버리고 만 것이다. 이제는 어느 정도 자리가 잡혀 가족들을 초청 하려 했는데 이제는 모든 것이, 그간의 그 모든 것이 한낱 물거품이 되고, 허사가 되고, 피맺힌 작은 아버지의 전화를 받고 할머니께선 며칠 내내 우셨다. 허무 하니, 허무하고 허무했다. 그래, 모든일이 다 그럴 런 지도 모를 일이지……. 할머니. 할머니께서 점을 치셨나 보다. 우리 집의 지신이 노했다나, 아버지 원혼이 구천을 헤맨다는 둥 이상한 소리를 듣고 오셔서 아마도 굿을 한번 해야겠다고 지나치는 말로 하셨다. 나는 점이니, 굿이니 하는 것이 다 쓸데없는 미신 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 한편으로는 무언가 끌리는 것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할머니를 보면 볼수록, 그 움푹하게 패인 주름살을 보면 볼수록……. 시간 속에서 모든 과거가 묻히는 것처럼 우리들, 우리 가족들도 하나씩 기억을 잃는 것 같았다. 아픈 추억이니까. 생각할 수록 가슴 저미니까. 그냥 훌훌 털어 버리고 싶을 때가 많으니까……. 드디어, 할머니께서 마음을 굳히셨나 보다. 징소리 눈을 떴다. 방문을 열어 젖혔다. 굿은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부디 부디 저의 집안 굽어 살펴 주시어서 그간의 모든 재앙, 앞으로의 모든 재앙 다 재로 화하여 주옵소서. 비나이다. 비나이다~.” 무당이 이리저리 한삼을 휘두르며 넋두리 섞인 구슬픈 시나위 가락을 읊조렸다. “~궂은 날 있으면 개인 날도 있으리. 이제는 재앙 다한 그 어느 날 까지 복을 이 집에 뿌린다아~ ” 덩덩덕 쿵덕, 덩덩덩 쿵덕, 찡지징찌, 찡지찡……. 신발을 신고 마당으로 나갔다. 옷을 단정히 하고 나도 할머니 옆에 좀 떨어져서 섰다. 물어린 눈에 어두운 뒷골목을 헤메이는 형의 모습이 보였다. 나도 모르게 손바닥을 열심히 비비며 가만히 마음속으로 빌어보았다. ‘이제 앞으로 밝은 날이 되게 하옵소서. 그 어느 날이 될런지는 모르지만 슬픈 눈물 거두고 한 자리에 앉아 웃음 나눌 수 있는 그 날을 허락 하소서. 비나이다 비나이다.’ 할머니의 진지하고 단아한 모습에 물어린 눈에 환희 비쳤다. 할머니께서 나를 향해 약간의 렵은 미소를 지으셨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은 오후였다. <수필부 장원> 나   김영임(김천여고) 인간은 모든 것을 외적으로 드러나는 현실적이고 결과적인 요소들로 평가받게 된다. 요즘과 같이 인간성이 말살되고 정서적으로 결핍된 사회에서는 자신의 환경이 얼마나 중요시되고 있는지 모른다. 특히 12년간 축적해 온 지식의 수준을 대입시험 단 몇 시간에 평가 받아야 하는 우리학생들은 가슴으로 살기보다는 자신의 철저한 보호막 안에서 머리로 살고 외적요소로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그런 속에서도 가슴속으로 살아가면서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찾아 가고자 하는 친구들도 가끔은 있다. 이건 오만이고 착각일지도 모르겠지만 가슴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그 몇 명에 나도 끼어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렇기에 나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요소들 그리고 나의 뒷 배경들 중 그 무엇보다도 나의 용광로처럼 뜨거운 가슴을 사랑한다. 나의 가슴은 항상 진실만을 말한다. 나의 눈과 코와 입은 때론 거짓을 보고 더러운 것을 냄새 맡으며 허위를 말할 때도 있지만 나의 가슴만은 항상 진실하기 위해 나 자신을 되돌아 보게 하고 채찍질함은 물론 더러운 세상에 섞여들어 가고 있을때 그곳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준다. 여유가 있을 때면 물질적인 허덕임뿐만 아니라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인간애와 사랑에 굶주려 있는 사람들에게 따스하고 부드러운 가슴을 열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나의 가슴은 부드럽기만 한 것도 아니다. 사람의 입은 교활해 편의에 따라 다른 말들을 토해낼 수 있지만 그래서 항상 봄볕과 같이 느껴지지만 잘못이 있을 ??북풍의 차가움도 줄 수 있는 가슴의 솔직함을 사람들은 잘 모른다. 나의 가슴은 인간들의 추악함을 보았을 때 교활함을 보았을 때 아주 더 깨끗하고 경의롭기를 바라면서. 나는 또한 유행에 무척 둔감한 편이다. 그래서 가끔 한번씩 친구들로부터 아줌마같다는 말을 듣기도 한다. 그리 부유하지 않은 집에서 막내로 태어났기 때문에 멋모르던 어린 시절에는 거의 대부분 언니의 옷을 받아 입었다. 그런 이유로 언니가 아무리 최첨단 유행 옷을 입었다 해도 내가 입을 때쯤이면 이미 구닥다리가 되어버린 후였다. 그런 생활이 몸에 익은 나는 옷을 고르는 안목이 없어져 버렸고 황소 같은 고집 탓염B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