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국문문예창작학부
Dongguk University
나의 대학시절 회고기 / 이병주(50졸)
나의 대학시절 회고기
이병주(50졸 동국대 명예교수)
나는 광복과 더불은 감격과 그에 따른 혼란이 다소 갈아앉고, 통일을 위한 좌우합작이 비롯된 1946년 몹시도 무더운 8월 새로 승격한 동국대학 학부의 입학시험을 치르기 위해서 혜화동 전문부 교사로 보람찬 걸음을 옮겼다. 지금은 매각해서 아예 고급주택지로 변했지만, 그 때는 사뭇 한갓진 혜화동길이었다. 그 막다른 언덕에 자리한 벽돌건물 2층에 마련된 제 1고사장에서 시험을 치렀다.
내남없이 수험생들은 포악무도한 왜정의 횡포로 기회를 빼앗겼던 이른바 만학인데다, 별로 준비도 없이 무턱대고 지원한 400여 명이었다. 그러나 거의 사회의 물을 먹어 온 무리들이어서 조바심은커녕 오히려 태연한 모습들이었다. 딴은 조희가 안돼 가짜 일본 유학생에 2년제 중학교를 나온 자가 5년제 중학교를 나왔다고 덤빈 판이니까.
첫 시간은 국어였는데, 생판 보도 듣도 못한 문제라며 웅성들이었다. 나는 워낙 중학교 시절 조선어교사이셨던 권덕규 선생과, 영어선생으로 문예반을 지도하신 김광섭 선생의 교도로 종로의 박문서관을 들러 소개하신 조선문학 관계서를 사서 읽었었고, 더욱이 해방과 더불어 이른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복역 중의 함흥감옥에서 풀려나오신 학자님들이 옥고를 무릅쓰시고 열화와 같은 국학열에 호응하여 재건한 조선어학회 주관으로 수송동 숙명여자고등학교 강당에서 개최한 첫 번째 한글강습회에서 2주간 특강을 받아 그나마 귀동냥을 했었고, 또 그 강습이 끝난 뒤에 중학교 국어교사 자격시험을 치러 합격한 바도 있어서 문제를 자못 수월하게 풀었었다. 《용비어천가》과 《송강가사》, 그리고 시조 문제였고, 또 골품제와 훈민정음의 서문이어서 답안은 제법 쉽사리 썼다.
다음은 영어시간이었다. 그나마 중동학교 때 익히고 나서는 계속 덮은 실력으로 문제를 대하자니 우선 단어부터 생소했다. 해석문제는 현대문명과 민주주의에 관한 내용이었는데, 어거지로 풀다가, 뒤에 앉은 곽하신씨는 곧잘 쓰는 듯해서 단어 몇 개를 엿들어 겨우 뜯어 맞추었다. 실은 나의 수험번호가 45번인데, 앞에는 모윤숙 여사가 창간한 월간지 《문예》의 편집장인 조연현씨였고, 뒤가 《부인》 잡지를 창간한 소설가 곽씨여서 진작 안면이 있었던 사이었다.
그럭저럭 시험이 끝나 면접시험에서 양주동, 이하윤, 김진섭 선생께서 지원동기를 묻고, 학비의 감당 등을 묻고, 시험에 관한 질문이 있자 나름대로 대답을 했었다. 그런데 조연현씨는 보이지 않아 시험을 마치고 혜화동길을 곽씨와 나란히 내려오면서 앞으로 자주 연락하며 가까이 지내자고 다짐을 하고 헤어졌는데, 둘이 다 합격해서 동창이 됐다.
사실 나는 한글맞춤법 통일안을 가르쳐 주신 권덕규 선생으로 해서 진작부터 익히었고, 또 《한글》지도 월정구독했기 때문에 감격의 해방을 맞자 양주군 내 교직원들의 한글강습을 담당하다가 동대문 옆 동구여자상업학교 야간부 국어교사로 근무하면서 주간에는 해방과 더불어 재빨리 조직한 좌익계열의 중앙문화건설협의회 소속 문학가동맹에 맞서, 9월 17일 민족진영 원로들이 창립한 중앙문화협회에 나갔었다. 당시 중앙청 앞 금천교 삼거리 사무실에는 이헌구, 김광섭, 이하윤, 오종식 선생께서 상임으로 계시면서 먼저 《해방기념시집》의 창간과 《중앙순보》의 발간을 돕기 위해서 오전중에는 그 편집을 거들었었다.
그 원고를 받기 위해 정인보·홍명희·양주동·박종화 선생 댁을 두루 찾아다녔었고, 또한 종로 한청빌딩에 자리한 좌익계의 문학가동맹으로 민족진영의 시고를 베껴가지고 가서 임화林和를 비롯한 좌익계의 원고와 맞바꾸었고, 경향신문으로 가서 정지용 선생을 뵙고 원고를 보채기도 했었다. 그리고 그 원고를 인쇄에 회부해서 초교를 보기도 했고, 조선일보에 연재된 신채호 선생의 《조선상고사》도 인쇄에 붙였었다.
워낙 연포 이하윤 선생은 나의 종형과 도쿄 호세이대학 동창이시고, 또 김광섭 선생은 중동학교 때 영어선생이셨고 문예반 지도교사이셔서 각별한 사랑을 받아, 실은 9.28 이후 《대한신문》을 창간하셔서 그 입사로 해서 보도요원으로 허울좋은 국민방위군의 징집도 모면해서 53년 수복 후에 《자유문학》지를 창간하시자 종종 짬을 내어 편집과 교정을 도와 올렸었다.
남산기슭 필동 마루턱의 가파른 우리의 동악로는 비록 오르내리긴 가빴지만 대학생활은 자못 보람찼었다.
개교 당시는 학생이라야 고작 120명 정도였는데, 불교학과, 사학과와 그리고 우리 문학과(1949년부터 국문학과와 영문학과로 나뉨)뿐이었다. 강의실이라야 당시 왜절이었던 조계사의 법당을 개조한 제일강당(지금은 해체해서 옮겨지은 정각원)이 대강당이었고, 불교학과는 본부 옆의 작은방을 쓰고, 사학과는 지금의 사범대학 건물자리인 왜절 동본원사 건물에서 강의를 받았었다. 그리고 지금의 신라호텔 자리인 왜절 박문사는 우리의 기숙사로 쓰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 우리 동국대의 교수진은 정말 국내 학자의 총집결이었다. 지금이야 격세지감이 있으나, 당시는 연세대와 이화여대는 서대문 감영 앞에서부터 걸어서 큰고개(지금의 큰길 옆의 소로)를 넘어 다녀야 했다. 글쎄 이대와 연대의 기차정거장이 있었고, 고려대는 동대문에서 전차를 기다리다 못해 질축한 제기동까지 걸어 다녀야 했으니, 비나 눈이 오면 불편이 자심했다. 그런데 우리는 을지로4가에서 전차를 내려 걸어 올라오면 돼서, 실은 서울대와 숙명여대 외는 통학이 가장 편했다. 그런데 서울대는 1946년 8월 미군정청의 국립서울대학안('국대안')의 강행으로 학생들의 거교적인 반대 동맹휴학으로 개점휴교였다.
물론 우리 학교도 동정으로 일주일 간의 휴학은 있었지만 곧 정상수업으로 들어갔다. 게다가 우리 학교는 교수회의 언권이 대단했다. 더욱이 1948년 농림대와 법정대가 증설되어 교수회의 위세가 재단에 맞서자, 못내는 21교수단의 집단사퇴를 불러 사뭇 일취월장하던 동국대로서는 찬물이 끼얹어진 폭이었다. 그러나 학생의 동요는 예상보다는 희미했다. 다만 몇몇이 서울대와 연고대로 전학했을 따름이었다. 그만큼 학생회는 일심으로 굳건히 동악을 감쌌었다.
사실 우리 동국대는 교수뿐 아니라 강사의 대우도 전임교수에 버금가는 우대였다. 더구나 명교수는 2중 3중의 적을 묵인하던 당시다. 그래서 양주동 · 김기림 · 최호진 · 피천득 선생의 강의시간에는 타교의 도강생이 많아 제일강당의 좌석이 모자라 뒤에 서서 청강하는 정도였다. 다만 교재가 없던 무렵이라 교수께서 부르신 대문을 필기하는 것이 통례였으므로, 부득이 책받침을 받쳐서 노트에 받아써야 하기 때문에, 앞좌석은 우리의 전용석이었다. 특기할 바는 당시 강의과목 배정은 전공과목 외에 매 학기마다 선택과목이 많아 총점 180학점의 취득은 4학년 1학기면 거의 이수하고 졸업논문(200자 원고지 100매 내외) 준비에 몰두했었다. 학생을 위한 학교 당국의 배려가 그만큼 도타웠던 동악의 학사행정이었다.
(중략)
끝으로 나의 사연을 잠깐 옮겨 설익은 무녀리의 잠꼬대를 마무리하여 갑으로 삼고자 한다. 본시 첫발은 고가연구로 섣불리 속초續貂의 엉뚱을 노리었음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숫제 초장에 무너졌으니, 실은 무애 선생의 사랑의 솜방망이로 일찌감치 포기함이 오히려 슬기로웠다. 곧 선생께서 강의 도중에 진지한 과제로 "15세기 고전에는 'ᄒᆞ'와 'ㅏ'가 엄격히 다르듯이 'ㆍ'와 'ㅏ'의 혼동이 전혀 없으니, 혹 그를 찾아오면 후한 점수를 주겠다"고 하신 바람에 자못 열심히 뒤져서 용케 '타[乘]'를 찾아 의기양양했는데, 선생께서 근엄하게 "자넨 문법의 기초도 모르는구만. 그건 'ᄐᆞ[乘]'의 연용형일세"로 타박하신 바람에 동접同接이 하도 스스러워 쥐구멍을 찾은 나였다.
그 무렵에 공교롭게도 방종현 선생께서 《고시조정해古時調精解》와 《송강가사》의 의성본과 관서본을 발굴하셔서 문고본(正音社)을 인출하시면서, 통문관(通文館)이겸노(李謙魯) 소장본인 성주본과의 대교對校의 명을 받아 비교를 하다 보니, 스스로 송강에 기울어 졸업논문도 아예 《송강가사 연구》로 정하고, 가람 선생의 논문 《송강가사 연구》(진단학보)를 참고해서 내 딴에는 회심의 논고를 초해서 1949년 11월 지도교수 무애 선생께 바쳤더니, 일람하시고서 "아니 자네는 호랑이를 잡겠다고 벼르더니, 고작 눈이 먼 토끼 한 마릴 잡았네 그려. 변증법적인 문헌의 고증이 없는 연역적인 논고는 독단에 불과하네. 이왕 내친 김에 《송강집松江集》부터 재검토하게나"하셨다. 물론 《송강집》과 《고산유고孤山遺稿》를 뒤지긴 했어도 실은 '수박겉핥기'였으니, 당연한 정평이셨다. 속절없이 뒤통수만 긁었던 나였다.
(중략)
이러구러 우리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1회생은 온갖 우여곡절 끝에 1950년 5월 17일 어렵사리 졸업식을 올렸었다. 딴에 까운을 걸쳐 입고 동악로를 걸어 내려왔었다.
그러나 뉘 알았으랴. 간혹 38접경에서 툭탁거리긴 했어도 일요일 새벽에 느닷없는 북한의 도발로 포성이 진동하자 전쟁에 찌든 우리 세대였고 좌우의 대결이 치열하기 때문에 서둘러 신설동 집을 나서야 하는데, 억세게 쏟아지는 비로 말미암아 주춤하다가 28일에야 신설동(지금은 보문동) 집을 가족과 함께 나섰다가 한강대교가 끊어졌다는 바람에 그냥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 생사의 와중에서도 《송강가사 연구》는 꼭 지니고 다녔고 그 고비에서도 책방은 으레 들렀으니 모두가 팔자의 소관이었다.
그런데 새문안 서울고등학교 맞은편 삼거리에 있던 광명서림(光明書林·朴光泰)에 들어갔더니 4×6판의 두툼한 《정송강 연구》김사엽(金思燁)가 문득 눈에 띄었다. 거짓말 보태서 앞이 깜깜해졌다. 모처럼의 공부가 하루아침에 사라진 벼락맞음이었다. 그러나 일단 100환(지금의 천원)을 주고 사서 집에 와서 희미한 촛불을 켜고 단숨에 통독하려니 실로 충격이 대단했다. 분명 나보다 5년은 앞서 판정패를 자인해야 했다. 따라서 새삼 전공에 대한 재검토를 여러모로 시도해야 했다.
그래서 1951년 1·4 후퇴로 부산에 내려가서 《용비어천가》로 작정했는데, 그 역시 만만치 않아, 쉽게 《월인석보》를 생각하고 동국대학 피난분교로 권상로 학장을 뵙고 자초지종을 아뢰었더니 <반야심경>부터 외우고 오라시는 바람에 질겁을 했는데, 마침 재직하는 신문사에서 서울 출장을 받아 군용열차로 상경해서, 청계천변 종로 편에 즐비한 노점에서 뜻밖에도 《두시언해》중간본(인조 10년:1632)전질 25권을 눅거리로 샀다. 그야말로 횡재인데, 실은 빈집에 들어가서 들고 나온 책인데다, 가치를 몰라 덮어놓고 100환이었다. 그 때 적지않은 전공서적을 장만했음은 물론이다.
그러다가 수복해서 1954년 정월 무애 선생께 세배를 갔는데, 덕담삼아 "자네 새 학기부터 송강가사와 두시언해강독을 맡게 됐으니 알아서 준비를 하게나" 하시는 바람에 얼결에 "송강가사는 공부를 했지만 두시는 공부를 안 해서 못하겠습니다"고 했다가 사뭇 역정을 내시면서 "그럼 자네 다시는 우리 집에 드나들지 말게" 하시면서 돌아앉으시는 바람에 '울며 겨자 먹기'로 당장 두시공부를 위해 새벽 4시 30분 통행금지 해제 사이렌이 나기가 바쁘게 신설동 집에서 돈암동 권상로 선생 댁에 가서 오붓한 독강獨講을 들어 제법 아는 체하며 구관조인 양 되받아서 강의를 했으니, 못내는 발로 공부하면서 두시의 한 우물을 파다가 곁들여 낙수落穗 삼아 한국 한시를 엿보게 된 나다.
분명 동국대학교는 동국의 대학이다. 삼가 두루미의 목청을 빌고 기린의 목을 빌어 새삼 웅비를 바라면서 《용비어천가》 제 2장과 인도 타고르의 <동양의 등불>을 외우며, 《시경》의 "아! 크고 많은 선비여 이 왕국에 태어났구나(思皇多士此王國)"를 덧붙이며 간곡히 합장한다.
(1996. 9.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