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국문문예창작학부
Dongguk University
동대 국문학과 시절을 돌아보며 / 정익섭(50졸)
동대 국문학과 시절을 돌아보며
정익섭(50졸, 전 전남대 교수, 작고)
과거를 회상한다는 것은 반드시 아름다운 일일 수만은 없을 것 같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학창시절의 과거는 아름다운 추억으로 기억되는 수가 많다. 챨스 램도 그의 시 <낯익은 얼굴들>에서 학창시절의 말동무, 술친구, 연인들을 회상하면서 한없는 추억에 젖은 것을 읽지만, 내 경우도 동국대학교 문학부 재학시절의 이모저모는 잊을 수 없는 하나의 추억으로 남아 있다.
올해도 머지않아 동악 기슭엔 옛날처럼 개나리, 진달래, 벚꽃들이 만발하겠지만, 황건문 돌층계를 오르내리는 길가에 철따라 피고 지는 그 어여쁘던 꽃들이 왜 그렇게도 나를 매료했던지, 벚꽃 휘날리는 신록의 그늘에서 시와 낭만을 즐기던 옛날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점심 때 혹은 방과 후면 곧잘 명상하며 거닐던 학교 뒷산의 하얀 오솔길도 좋았고 자작나무 숲사이로 곱게 깔린 풀밭에 누워, 멀게 가까이 들려오는 꾀꼬리 소리를 벗하며 우연한 공상에 잠기는 멋도 참 좋았다.
나는 이런 좋은 자연환경에 묻힌 모교에서 대학생활을 보냈다. 그러나 그 때는 지금처럼 아담한 현대식 교사도 없었고, 제대로 시설을 갖춘 강의실 하나 없었다. 그야말로 낡은 교실에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떨어져 나간 창문으로 비바람이 들이쳤고, 겨울엔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강의실, 길다란 널판대기 책상과 각목으로 아무렇게나 짜낸 긴 의자에 4~5명의 학생들이 앉아, 떨면서 강의를 받곤 했다. 지금과 비교하면 참으로 격세의 감이 없지 않다. 그러나 나는 그 때의 내 대학생활을 후회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것은 비록 대학 캠퍼스는 좁고 초라한 절간이었지만, 다행히도 우수한 교수진과 학구열에 열성인 젊은이들이 웅성댔기 때문에, 나는 이런 분위기에 자극받아 마음껏 면학하고 사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동악의 차분한 환경은 나로 하여금 쉽게 이런 분위기에 젖을 수 있게 했다.
당시 동국대의 교수진은 고전 부문에 양주동·이병기·조윤제·이은상·박종화·정학모·이명선 등이 현대문학 부문에 김진섭·이하윤·손우성·정지용·김기림 등이 있었고, 한문학 부문에 권상로·변영만·정인보 등이, 국어·언어학 부문에 양주동·김영수·서영호·방종현·이희승·이승녕·유웅호 등이 강단을 맡았다. 이 중엔 벌써 타계한 분이나 6·25 때 납북돼 간 분들도 적지 않지만, 모두 당시 잘 알려진 고명한 석학들이었고 쟁쟁한 일류 교수들이었다. 동대 문학부 강단을 이들이 전담했다는 것은 당시로선 다시없는 자랑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땐 대학이라야 정규 대학으로선 서울대를 비롯해서 연·고대와 동대·숙대와 이대 등 몇 개에 불과했지만, 이 때 동대의 교수진은 이들 대학이 부러워할 정도여서 수강을 자청해 오는 청강생들이 있는가 하면, 전학을 희망해 오는 학생들까지도 있었다.
양주동 교수의 강의는 예나 지금이나 명강의였지만 그의 유머러스하고 기지에 찬 하해 같은 달변과 해박한 지식, 풍부한 내용의 강의는 늘 인기 집중이었고, 방종현·김진섭 양 교수의 고매하고 풍만한 인간미와 그 성실하고 충실했던 강의는 늘 감명을 주었다. 지성미 넘치는 김기림 교수의 시론, 깊이 있던 허영호 교수의 조선어기원론, 도사형(기실 선禪의 대가) 김영수 교수의 국어특강도 퍽 인상적이었다. 변영만·이병기 양 교수의 풍자와 익살, 그리고 때때로 튀어나오는 욕설은 항상 수강생들의 폭소를 자아냈고 해박한 한학과 고금을 꿰뚫은 정통한 지식으로 고담조의 구수한 강의를 하던 권상로 교수의 인상도 잊을 수 없다. 정학모·손우성 양 교수의 폐의파립의 허술한 차림새, 그러나 구애받지 않던 그 초연한 인간성이 좋았고, 정인보 교수의 훤칠한 키, 고무신에 말쑥한 한복차림도 기억에 새롭다.
나는 이들 교수 밑에서 부지런히 청강을 했고 빠짐없이 노우트 정리를 했다. 대학시절 나는 좀처럼 결석을 하지 않았다. 힘써 등교했고 착실히 수강을 했다. 전공과목만이 아니고 선택과목도 열심히 들었다.
이런 탓인가 시험 때면 으레 나의 노트는 불티가 나게 팔려(?) 나갔다. 나는 교수 한 분 한 분에게서 전수한 학문과 지식도 큰 것이었지만, 그분들의 인간성에서 받은 영향도 컸다. 그분들의 말 한마디, 표정 하나하나가 내겐 좋든 궂든 많은 작용을 했고 내 인격형성에 여러 가지로 도움이 된 것을 알고 있다. 이것은 대학 교단에 선 지금에 와서도 좋은 거울이 되고 있다. 한편 하·동계 방학 땐 계몽·봉사활동에 열성적인 때도 있었고 명산대천을 찾아 여행을 즐긴 일도 있었다.
이제 대학을 나온 지 어언 24개 성상이 되었다. 천행으로 6·25동란 직전에 졸업을 하고 바로 고교교사로 3년여를 일하다가 현재의 대학으로 옮겨 20년을 한결같이 봉직하고 있다. 그러니까 졸업 후 줄곧 교직에만 머물러 있는 셈이다. 요즈음도 종종 느끼는 일이지만 대학 생활은 역시 충실하게 보내야 하겠다는 것이다. 대학 생활이 부실할 때, 그것은 자신에게만의 불행이 아니고 그를 길러준 모교에도 누가 되고 나아가 가정·사회에도 손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자화자찬이 될는지는 몰라도 내가 오늘날까지 그래도 모교의 명예를 더럽히지 않고 구차하나마 이만큼한 자리에 설 수 있게 된 것도 과거 내가 어느 정도 대학 생활에 성실을 기한 결과였다고 자위할 때,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른다.
그 때 고락을 같이 하며 공부했던 많은 동학들 중엔 대학 강단에 선 동문들도 적지 않다. 이병주(동대)·이동림(동대)·박항식(원광대)·김태균(경기대)·현평효(제주대)·홍순탁(전남대)·김기동(동대)·김성배(동대) 등은 이미 학계의 정평을 받고 각 연구 분야에 정진하고 있다. 그 뒤에도 많은 후배들이 경향 각 대학 강단에 진출하여 후진 양성에 쓰고 있는 것을 볼 때, 사계斯界는 물론 모교를 위해서도 경하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70년에 가까운 역사를 가진 동대는 원래 불교정신을 건학이념으로 한 대학으로 한국 불교학의 본산이며 국학의 요람이기도 하다. 또한 한국문학의 전통을 계승할 대학으로서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허다한 시인 작가들이 배출되었다. 그 중 몇 사람을 들어 보면 시에 있어서 한용운·김달진·신석정·이원섭·서정주·조지훈·장호·고원·황명·이형기 등과 소설에 있어서 곽하신·이범선·서근배·이병구·서숭해·유우회, 평론의 조연현·정태용·이철범·장문평·조병무·홍기삼·김시태, 극문학의 최금동·유현목·김승규·오학영 등은 과거, 또는 현재의 한국문학을 위해서 크게 이바지했고 앞으로도 크게 활약, 공헌할 한국문단의 중요 멤버들이다.
동국대의 국문학은 이렇게 한국문학의 전통을 이어왔고 한국문학의 중심 역할을 했다. 여러분은 이런 찬란한 전통을 지닌 동국대 국문학과에 재학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 과거에 비하면 오늘의 동대는 다소 위축된 감이 없지 않으나, 동악에 임립한 현대식 교사와 완비된 시설과 강의실, 훌륭한 교수진, 아름다운 자연환경 등은 과거 우리 때의 대학 시절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월등한 것이니, 여러분만 각성 분발한다면 얼마든지 향상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재삼 자각하여 각자 소임에 최선을 다해주길 바란다. 빛나는 동국대 국문학의 전통을 여러분은 과연 계승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 선배들은 예의주시할 것이다.
(《동국교양》 제3호, 197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