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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발했던 교수와의 대화 / 최재구(52졸)

등록일 2026-10-05 작성자 학과 관리자 조회 51

활발했던 교수와의 대화

최재구(52졸, 산업은행 이사장)

 

1.

회상은 아름답다고들 한다. 특히 젊은 날의 대학시절은 누구에게나 자랑스러운 회상의 장이라고 한다. 그러나, 젊은날처럼 이상과 현실의 불일치에 대하여 내적으로 괴로워하는 시절도 없다. 그것은 어느 시대 어느 나라의 젊은 세대에 있어서나 똑같이 느껴야 하는 젊음의 속성인 것 같기도 하다. 이상이 원대하면 할수록 그 괴로움은 크고, 자기와의 외로운 고투가 훨씬 심각하리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상의 정상에 한 발자국이라도 가깝게 접근하려 하면 남모르는 자기 희생이 얼룩져야 하는 까닭이다. 그러나 그러한 젊은날의 대학시절을 회상하는 것은 즐겁다. 자랑스럽기까지 한 것이 사실이다.

사람들은 나이가 들수록 과거에 집착하는 속성이 있다. 과거를 미화하거나 과장하기 쉽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의 대학시절만은 그러한 자기 미화나 과장이 오히려 군더더기가 된다. '우리' 곧 나와 같은 또래의 동국대 동문들은 가장 긍지와 자부감에 충만한 대학시절을 영위했기 때문이다.

 

2.

나는 다음 두 가지 이유로 동대인이 되었다. 그 하나는 순전히 가정적인 인연이 된다. 유가의 전통을 고수해 오던 부친이 항일운동 과정에서 통도사로 피신을 하신 것이 계기가 되어, 유교적 가풍은 불교적인 것으로 바뀌었다. 불교의 심오한 사상에 접한 부친은 삭발을 하고 출가하신 것이다. 불교의 호국사상은 항일 민족운동 사상과도 일치되는 것이었다. 나의 동국대 지망동기는 이러한 불교적인 인연 이외에도 또 다른 하나가 있다. 그것은 동국대의 오랜 문학적 전통에 대한 어릴 적부터의 동경과 관심이었다.

영국의 옥스퍼드, 일본의 와세다早稻田대학이 각기 그 나라의 대학문학을 대표하는 대학들이라 한다면, 동국대는 바로 한국문학의 주축을 이룬 대학으로 자타가 공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인이 되겠다는 꿈을 키우고 있던 시절이었으므로, 동국대를 선택한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7대 1이라는 경쟁률을 뚫고 동국대 전문부 문학과에 신입생이 되었을 때, 나는 가장 연소한 막내동이였다. 일제 말기의 대학 폐쇄로 인하여 진학의 기회를 얻을 수 없었던 불우한 지각생들이 활짝 열린 민족교육의 요람에 모여들었기 때문에 정상적인 진학자와는 연령차가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당시 모교 동국대의 시설은 다른 대학들이 그러했듯이 자랑할 만한 것이 없었다. 그러나 국내 삼대 사립대학으로 꼽히고 그 가운데서도 누구에게나 선망의 대학으로 군림했었던 것이다.

그 이유는 대학의 내실에 있었던 것이다. 당시 내가 다니던 국어국문학과 교수진만을 꼽는다면 무애 양주동·위당 정인보·월탄 박종화·가람 이병기·청천 김진섭 교수를 비롯해서, 시인이며 평론가인 김기림·정지용 교수 등등 모두가 국내 제1인자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모든 강의실은 언제나 입추의 여지없이 만원이었다. 어느 강의실에 들어갈까 망설여야 할 만큼, 모두를 듣고 싶은 명교수의 명강이 유혹을 하던 것이다.

이 무렵 동국의 캠퍼스에서는 '도강'이라는 말을 흔히 들을 수 있었다. 그것은 동국대 교정의 즐거운 두통거리이기도 했다. 서울대를 비롯한 연·고대의 도강생들은 떼를 지어 강의실에 모여들었고, 학기 초만 되면 이들은 무더기로 편입해 오기도 했다. 국문학과 클래스 위원장과 학생회 대의원으로 줄곧 활동해 왔던 나는 이들 도강생과 편입생들의 협조 요청에 바쁜 일과를 보내야만 했다.

그 때는 교수의 수효가 전체 학생에 비해 적었다. 그러나 교수님들은 학생의 요청이 있을 때는 물론, 자진해서까지 학생들에게 대화를 요청하는 분이 있었고, 언제나 학생 개개인에게 깊은 관심과 사제애師弟愛를 표시하는 분도 계셨다. 그러나 교수님들은 모두가 바쁜 일정에 쫓기는 실정이었지만 학생들의 적극적인 접근으로 지적 대화의 기회를 마련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사실 교수와의 자유로운 대화가 동대 캠퍼스만큼 활발했던 곳은 없었던 것 같다. 그것은 동국대가 지닌 또 하나의 자랑이기도 했다. 요즈음은 어떤지 모르지만, 우리의 대학시절에는 교수와의 대화가 개인적인 교수 방문만으로 이루어지진 않았다. 강의시간은 처음부터 끝까지 교수와 학생 간의 공식적이고도 떳떳한 지적 대화의 마당으로 통했기 때문이다. 교수와의 진지한 대화가 이루어지기까지는 학생 자신이 문제였던 것 같다. 어리석은 질문으로 교수를 괴롭히고 시간을 낭비하는 일은 교수나 학생들이 배격하는 불문율의 약속이었다. 지금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교수와의 지적 대화가 활발했던 것은 학생들이 그만큼 학구에 몰두했었다는 증거라는 사실이다. 바로 그러한 교수와 제자들이 학문을 탐구하던 곳이 곧 우리의 모교였음은 내가 무엇보다도 크게 치는 자랑의 하나이다.

 

3.

우리의 대학시절은 한국의 대학문단사에 유례없는 업적을 기록하기 시작한 때이기도 하다. 연간 《동국시집》을 창간하여 시지試誌 하나 없던 문단의 주목과 관심을 집중시킨 것도 이 무렵이고, YMCA 강당에서 대학가 초유의 시낭독회를 연 것도 이 때다. 《동국》지 창간호의 한구석에 <지우知牛>라는 필명으로 나의 시가 발표된 것도 이 때다.

동국대의 문학적 또는 학구적인 저력은 도처에서 열정적으로 치솟고 있었던 것이다. 학생 연극, 영화 활동도 활발했다. 유현목(현 영화감독) 군 등이 학생 영화작품으로 <해풍海風>을 제작, 우리나라 대학생 영화의 효시를 이룬 정도였다. 《동국시집》의 창간 등 일련의 문학활동과 영화 등 학생 연예 활동은 당시 경제적 형편으로는 감히 엄두도 못낼 일들이었다. 그러한 작업과 활동을 해낼 수 있었던 것은 당시의 동국인들이 자기 전공, 또는 이상과 현실의 일치를 위하여 얼마나 진력했는가 증명하는 본보기이다.

지금도 이러한 문예활동은 동국대의 전통적인 특색이기도 하다. 현재 우리나라 문단의 3분의 1을 점하는 시인과 소설가, 평론가가 동국대 출신이라는 사실은 이러한 동국문단의 역사적 특징을 입증하는 것이 된다. 이러한 문예활동을 내적인 것이라 한다면, 학생들의 외적인 활동인 스포츠와 대외경쟁 실적을 빼놓을 수 없다. 우리 모교의 각 운동부는 그 종목을 가릴 것 없이 언제나 정상그룹의 영광을 차지했었다. 동대팀의 출전은 곧 승리를 의미했다. 때문에 동대팀의 출전 여부에 타 대학팀은 신경을 써야 했다.

또한 졸업생의 사회 진출에 있어서도 우리 동문들은 언제나 사학 제일의 명문으로서의 관록과 실력을 과시했었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시행된 신문기자 모집시험에서 우리 동문들이 과반수 이상을 언제나 점한 것도 그 무렵의 공식적인 기록이다. 이렇게 보면 우리의 대학시절은 안과 밖으로 가장 명예로운 동국의 전통을 굳혀 놓은 시대라고 해서 결코 과장이 아닐 것이다.

(《동대교양》 제3호, 197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