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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그 시절 잊을 수 없는 몇 가지 사연 / 최재복(57졸)

등록일 2026-10-05 작성자 학과 관리자 조회 52

그 때 그 시절 잊을 수 없는 몇 가지 사연

최재복(57졸, 조선문학 발행인)

 

우리들의 연표 1951년 51학번, 그 때 이 나라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이었다. 한국전쟁! 이른바 6·25는 우리에게 있어 과연 어떤 역사적 의미부여를 했었던가. 그것은 곧 죽음과 직결되는 공포요 불안이었으며, 처절한 아픔인 동시에 회의였고, 살아남기 위한 안간힘만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렇듯 치열했던 전란의 와중에서도 갓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되는 우리에겐 그래도 한가닥 부푼 꿈이 있었다. 대학에 진학해야 한다는 열망, 그것이었다. 이런 꿈마저 없었다면 우리는 어쨌으랴. 캄캄한 어둠 속에서 한가닥 빛을 쫓는 나의 꿈은 문학공부를 해야겠다는 결심이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동국대학에 진학해야만 한다는 것이 유일한 선택이었다.

당시만 해도 동국대학과 문학은 불가분의 관계였고, 하나의 방정식 같은 코스로 지정되어 있었다. 어떤 일류 명문대학보다도 동국대학 문과대학을 문학지망생들이 선택하는 까닭은 무엇보다도 문학의 뿌리가 깊이 내려져 있는 공고한 학맥과 전통, 그리고 기라성같이 꽉 짜여진 교수진의 면모가 타대학의 추종을 불허하는 아성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잠깐 기억나는 대로 당시 교수진의 면모를 살펴보면, 현대문학 분야에 월탄 박종화, 횡보 염상섭, 미당 서정주, 평론의 백철과 시조의 가람 이병기, 국문학 고전분야에 무애 양주동·이숭녕·방종현·김형규·양염규·이탁 교수, 역사학에 권상로·조좌호·황의돈·중국문학에 차상원, 경제학에 신태환, 교육심리학에는 임석재, 동양철학에 김용배 교수 등 한국문단의 거장들과 학계의 대표적인 석학들이 포진하고 있었으니, 어찌 선망의 표적이 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경남의 진주고등학교를 졸업한 촌놈인 나는 서슴없이 동국대학 문리과대학 국어국문학과에 원서를 냈다.

피난 캠퍼스인 부산 창선동에 있는 대각사에 자리잡은 임시교사에서였다. 결과는 합격, 학문이나 문학이라는 것이 그냥 되는 것이 아니요 떡이나 밤을 공으로 먹을 수 있게 해주는 것도 아닌데 기뻤다. 조건없이 기뻤다. 합격이 기뻤고 문학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 기뻤다. 치열했던 전쟁의 뒤란에서 배움의 길을 열게 되었다 함은 선택받은 행운이었으며 특별하게 주어지는 기회였었다.

새로운 도전, 나는 대학생이 되었다. 때가 전시라 교사라고도 할 수 없는 절간의 일부를 얻어 든 엉성한 칸막이 강의실, 간신히 바람막이만 한 거친 공간이었다. 그러나 난장한 강의실에는 뜨거운 배움의 열기만 충만해 있을 뿐이었다. 새학년 새학기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대학의 분위기가 언제나 그러하듯 수강신청이 마감됐으나 본격적인 강의는 시작되질 않고 맨숭맨숭 친구들과 어울려 얼굴 익히기가 우선은 주된 일과였다.

쌀쌀한 늦은 봄날씨에 좁은 교정에 어울려 서 있으려 치면 일정한 시간에 뒷짐을 지고 스보간처럼 교정을 서성거리는 노인 한 분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얼핏 보아 육십은 넘었을 듯한 초췌한 노구에 걸친 옷은 남루였다. 주름져 여윈 얼굴에는 땟자국마저 묻어나고 짙은 돋보기 안경 너머 눈자위에는 눈곱이 끼어있는 초라한 모습인데 가장 인상적인 것은 가늘게 다듬은 팔자형 염소수염이었다. 짐작컨대 피난 내려와 오갈 데 없어 대각사에 더부살이하는 불목하니쯤으로 생각되어, 마음속으로 동정을 금치 못했다. 그런데 이 분의 정체가 그로부터 얼마 후 뜻밖의 장소에서 명백하게 드러나고마는 것이 아닌가.

그 날은 입학 후 처음으로 국사개론 강의가 있는 날이었다. 역사에 대한 학생들의 관심이 각별해서인지 좁은 강의실이 꽉 차고 뒤로는 입석한 수강생이 울타리를 쳤다. 이윽고 강의실 문이 열리면서 작은 체구의 교수 한 분이 천천히 교단 위에 올라서는 것이 희미하게 보였다. 갑자기 강의실 안이 조용해졌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노릇인가. 그 순간 내 입에서 이런 말이 터져 나왔다.

"아니 이럴 수가, 저 노인네가?"

내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그 노인네였다. 남루의 불목하니. 놀란 마음을 가누지 못하고 의아해 앉아 있는데, 카랑한 목소리가 강의실 안의 고요를 깼다.

"학생 제군! 나 황의돈이외다."

애숭이 촌놈이 황의돈이 어떤 분인지 알 까닭이 있겠는가... 불목하니 저 늙은이가 과연 어떤 식의 강의를 할 것인가 하는 호기심으로 두 귀가 곤두서고 이 학교에 잘못 들어온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생기는데 그 분이 말을 이었다.

"학생 여러분! 여러분은 역사의 정의를 어떤 식으로 내리며 공부해 왔지요?"

선문답이라도 하듯 화두 일제 던져 놓고 불목하니 노인은 연신 손수건으로 눈곱을 지우다가

"여러분은 선죽교에서 피 흘리고 돌아가신 포은 정몽주 선생의 죄와 죽음의 역사과정을 어떻게 해석하고 배웠지요?"

누구 하나 입을 여는 학생이 없었다.

"벙어리들만 모인 자리가 아닐 텐데···"

하고 뜸을 들이자, 누군가 일어서며 큰 소리로 말했다.

"멸망한 고려 왕조와 왕을 위해 흘린 거룩한 피라고 생각합니다."

"거룩한 피라...... 과연 그럴까요?"

학생들 얼굴에는 무슨 말이지 하는 의문이 깔렸다.

"무슨 뜻인지 이해가 안 되는 모양인데, 이 점이 바로 학생 여러분과 내가 보는 역사는 관점의 차이인 것이야!"

학생들 얼굴에는 더욱 짙은 의문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무슨 말인고 하니, 패망한 고려왕조와 한 사람의 군주를 위해서 스스로의 목숨을 버릴 것이 아니라, 살아 남아있는 더 많은 사람들, 억울하게 살육당하고 오갈 데 없어 방황하는 민초들을 위해서 선죽교에 피를 뿌릴 수 있었다면, 그 희생이 더욱 거룩했을 것이라는 것이 오늘의 시점에서 봐야 하는 역사 관점인 것이야!"

상상도 못했던, 비약이던 역사풀이였다.

"아니 저 불목하니 초라한 늙은이의 머리 어디에 저런 식견이 들어있단 말인가?"

하는 의문으로 나는 쇠망치로 크게 한 방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리고는 학문의 진리가 바로 이런 곳에 숨어 있었구나 하는 대오각성, 나는 비로소 학문의 실체가 사람의 용모나 허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견식 그 지혜의 주머니 속에 차 있음을 깨우친 것이다.

뿐만이 아니다. 그 후에도 선생께서는 우리나라의 총면적에서부터 산림이 차지하는 면적과 농토의 경작면적, 해안의 길이와 깊이, 남해안과 서해안의 간만의 차, 그리고는 농토에서 생산되는 주곡의 수확량에 이르기까지 정확한 숫자를 암기로 설명해 나갔다. 그리고는 우리나라는 절대농지가 부족하기 때문에 앞으로 닥쳐올 인구팽창에 대비해서 서해안과 남해안 일대에 대대적인 간척사업을 벌여야 잘 살 수 있게 된다고 예언까지 해댔다. 우리에겐 전혀 이해가 안 되는 역설이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45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러 우리의 현실을 직시하게되면, 황의돈 선생께서는 그 때에 이미 서산과 김포만 일대의 초대형 간척사업과, 지금 대형 사회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문제의 시화지역 간척사업 같은 것을 예견했던 것으로 믿어진다. 이 때에 받은 깊은 감명을 잊지 못하고 오늘까지 내 가슴속 깊이 간직하며 살아가고 있다. 또한 이 분이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판사인 황윤석 여사의 아버님이시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훨씬 후의 일이다.

이 밖에도 명교수 명강의와 과활동에 얽힌 뒤얘기는 많다. 제한된 매수라 다 적을 수 없지만, 재학 중 매우 인상 깊었던 한 대목만을 적어 이 글을 마감할까 한다. 서울로 환도한 필동 동국대학 캠퍼스에는 각양각색의 재학생들이 몰려 활기가 넘쳤었다. 그런데 그 많은 학생들 중에 특히 시선을 모으게 하는 몇몇 학생이 있었다.

그 첫째는 불교재단이 경영하는 대학에 수녀복을 단정하게 입은 몇 사람의 수녀학생이 등교해 이채로웠다는 사실이고 두 번째는 우리 국문학과 강의실에 늘 해군군복을 입은 자그마한 키에 군인답지 않게 얌전한 학생 한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가끔씩 해군의 세라복도 마다 않고 입고 나오는 그는 한눈 파는 일이 없었고 무던히도 앳되게 보여서 나보다는 아래 학년이려니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나보다 한 학년 위였다. 그는 현대문학 쪽이 아니어서 자주 어울릴 기회는 적었으나, 누구보다도 열성적이던 그의 면학태도가 그의 장래를 미리 점치게 해 줬었다. 해군복장을 하고 강의실에 열심히 노트정리에 몰입하던 사람, 그가 바로 모교 강단에서 후학들을 위해 국어학강의를 해온 김영배 박사다!

그런데 그렇듯 앳되게 뵈던 그 사람도 어느새 금년으로 정년이 되어 교단을 물러나게 되는 처지라니 새삼 세월의 무상함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아무리 세월이 흘러 시대가 바뀐다 할지라도 뿌리 깊은 모교의 학맥과 전통, 그리고 우리들과의 학연은 영원토록 무구 청정할 것이다.

동국이여! 영원히 빛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