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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동시화 / 이병기(56졸)

등록일 2026-10-05 작성자 학과 관리자 조회 52

나의 동시화(詩話)

이병기(56졸, 전북대 교수)

 

과거사를 오늘에 되살린다는 교훈을 따르기로 한다. 1학년에 들어가서는 모교가 피난시대를 겪는다. 부산의 대청동에 있는 법당 밑의 지하실에서 강의를 받았다. 시간표를 보니 미리 알려진 석학들의 이름이 눈에 띄었다. 1학년이면 문화사나 심리학에서 겨우 선택으로 수강할 수 있는 저명한 이름에 마음이 끌리고 말았다. 얼마 있다가 문교부 장관을 지낸 김법린金法麟 교수의 교육학을 수강한 기억이 난다. 불교문화사의 김잉석 교수와 시창작법의 조지훈趙芝薰 교수 등의 강좌가 있었다. 본격적으로 우리의 양식을 채워주었던 학생활동은 수복한 뒤의 필동 가교사에서였다. 무애 양주 교수와 시작지도의 서정주 교수, 문화사의 백성욱 총장 강의와, 김동화·조명기 교수의 강의가 지금도 머리 속을 떠나지 않는다.

무애선생의 진가는 <고전연구> 시간에서 맛보았다. 지금은 미국으로 간 황갑주 시인이 '고문법을 이렇게 몇 시간만 배우면 중·고등학교 교사로서는 인기 높기 마련이겠소' 했던 말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고가연구》 책이 두꺼워서 꽤나 비싸기도 하였는데, 무애께서는 직접 강의실에 가져와서 나누어 팔기도 하셨다. 큰 학자에게도 저런 생활력이 있는 것이구나 했던 생각이 지금도 새롭기만 하다. 그리고 그때 심악心岳 이숭녕 교수가 국어학개론을 강의하면서 여옥麗玉보다는 여용麗容의 이름이 더 좋았다는 <공후인>의 연기설화를 설명하였다. 딸이 있으면 이아리라고 이름을 짓겠다고 하시며, 우랄 알타이어 계통의 특징을 지루하지 않게 설명하셔 재미가 있었다. 흥미위주로 지도하는 교수방법에서는 무애시간이 즐거웠고 진지한 학구적 태도를 함양했음에는 심악선생에게서 본받을 수 있었다.

그때의 선·후배 동기로는 시작詩作쪽에서 미당未堂의 선도적 처세관이 우리의 정신을 무리없이 이끌어주었다. 이종출李種出·황복동黃福東·신기선申基宣·강훈구姜勳求 등의 시인들은 《동국시집》의 재건에 눈부신 활동이 있었다. 미당께서는 <신라인의 정서>라는 과목에서 전후의 혼돈적 정신의 황무지를 그리스 신화와 신라인의 정서로 접목하신 데서 새로운 언어적 마술사 역할을 해 주셨다. 정신적으로 구심점을 찾아 헤매던 몸부림이 아들 이름도 윤潤이라고 짓고, 신앙적으로 허망하지 않기를 갈구하던 선배교수로서 크게 힘을 주었던 것이다.

수복 후 3학년 때는 석전石田 이병주李丙疇 교수의 송강가사 강의를 들었다. 문제를 설명하는 강의용어의 구사에까지 새롭고 감칠맛있게 하는 수사학적 노련함에 감동 받은 바 크다. 향가의 국어학적 설명은 양염규梁濂奎 교수가 늦게야 모교 강단에 발을 들여놓아서 그런지, 어찌나 겸손하고 진지한 인품으로 대해 주었는지 모른다.

무애선생의 고가연구에 대한 명강은 동국대학에 들어온 긍지를 더욱 북돋아 주었다. 그때 마침 T.S. Eliot에 대한 세미나가 있을 때에 외인강사를 리드하면서 어찌나 영어를 유창하게 잘 하시던지, 우리도 저런 때가 있을까 하고 마음을 다지기도 하였다. 심악선생께서는 학문을 하려면 지금도 늦지 않으니까 영어 공부를 하루에 한 시간씩만 꾸준하게 하면 틀림없이 성공할 날이 있을 것이라고 부추겨 주었던 일이 어찌나 아픈 채찍이었는지 모른다.

그 무렵에 학문에 심취하였던 선·후배로는 늦게서야 학교를 들어온 최세화崔世和 교수의 종형宗兄 같은 품위를 배웠고, 김영배·장한기·김동준·최범훈 등이 선배교수인 이동림·최학선 교수와의 유대에서 열심히 공부했던 것으로 안다. 석전께서는 모교 선후배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면서 <동악어문학회>를 이끌면서, 터줏대감 역할을 굳건히 해 주셨다. 오늘의 모교에 크게 학문을 진작하는 후배들이 쟁쟁하게 진을 치고 모여들어 마음 든든하다. 개체적으로는 내가 외경하는 이종찬·임기중·김갑기 등에게 항시 부끄럽기만 하다. 그때 그 무렵에 무애께서 강의 도중에 '자네들은 알고 있는가. 우리 학계에 세 사람의 대가가 있으니 나와 도남陶南과 가람일세.'라고 하시던 이야기를 들었었고 또 촉망되는 제자로는 고대에 있는 김종길金宗吉이라고 말씀하셨다. 마침 이상보 교수가 논문 지도를 받겠다고 무애께 강의시간에 우리 교실 옆에 와서 도장을 받고 가던 일이 기억난다. 지금 모교에 있는 김영배 교수나 김동준 교수도 열심히 공부하며 알고 지내던 처지였다. 나는 부득이 대학을 졸업하고 가간사家間事에 얽매여 오늘날까지 시골뜨기의 학문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무애께서 한 말을 써먹은 일이 있다. 내가 한문학하는 사람 가운데 알아줄 만한 사람은 많은 사람 가운데서 연민淵民 이가원李家源이 있다는 자랑이었다.

세월이 흘러서 내 자신도 많은 변신을 거듭하였다. 학부 때는 현대문학에 심취하였고 석사 때는 고전문학에 정진하였으며, 대학의 전임이 된 뒤로는 한문학에 심취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문학을 공부하다가 연민을 사숙하게 되면서 지금부터 15년 전에 처음으로 연민에게 화답시를 보낼 때 나는 무애선생의 말씀을 첫 연에서 들먹이고 말았다. 무애석일강론중無涯昔日講論中 / 칭송연민탄박홍稱頌淵民歎博鴻 (무애선생 옛날에 강론하시더니 / 연민 칭찬해 기러기라 하더이다.) 이에 연민께서 화답해 주셨다. 무애금이도산중無涯今已道山中 / 전면동서비설홍轉眄東西悲雪鴻 (무애는 지금 이미 산중에 갔고 / 동서로 눈 돌려 눈기러기 슬프다.) 무애께서는 그때의 어느 날엔가 국보로 지정된 《월인석보月印釋譜》 초간본을 6·25사변 때 잃을 뻔하였단다. 사모님께서 천안에서 그냥 피난하고 내려왔다. 국보를 잃고 말 것인가 근심하니, 사모님께서 나서서 광주리를 이고 다시 서울 집으로 올라가 천정에 숨겨두었던 《월인석보》 초간본을 찾아와서 국보에 손상이 없으니, 이때에 아내에 대한 시가 없을 수 있겠는가 하고 자랑하셨다. 그때 말소리만 쟁쟁하지 시 구절은 들었던 것으로 그치고 말았는데, 연민의 《옥류산장시화玉溜山莊詩話》에 실려 있음을 보았다. 위오일념유광휘爲吾一念有光輝 / 약수부지전적귀弱手扶持典籍歸 / 구질중마여몽리舊帙重摩如夢裏 / 수행열루쇄우의數行熱涙濺牛衣 (나를 위한 마음 밝은 빛이 있어서, 약한 손에 입어 귀한 책들이 돌아왔네. 낡은 책이 더욱 닳아 꿈속처럼 되었지만, 뜨거운 눈물 뚝뚝 흘러 쇠 덕석이를 적시네.) 이 시는 무애께서 <억천안증내시억憶天安贈內詩檍>이라 제목을 붙인 것이다. 옛날 천안에서 아내에게 주신 시이다. 무애의 큰 학문 뒤에는 사모님의 내조의 공이 크다. 연민과의 친교의 낙수落穗가 오늘의 나에게는 나의 동시화 첫 장 첫 편을 꾸밀 수 있게 될 줄이야 생각지도 못한 일이다. 무애께서 연민을 보고 기러기라고 했다는 나의 말에, 연민은 무애의 큰 업적에다 눈길에 큰 발자국을 남긴 사람은 무애밖에 없다는 연민의 칭찬이다. 서로 칭찬이 얽혀서 하나의 가화佳話가 되었음을 밝혀 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