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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지망생의 열정 / 송혁(59졸)

등록일 2026-10-05 작성자 학과 관리자 조회 58

문학 지망생의 열정

송혁(59졸, 전 모교 교수·작고)

 

1. 이것이냐 저것이냐

문학을 떠나서 나의 문학시절을 회상할 수가 없다. 동국대 지망의 중요한 계기도 문학에 대한 염원 때문이었고 문학생활 4년도 모두가 문학과 관계된 것들 속에서 성장의 환희와 좌절의 비애를 맛보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국대 국문학과생이 되기까지는 남모르는 시련과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분기점에서 내 나름의 방황을 한 적도 있다. 아마도 대학진학을 앞둔 제복의 시절에는 누구나가 한번쯤 경험함직한 그런 심경이었는지도 모른다.

문학서적의 난독亂讀, 시작詩作의 기쁨과 내 나름의 자부심은 시인이 되어야 한다는 숙명감 같은 것을 어린 시절부터 느껴왔지만, 막상 대학입시 준비기에 들면서 하나의 이변이 생겼다. 그것은 노신魯)의 《아Q정전》 등 일련의 문학작품에서 받은 충격 때문에 일어난 심적 변화였다. 노신의 문학에 깊숙이 접근하기 위해서는 중국문학과에 가야하고 우선 중국어를 공부해야 한다는 식의 은밀한 다짐이 이루어졌다.

《중국어 사주간四週間》이라는 일서一書와 밤새워 씨름을 했다. 때로는 중국집에 들러 중국인들의 사투리 투성이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기도 했다. 입학원서를 우편으로 구입할 때까지만 해도 '염소'라는 별명으로 통하던 담임선생은 나의 이러한 심적 변화를 모르고 있었다.

"중국문학과에 간다구? 동대 국문학과에 가야 할 사람이 웬 일이지?"

고교시절에 문학과 관련된 일이면 으레 나를 찾던 선생은, 무언가 잘못된 나의 중국문학과 지망 결의에 실망의 빛이 역연했다. 어줍지 않은 나의 문학적 재질을 아끼던 문우들도 그게 될 말이냐는 식이었다. 우선 결정을 미루고 중국문학과가 있는 서울대와 <시인공화국>이라는 동대 국문학과에 각각 입학원서를 내놓았다.

국내 최고의 관학과 사학의 수험서를 받던 날 그 날은 몹시도 으시시한 날씨에 바람이 불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분기점에 선 마음은 더욱 착잡할 밖에 없었다. 관官의 입김에 일제시대 이래 찌들은 서울대의 첫인상에 비해, 동국대는 내 마음의 고향이라 할 선운사禪雲寺의 그 가람을 연상시키는 것이었다. 동국대가 불교종립대학이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던 그날 30계단을 내려오면서 나는 고향과 이미 타계하신 가친의 당부를 뇌리에 떠올리고는 결단의 순간에 떠올릴 수 있는 야릇한 환희에 젖어 있었다. 가친의 당부는 고교를 마치고 숙부가 주지로 계시던 상원사上院寺에 출가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마다 중이 되더라도 대학을 마친 다음에 돼야 한다는 나름의 논리로 도전을 했다. 대학 공부는 속물로 영영 굳어지는 공부라는 것이 가친의 신조였다.

내가 동국대생이 된 것은 이러한 가친의 유훈과 내 자신의 문학적 염원이 동시에 작용한 것이다. 동국대의 고색창연한 캠퍼스에서 그러한 꿈을 키울 수 있는 길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2. 에뜨랑제의 훈장

우리의 프렛쉬 맨 시절은 한마디로 에뜨랑제의 방황, 바로 그것이었다. 대학생활 4년이 그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리엔테이션이라는 대학생활학습 과정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기초교육을 심화하는 교양학부 과정도 없었다. 학우들은 6.25의 전흔이 얼룩진 낡은 작업복에 군화차림이 대부분이었다. 서울은 폐허의 삭막한 도시였다. 죽음을 부르던 전화의 틈에서 모두가 무너지고, 불타고, 마음마저 이그러진 비정의 거리였다. 불안, 부조리, 실존, 무 등등의 철학적인 명제가 그토록 실감되던 도시와 시골에서 모여든 학우들이었다.

문학은 극한상황에서 눈을 뜨는 것 같았다. 왜 살아야 하는가의 막다른 '물음'의 해답을 문학 속에서 해결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문학은 하나의 종교였다. 문학 속에서 각박한 상황의 탈출구를 찾는 것이다. 작업복 속에는 몇 편의 미완 원고가 가장 소중한 것으로 간직되었고, 영원을 찾는 눈은 빛나고 있었다. 문과 20명 모두가 내로라는 문학적 오만에 벅차 있었다. 동국대 문과생이라면 대학가에서 선망의 눈으로 바라보던 터였다. 동국대 배지는 문학의 명예로운 표상 같은 것으로 인식되던 때이다.

《동대시집》의 발간은 어떤 의미에서 동국대생의 고조되는 이러한 문학적 분위기를 일단 정리하는 작업으로 생각되었다. 《동국시집》에 작품이 수록된다는 것은 동국시인으로서의 자격이 인정되는 관문통과의 성격을 지녔었다. 문단의 연간시年間詩 총평이나, 문학지의 월평에 동국시집이 논의되던 형편이었으니까. 이 시집은 단순한 학생시집이 아니라 실험적인 새 세대의 시집으로 주목되었었다. 《동국시집》 수록 학생시인은 대개 14~15명으로 1학년생의 작품은 2명 이내라는 편집 방침이 불문율처럼 되어 있었다. 황갑주黃甲周 시인(滯美)과 필자의 작품이 동국시집 제3집에 수록된 것은 에뜨랑제에게 안겨진 최초의 훈장 같은 것이었다.

황군이나 필자는 이른바 '촌닭'들로 시적 재질을 선배시인들로부터 인정받은 것은 대견한 일이었다. 제4집부터는 우리 동기 중에 9명이나 《동국시집》 수록 학생시인으로 등장했고, 그중 5명(황갑주·신경림·강민·조한길·필자)이 재학 중에 시단에 등단하였다. 《동국시집》에 수록된 필자의 졸작이 문학지의 주목을 받아, 그대로 시 추천작품이 된 것도 이때다.

동국시집의 질적 비중은 동국대의 문학행사 때에 모여든 사람의 수로도 헤아려 볼 만하다. 해마다 《동국시집》이 나오는 11월 초에는 '동국대 문학의 밤'이 열렸고, 1천여 명의 문학 동호인들로 붐볐다. 양주동·백철·서정주·조연현 교수 등의 강연과 동문시인의 출연, '시를 위한 무용'에 송범宋范 임성남林聖男씨 등 일급 발레단이 협찬을 해주었다. 대학 문학의 집단행동으로 '동국대 문학의 밤'만큼 창의적인 내용으로 성공을 거두었던 것은 없었으리라고 생각한다.

시인은 내향적이라 한다. '문학의 밤'은 그러한 시인들이 내향적인 목소리를 밖으로 발음하는 자리이다. 천여 명의 시선이 집중하는 강단에 올라, 학생시인들이 시낭독을 한다는 것은 상당한 모험이었다. 집단의 중압감을 어떻게 이겨낼 것인가. 소주 한 컵은 이런 때일수록 긴장감과 중압감의 해소에 구실을 해주었다. 자기의 시낭독 차례를 기다리며 소주를 들이키던 동국시인들의 면면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동국문학》 창간 당시의 일들도 잊을 수 없다. 《동국문학》의 창간 발기는 이병주·이종출·장한기·황명 동문 등이 정재를 모아 착수한 것이지만, 편집에서 제작비 부족액 조달까지는 동국문학인이 총동원되었다. 1955년, 필자가 2학년 때의 일이다. 하급생은 선배들의 지시에 따라 인쇄소나 복지福地 모니카 다방 등을 전전하면서 교정을 거들고 찬조금 모금 행각을 했다. 모금 행각에 필자는 이현우李賢雨,강민 군 등과 한 파트가 되어 의정부, 인천 등 주로 원거리의 동문들을 맡았었다. 선배들은 직장별로 긴급 소집되어 찬조금을 즉각 마련해주고 격려의 술자리까지 마련해 주는 등 그 성의가 지극했다. 그때마다 일본의 '와세다早稻田 문학', 아니 영국의 '옥스포드 엔솔로지'에 못지않은 동국문학을 건설하자고 기고만장하였다. 《동국문학》지는 동국의 문학적 전통성과 기질에 비추어 적어도 계간으로 내야 한다는 것이 일치된 염원이었다. '동국문학'이 지금 문리대 학생회의 이름으로 명맥을 유지하는 것은 다행이지만, 이것으로 만족해야 한다면 서글픈 일이다.

 

3. 돌이킬 수 없는 회한

이러한 망상에 잠기는 때가 있다. 만약에 대학의 청춘을 다시 한 번 살게 된다면 더욱 멋진 지적 모험을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저 밑바닥으로부터 천천히 그리고 철저히 보편적 지식을 넓히겠다는 것이다. 돌이킬 수 없는 대학시절의 참회가 이러한 확신을 가지게 한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의 대학시절은 교양과목보다는 성급하게 전공과목에 덤빈 셈이었다. 교양과목은 전공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생각이었고 학점만 취득하면 그만이라는 좁은 안목들이었다. 그래서 어떤 학생들은 고교시절의 연장 같은 강의시간엔 아예 출석도 하지 않고, 그 시간에 3, 4학년생의 전공과목 시간을 기웃거리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것은 전공과목에 있어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주변의 많은 재사들이 전공과목인데도 흥미가 없고 까다롭다고 하여 외면하는 경향이 많았던 까닭이다. 그 시간에 차라리 취미에 맞는 책을 읽는 것이 훨씬 재미있고 능률적이란 생각들이었다.

우리 동기들, 그 중에서도 문학적 재능이 촉망되던 친구들을 문학과 관계없는 강의시간에는 아예 만날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좋았다. 대체로 그 시간엔 도서관이나 숲속 혹은 다방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인간이 해야 할 일 치고 달가운 일만 있지는 않다. 오히려 달갑지 않은 어려운 일을 끈기 있게 정복하는 모험이야말로 보람있는 경우가 더 많다. 흥미가 없고 능률이 잘 오르지 않는 과목이 있다면, 그러고도 그 과목을 적당히 넘긴다면 그 갭은 일생을 두고 메꾸어지지 않는다.

부단히 도전하고 시행착오 과정을 되풀이하면서 역경을 가장 많이 뛰어넘는 사람에게 새로운 완성과 비약에의 모험이 가능하다는 것은 명백한 일이다.

'우리는 너 나 할 것 없이, 심지어 겨우 중년의 마루턱에 올라선 주제인데도 소홀히 했던 기회와 잃어버린 청춘을 못내 후회한다'고 말한 토마스·A 클라크 교수의 참회가, 돌이킬 수 없는 자리에 와서야 실현된다.

(《동국교양》 제3호, 19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