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pup zone

1960년대 전반기의 동국대 국어국문학과 / 조상기(62졸)

등록일 2026-10-05 작성자 학과 관리자 조회 55

1960년대 전반기의 동국대 국어국문학과

조상기(62졸, 동덕여대 국문학과 교수)

 

1. 4·19혁명 전후 대학가의 혼란상

자유당 말기의 정치적 부조리와 사회적 혼란은 대학가를 소요의 장으로 만들어간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그 단적인 결과로 드러난 것이 이승만 대통령의 장기집권을 위한 삼선 개헌이며, 이에 대한 국민적 반발감의 팽배와 함께 연일 대학생들의 데모는 계속되었지만, 끝내 집권당인 자유당의 욕구는 성취되고 말았다.

그러나 3·15 부정선거의 결과가 속속 드러나고 마침내 마산에서 비롯된 김주열 사건은 일시에 젊은 대학생들을 분노의 도가니로 몰고갔다. 학생들의 데모가 극렬해질수록 제지하는 경찰들의 위세도 강경해졌지만, 이에 굽히지 않고 모든 대학생들은 데모의 대열 속으로 끼어들었다. 우리 동국인들도 결코 예외는 아니었다. 아침부터 교정의 잔디밭에 옹기종기 모이기만 하면, 그날 진행될 수업에 대한 관심보다는 그날 있을 각 대학들의 데모에 관한 정보나, 풍문처럼 떠도는 소문들이 관심을 갖게 하는 요소들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대학이 본연적 기능인 학문연구와 수업을 진행해간다는 것은 이미 기대할 수 없는 처지였다. 수업은 겨우 1·2교시 정도가 이루어지더라도 참여하는 학생들의 수는 극히 적은 편이었으며, 때로는 아예 휴강인 경우가 허다했다. 이는 교수나 강사가 출강을 안해서가 아니라, 학생들이 전연 수업에 들어가지 않고 데모의 대열을 따라나선 때문이다.

4·19가 일어나던 날은 2교시가 시작되자마자 복도에서 "빨리 나오라!"는 함성이 들렸다. 그것도 이곳저곳에서 외쳐대는 고함소리였다. 그 때 우리는 교수님의 강의가 막 시작된 때라, 서로들 눈치를 살피며 머뭇거리는 사이, 갑자기 뒷문이 확 열리고, 부릅뜬 눈을 한 어느 선배 한 사람이 문짝을 후려갈기며 빨리 나오라고 소리를 치는 것이었다.

이 바람에 우리들은 대충 책가방을 챙겨들고 교정의 잔디밭으로 달려나갔다.

이 때는 이미 교정을 꽉 메운 학생들이 대여섯 줄로 대오를 지어 정문(지금의 제일병원 쪽)을 향해 출발하기 시작했고,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대형의 플래카드와 울긋불긋한 깃발들이 기세 높게 펄럭였다. 우리 국문학과 학생들도 이 거대한 대열에 끼어 시청 앞으로 달려갔다. 우리가 시청 앞에 당도했을 때는 각 대학에서 몰려온 대학생들이 구호를 외쳐대며 아우성을 쳤고, 골목길에서는 초등학교 학생들까지 플래카드를 치켜들고 밀려왔다. 데모의 선두대열은 중앙청을 향해 갔다.

이제는 데모대열의 대학생들도 서로가 뒤섞이어 학교를 구분할 수가 없었고, 길가에서 구경하던 일반 시민들도 어깨동무를 하고 행진하는 대오 속에 끼어들어 한 덩어리가 되었다. 이들이 외쳐대는 구호의 함성은 그야말로 충천하는 기세였다.

우리가 중앙청 근처에 이르렀을 때 총소리가 울려댔고, 앞서서 전진해 가던 데모대열이 한동안 멈춰선 채 움직이지 않았다. 다시 총소리가 울려대고 앞부분의 데모 행렬에서 피를 흘리는 학생들을 몇 명의 대학생들이 떠메고 나왔다. 이러한 광경을 본 학생들은 더욱 흥분하여 목이 터져라 함성을 외쳐댔다. 이 순간부터 학생들은 더욱 용감하게 데모를 저지하는 경찰들과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서울신문사가 불타고 여러 곳의 파출소가 데모대의 기습을 받아 불에 타고 파손되었다. 이러한 행동은 밤늦게까지 진행되었으며 외곽지대에까지 파급되어 온 서울 시내는 일시에 수라장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마침내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성명이 발표되고 치안부재 상태의 서울은 각 대학의 학생들에 의해 일시 유지되기도 했다. 우리 동국대학 학생들이 맡고 있던 종로경찰서와 계동파출소 등을 찾아가 대민봉사를 위해 애쓰던 선배와 동기생들을 만났던 기억은 지금도 새롭기만 하다.

결국 4·19사태로 인하여 계엄령이 선포되고 대학은 무기한의 휴교상태로 돌입해 갔다. 차기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고 다시 대학이 정상화되기까지는 적지 않은 기간이 걸렸다. 이 기간은 어쩔 수 없는 대학의 공백기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2. 5·16 후의 동국대 국문학과의 상황

민주당 정권이 들어선 이후에도 대학가의 데모는 여전히 계속되었다. 오히려 자유당 정권 때보다 못지 않은 데모가 연일 계속되고, 정치와 사회적 질서는 여전히 잡히지 못한 상태였다. 이러한 여파는 대학가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정상적인 수업이 진행되는 날보다는 데모로 인해 소란했던 날들이 더욱 많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더구나 이 무렵은 대학생들의 데모만이 아니라 각종의 사회단체들까지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데모의 형식으로 표출했기 때문에 시청 앞 광장 등은 매일이다시피 데모대의 집합장소가 되고 말았다. 이와 같은 혼란의 연속된 결과는 또 다른 상황으로 치달아 갔다. 그것이 바로 5·16사태이다.

각 대학은 계엄군에 의해 점거되고, 더욱 삼엄한 경계 속에 각종 포고령이 발표되어 정치·경제·사회 전반에 걸쳐 보다 철저한 활동의 제약이 강화되어 갔다. 대학은 또다시 무기한 휴교의 동면상태로 빠져들고 말았다. 4·19의거로 자유당의 정권을 붕괴시키고 새로운 민주당 정권에 기대를 모아가던 대학생들의 기세 높은 의기가 일시에 무너지고, 폐쇄된 교문 밖을 서성거리며 방황을 거듭했던 날들의 아픔은 4·19 세대만이 겪어온 고뇌로운 기억이 아닐 수 없다. 대학의 교문이 다시 열리고 정상화된 것은 상당한 기간이 지난 후였다. 그러나 대학 내의 분위기는 종전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었다. 모든 것이 철저한 통제와 제약된 상황 속에서 진행되었기 때문에, 대학생들의 활동마저도 극히 제한된 한계 내에서만 허용되는 실정이었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 속에서도 우리 동국대 국문학과가 가장 큰 긍지와 자부심으로 삼아온 국학의 연구와 전통을 재정비해 가기에 이른 것은 무엇보다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한 때는 불의에 항거하고 사회정의를 바로잡기 위해 교문 밖으로 뛰쳐나가 목숨을 내걸고 투쟁하던 학우들이 이제는 체념어린 마음으로 돌아와 본연의 학구적 자세를 가다듬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 무렵부터이기 때문이다.

당시 우리 국문학과의 교수님들은 양주동 교수님을 위시하여 서정주 교수님, 조연현 교수님, 이병주 교수님·이동림 교수님·김기동 교수님·김성배 교수님·김근수 교수님·양염규 교수님 등이 열과 성을 다하여 지도해 주셨기 때문에, 교수님들에 대한 학생들의 존경심과 국문과 학생으로서의 자부심은 대단한 편이었다.

더구나 선배와 후배들 간에도 우의가 남달리 두텁고, 학문적 연구와 문학창작에 대한 열정이 점차 고조되어 갔기 때문에 자연 활발한 분위기로 전환될 수밖에 없었다. 국문학이나 국어학에 관심을 갖는 학생들은 그들끼리 그 분야의 교수님의 주변에 모여들고 문학작품의 창작에 관심을 기울이는 학생들은 또한 현대문학을 담당하는 교수님들을 찾아다니며 개별 지도를 받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러한 경향은 학부생들만이 아니라 대학원의 과정으로까지 이어졌다. 그리하여 고전문학이나 국어학 연구에 관심을 가졌던 학생들은 대학원으로 진학하는 경우가 많았고, 창작문학에 관심을 가진 이들은 속속 문단진출의 방향으로 나아갔다.

또 하나 이 시기에 특기할 만한 사항은 대학의 역사상 <학사고시>라는 국가에서 시행하는 시험을 치르고 학사학위를 받은 것은 사상 초유의 일일 것이다. 그 제1회가 1962년 졸업한 이들이다. 한동안 긴장 속에 시험준비를 하고 시험의 결과 몇몇의 학생들은 탈락하여 함께 졸업을 하지 못하고 말았다.

이 학사고시도 다음해까지만 계속되고 이내 폐지되어 전해에 탈락했던 학생들도 전원 구제되었다. 실효도 거둘 수 없는 제도를 마련하고 끝내 폐지한 것은 그만큼 이 시기의 문교행정이 졸속한 처사를 거듭한 시행착오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3. 학문연구와 동국문학의 전통 계승

당시 국문학 연구와 국어학 연구는 양주동 교수님을 중심으로 하여 활발하게 연구하는 제자군이 형성되었다. 이 무렵만 해도 대학원이 활성화되지 못한 시기이기 때문에, 주로 본 대학에 적을 둔 전임교수들이나 타 대학의 교수들이 과정을 밟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박사과정의 경우는 더욱 그러했다.

1960년대 초부터는 국문학과의 졸업생 중에서도 대학원 진학을 희망하는 학생들이 점차 늘어나는 추세였다. 그러나 대학원에 진학했던 학생들도 대학교수로 성장해갈 전망이 불투명하거나, 경제적 사정 등으로 도중에 포기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당시는 취직하기가 매우 힘들었고, 국문학과 출신으로서 희망하는 교직의 문도 극히 좁은 편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학원의 과정을 계속하여 지속해간 이들은 거의가 중·고등학교에 재직하고 있는 교사들이 대부분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무렵 대학원에서 학문연구에 전념해 가던 선배들 중에서 기억에 남는 이들은 김영배金英培·최범훈崔範勳·강기진康琪鎭·이종찬李鍾燦·임기중林基中·이우종李祐鍾 등의 선배님들이다. 이분들 중 강기진·이우종 선배를 제외하고는 모두 현재 우리 국문과의 교수님들이며, 이중 최범훈·강기진 두 선배는 이미 고인이 되셨다.

또한, 현대문학 분야의 창작에 대한 학생들의 열의와 관심이 컸던 것도 동국대학 국문학과만의 자부심이 아닐 수 없다. 일찍이 한국문학의 기틀을 다져온 많은 문인들이 배출된 곳이 바로 우리 동국대학이며, 해방 후 한국문단을 주도해 온 서정주 교수와 조연현 교수에 대한 학생들의 존경심과 신뢰감은 더말할 나위없는 정도였다.

더구나 학부 재학 중에 이미 문단에 등단하여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선배와 동기생들이 적지 않기 때문에 이들로부터 받은 자극이나 분발심도 없지 않았다. 특히 일년에 한번씩 발간되던 《동국시집》에 자신의 작품을 실리는 것은 시를 공부하는 학생들의 꿈이었으며, 매년 개최된 <문학의 밤>에 따른 시화전 행사는 국문과의 행사 중에서 가장 큰 행사였다. 각 대학에서 모여든 관중들이 입추의 여지없이 강당을 메우고 선배 문인들과 후배 문학도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작품을 낭독하고 강평도 듣고 마지막 대포집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격려와 위로로 일관된 분위기는 동국문학의 뿌리깊은 전통을 확인하는 자리였다. 황명黃命 선배를 위시하여 송혁宋爀·강민姜敏·낭승만浪承萬·김종원金鍾元·오학영吳學榮·최원식崔元植·김용철金容喆·조병무曺秉武·장문평張文平 등이 <문학의 밤> 행사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이름이었고, 필자와의 동기생 중에서는 재학 중에 이미 문단에 등단한 김문수金文洙·최원崔元·김사림金思林·朴烈我 등이 있었고, 황순구黃淳九·이철호李喆鎬·윤석호尹錫浩·이장환李章煥·김윤완金允晥 등 많은 이들이 작품 창작에 열의와 의욕을 보여주더니 이후 속속 문단에 등단하였다.

이러한 동국문학의 빛나는 전통은 그대로 동국인들에게 이어져 1960년대 중반기까지 참으로 많은 문인들이 문단에 등단하여 활발한 작품활동을 전개해 갔고, 또한 높은 문학적 평가를 받아왔다. 홍기삼洪起三·조정래趙廷來·이우석李愚碩·박제천朴堤千·문효치文孝治·정의홍鄭義泓·홍신선洪申善·채수영蔡洙永·김웅수金雄洙·김초혜金初惠 등 많은 문인들이 대거 등단하여 동국문학의 찬연한 전통을 이어가는 막중한 책무를 다해 온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