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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학부시절의 은사님들 / 문영오(66졸)

등록일 2026-10-05 작성자 학과 관리자 조회 61

내 학부시절의 은사님들

문영오(66졸, 동덕여대 교수)

 

나는 이 글에서 그 내용이 보편성을 지니게끔 어지간히 노력하겠지만 아무래도 내 대학시절의 개인적인 회고담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내 동악과의 인연은 어떻게 보면 극적인 데가 있다. 고3 수학선생님과 진학문제로 상담했을 때 당신께서 주셨던 말씀. "동국대 국문학과가 좋다!" 더러의 경우 사람들은 선현이나 선배 내지 스승의 한 말씀이 그 사람의 명운을 좌우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나는 5·16 쿠데타의 분비물로 대학가에 지각변동을 일으켰던 국가고시 1회 출신이다. 지금의 수능시험이야 내신성적과 합산해서 희망대학에 맞춰가는 것이고 또 수능시험 자체에 등락이 없는 제도이지만 그 때의 국가고시는 전국 대학 정원 정비령에 의해 통폐합이 이루어지면서 애시당초부터 전국 대학 국문과 정원을 정해놓은 뒤 그 국문과 지원자에 한해 학생을 선발하는 제도였다. 그러다보니 대학에 들어간다는 것이 여간 어렵고 선택의 폭 또한 좁을 수밖에 없었다. 나 같은 시골뜨기에게(광주에서 고등학교 다님) 대학의 문은 높아만 보이는 것이었다. 그래서 들어온 '동국대 국문학과'. 62년 3월에 입학해 보니 동기 입학생들보다 나는 3살이나 위였었다. 이렇게 만학이 된 이유는 고향에서 서당공부를 하다 보니(이 서당공부 탓으로 나의 학창시절의 별명은 '훈장'으로 불리어졌다) 그렇게 된 것이다.

지금 나는 명색이 학자의 길을 걷고 있다. 오늘의 이 길을 걷게 해준 데는 은사님들의 지도편달에 입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나는 스승의 복을 많이도 누린 사람이다. 학부시절 내게 국문학의 눈을 뜨게 해 주신 선생님들은 무애 양주동 선생님·미당未堂 서정주 선생님·석전 이병주 선생님·이동림 선생님·시원柿園 김기동 선생님·석재石齎 조연현 선생님 등이시다. 그 함자만 들어도 외경스러움에 숙연해지는 선생님들이시다. 나는 이 분들로부터 배우고 익힌 것도 많았다. 설혹 지금은 다 잊어버려 기억되지 못한다손 치더라도 이분들에게서 교수받았던 내용들은 오늘의 내 학문바탕에 뼈가 되고 살의 분자가 되어 채곡채곡 쌓여있는 것이다.

무애 선생님의 정읍사와 망부석 강의. 선생님은 내 대학 3년 시절 대학원 원장으로 봉직하고 계셨는데 당신의 호한한 저서인 《고가연구古歌硏究》를 원장실 한쪽 구석에 쌓아 놓으시고 20%를 할인해서 학생들에게 넘겨주시며 책을 구독하는 학생마다 그 책 첫장 여백에 친필로 한마디씩 써 주시는 것이었다. 당신께서 내게 써주셨던 '학요정박學要精博'. 그 당시 나는 이 성어의 참뜻을 음미할 줄을 몰랐었다. 오늘에야 겨우 깨닫게 된 깊으신 가르침. 당신께서는 바쁘신 탓으로 휴강이 잦으신 편이긴 하셨으나, 이 한마디는 수십 권의 책보다 내 학문의 길에 뚜렷한 좌우명이 되고 있다. 선생님은 학문을 하는 학구적 자세만이 아니셨다. 학자로서의 삶의 자세를 가르쳐주신 분이시기도 했다.

어느 가을날 강의 중간에 선생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학자로서 평생토록 지조를 지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때 나는 선생님의 이 말씀을 별로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었다. 그러나 내 한국현대사를 겪어오면서 변절과 아유를 일삼는 학자나 문인들의 초라한 꼴을 보면 선생님의 탁연하고 고고하셨던 고절을 새삼 우러르게 되니……. 나는 선생님의 이 말씀을 거울삼아 선비의 길을 걸어보려고 용을 쓰고 있다.

석전 선생님은 나에게 동국 국문인의 오기를 가르쳐 주신 분이시다. 당신은 별난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어서 시험문제는 번번이 학생들의 예상을 뒤엎고 배우지도 않은 엉뚱한 문제를 출제하시기도 했는데, 내 대학 2학년 시절 《송강가사》 성주본星州本 발문跋文 번역을 출제하시니 한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재시험을 치르게끔 되었다. 시조를 외워쓰되 반드시 16세기 표기법을 고집하셨고, 시조 수백 수를 붓글씨로 써내게 하신 뒤, 겉표지만 바꿔내는 학생들을 골탕먹이기 위해 드릴로 구멍을 뚫는 극성을 보이시는 분이셨다. 그 당시 선생님은 공포의 대상이었고 지긋지긋하게도 학생들을 들들 볶는 분이셨다. 당시 학생들의 반발이나 불평 등 따위는 안중에도 두지 않으시고 국문학도로서 자질을 함양시켜 주시기 위해 혼신의 정성을 다하시는 것이었다.

지금 되돌아보면 당신의 그 당찬 오기와 패기는 타 대학 국문학도들과 변별키 위한 당신만의 고집이셨고 사랑이셨다. 남자의 오기. 아니 동국 국문인의 오기. 오기야 물론 양면성을 지니는 것이겠지만 그것이 긍정적으로만 발전한다면 엄청난 추진력을 지닐 수도 있다고 할 때, 선생님께서 내게 알게 모르게 끼쳐주신 오기는 오늘의 내 육신의 피로 흘러 논문으로 저서로 전이되고 있다.

시원 선생님께서는 한문과 고전소설을 강의하셨는데 내 4학년 시절 등교길에 선생님을 자주 뵙게 되었다. 그 때마다 선생님께서는 나의 대학원 진학을 권유하시는 것이었다. 그럴 적마다 나는 선생님의 함의된 뜻도 파악하지 못하고 “선생님 고등실업자 되기 싫어요”라든지 “선생님께서는 고전소설을 다 연구해 버리셨고 무애 선생님께서는 향가와 여요를 다 연구해 버리셨으며 석전 선생님께서는 두보를 연구해 버리셨잖아요. 저도 선생님들처럼 큰 주제를 잡아 연구하고 싶은데 할 것이 없잖아요. 그러니 대학원 진학은 그만 두겠어요”라고 대답하거나 하면 선생님께서는 어이가 없으시다는 듯 빙그레 웃으시거나 하시며 “연구할 것이 널려 있는데 이 사람아!” 하며 한심스럽다는듯 쳐다보곤 하셨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 얼마나 내 무식한 대답이었던가. 그 뒤 나는 4년의 세월이 지난 뒤에야 대학원에 입학했고 지금은 저 왕양한 학해學海의 한 자락을 헤쳐보려 무진 애를 쓰고 있으니, 선생님 말씀대로 보다 일찍 학해에 뛰어들었던들 조금은 더 발전했을 텐데…… 생각할수록 가슴 저민다.

내 3학년 때던가 2학기 첫 강의에 선생님께서는 분필만 달랑 들고 강의실에 들어오시더니 동파東坡의 <전적벽부>를 끝까지 외우시며 판서를 하시는 것이었다. 서당공부를 거친 나이기에 별다르게 신기해 보이는 것은 아니었지만 당시 동기생들은 눈들이 휘둥그레지는 것이었다. 내 지금 외워 쓰려 해도 절반도 채 못 가서 막히는데……. 선생님의 적벽부 고전문 암송판서를 오늘의 후배들이 대한다면 더욱 놀라울 것이다. 선생님께서는 술을 즐기신 탓으로 그에 걸맞게 객기도 지니신 멋쟁이이셔서 자유당 말기 때 대취하시어 경무대(지금의 청와대) 담벽에 방뇨하시며 "이승만 나와! 이승만 나와!"라고 외치시기도 한 분이셨다. 권력에 굴하지 않는 선비의 기개.

나는 2학년 2학기 때에 <문예창작>을 수강했었는데, 이 강좌를 담당하신 분은 미당 선생님이셨다. 당신께서는 첫 시간에 행동주의 작가 앙드레 말로의 문장수련 공부를 소개해 주셨다. 내용인즉, 말로가 고등학교 시절 소설공부를 하고 싶어 국어 선생님을 찾아뵙고 상담을 드렸더니 국어 선생님은 말로에게 스탕달의 《적과 흑》을 베끼도록 권했다는 것이다. 그 때 말로는 남의 소설을 베껴보라는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심한 모욕감을 느꼈지만, 충실히 그 지도를 따랐다는 것이다. 작가가 되고 나서 회고해 보니 그 방법이 여간 현명한 게 아니었다고 추억담으로 적고 있다면서 여러분도 이 방법을 택하면 분명 문장연마에 발전이 있을 것이라고 학생들에게 권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선생님의 이 권유를 내 문학공부의 필수적 방법론으로 수용하고 그 날부터 소설 작품들을 베끼기 시작하였는데, 토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김동리의 소설집 《무녀도》 등이 그 대상이었다. 내 오늘 한 줄의 문예문장이나 논문을 꾸릴 수 있는 역량 비축은 전적으로 이에 입은 바 크다 할 것이다.

석재 선생님 강의는 간단명료하기로 정평이 나 있었는데, <현대문학사>의 경우 시간에 강의할 요목을 칠판에 일정한 간격으로 판서한 뒤, 학생들의 필기가 끝날 때를 기다려 즐기시는 담배 한 대 피우시고는 테마를 풀어나가시는 강의 수법이 간명하기 이를 데 없었다. 세련된 것일수록 단순하다고 할 때 선생님의 강의는 세련미 그것이었다.

입학동기 25명 중 과가 적성에 맞지 않아 전과하거나 재수한 동기생들도 있었지만, 아마도 나의 입학동기들은 동국대 국문학과 50년사에 가장 찬란한 구성원이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왜냐하면 입학동기생 중 시인으로 등단한 작가 홍신선·강희근·문효치·정대훈·하덕조 등 6명이고 소설가로 등단한 작가는 오늘날 최고의 명성을 드날리는 조정래가 있다. 이 중 나를 포함해서 3명이 대학에 재직 중이다. 모교 홍기삼 교수는 내 3학년 때 편입학해서 졸업동기가 되었으니 나의 입학과 졸업동기 중 4명이 학자의 길을 걷고 있다. 누가 뭐라 해도 이들의 피 속에는 무애 선생님의 '학요정박'과 석전 선생님의 발로하는 공부와 오기, 시원 선생님의 <이조소설론>의 박람과 정리, 미당 선생님의 문학공부 수련의 정도로의 인도, 석재 선생님의 요점을 적출해 내는 세련성이 곤곤히 흐르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는 동국 국문인의 전통이 되어 먼 미래로 도도히 흐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