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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공화국 / 문효치(66졸)

등록일 2026-10-05 작성자 학과 관리자 조회 67

문인공화국

문효치(66졸, 시인)

 

내가 동국대학교 국문학과에 입학한 것은 1962년이었다. 5·16 군사정권이 들어선 후 사회적 분위기는 매우 경직되어 있었지만 고교시절까지 워낙 부자유에 찌들려 온 우리나라 학생의 처지로는 대학의 분위기는 그런대로 자유스럽게 느껴졌고 더구나 국문학과는 우리나라 문학의 메카답게 전국 각지에서 몰려온 문청文靑들로 붐벼 그 낭만적 분위기가 더했다. 우리 새내기들은 서로를 익히기 위해 강의가 끝나면 술자리에 자주 어울렸으며 그러는 가운데 친분을 쌓아갔다.

우이동 골짜기에서 선배들이 베푸는 신입생 환영회가 있었다. 이 자리에서 교수님들을 모시고 신입생 백일장이 열렸다. 글제는 '물소리'. 모두들 고교시절 문예반장을 자처하며 실력을 과시하려 했던 우리 새내기들은 무척 신경 쓰이는 첫 시험 무대였다.

우이동 골짜기에서 물소리를 들어가며 시심을 가다듬는 일로 우리의 동국대학교 문학공부는 시작되고 있었다. 미당 선생님의 심사 결과 이세희·임웅수·하덕조 등이 입상되어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문학공부는 마라톤과 같은 것. 우리는 입상 여부에 관계없이 강의 듣고 책 읽고 쓰고 술 마시고 입싸움하고 우정, 애정의 문제로 갈등도 겪어가며 장거리 주파를 위해 매진했다.

당시 교수님들은 우리의 영웅이었다. 양주동 교수님은 향가와 고려가요 연구로, 서정주 교수님은 시로, 조연현 교수님은 평론으로, 김기동 교수님은 이조소설 연구로, 이병주 교수님은 두시연구로 각각 우리나라 최고의 권위자들이었다. 첫 수강신청을 하기 위해 지금 다향관 자리에 길게 있던 게시판의 강의 시간표를 보면서 교수님들의 성함을 발견하고 행복해했던 기억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우리는 문학서클에 가담하여 문학수업을 하면서 선·후배 간의 유대를 다져갔다. 당시 문학서클은 <용운문학회>와 <창작문학회>가 있었다. <용운문학회>는 이우석·조윤호·이동화·김남웅 등의 선배들이 하고 있었고 <창작문학회>는 한상칠·이왕호·윤세철·정용남 등의 선배들이 모여 있었다. 선배들의 권유로 우리는 그 두 서클 중 하나로 가입하게 되었다. 기억해 보자. 그 때 조정래·임웅수·유근택 등이 <창작문학회>로 갔고 강희근·하덕조·문효치 등이 <용운문학회>에 입회했던 걸로 생각된다. 빈 강의실에 모여 작품집을 만들고 합평회를 하며 지도교수님의 강평 한마디 듣는 일, 그것들이 우리를 키우는 큰 힘이 되어 주었다.

해마다 가을이면 중강당에서 <문학의 밤>이 열렸다. 이 때 이미 기성문단에 데뷔한 몇몇 상급생들은 자신들의 작품이 실린 《현대문학》, 《자유문학》 등을 들고 나와 낭독을 했는데, 우리는 이 모습을 보고 부러워하며 문단 데뷔의 의욕을 북돋우기도 했다.

1963년쯤이었던가, 국문학과 주임교수 이병주 선생님의 주선으로 두 문학회는 합쳐져 <동국문학회>로 이름을 바꿨다. 동시에 제1회 '동국문학연'이 베풀어졌다. 시 낭송회, 문학강연, 시화전, 축하연 등 다채롭고 규모가 큰 행사였다. '동국문학연'은 기성문단에서 활동하고 있는 선배 문인들과 재학생들의 어울마당이었다. 이동주·이원섭·구경서·김사림·낭승만·신경림·이우종·이형기·이창대·조종현·장호 등 기라성 같은 문단 선배들을 초청했다. 초청장을 들고 선배 문인들을 찾아뵙고 차 한 잔 대접받는 일만으로도 우리는 모교에 대한 긍지와 애정이 뿌듯이 생겼다.

그 무렵 오하영·이우석·최원식·홍기삼·장문평·조윤호·고영(공석하)·박진호 등 이미 기성문단에 등록을 마친 재학생들을 비롯하여, 필자가 재학 중(62~66년), 김시태·김남웅·한상철·유혜자·김홍우·정광수·주원규·채수영·김초혜·조정래·강희근·홍신선·유우희·조병무·문효치·김규화·박제천·신규호·김용언·김정웅·마종하·명기환·박상문·백숙천·송유하·신용선·임웅수·정해춘·정대훈·정양·정의홍·하덕조·홍희표·신상성·안양자·이계홍·한용환·김선학·허정자·김숙현·김철진·윤은상·김남일·문윤호·유근택·백승만·김시중·윤영창·이영순·성홍식 등의 문청들이 교정을 가득 메웠다.

'문인공화국' 이 말은 사실은 강희근이 재학 중 《동대신문》에 발표한 어떤 글의 제목 속에 있는 말이다. 공화국이기 때문에 절대 군왕은 없었다. 저마다 현란한 개성을 가지고 각자의 의지와 방법으로 '문학'이라는 거대한 바다를 향해 모색하며 항해를 했다.

우리 문청들은 문학연습뿐만 아니라 문단文壇연습도 했는데, 자기가 추구하는 문학적 성향이나 문학인식의 시각에 따라 또는 개인적 친분에 따라 동국문학회는 몇 개의 그룹으로 다시 분할되었다. 학생문단의 인구팽창과 문학공부의 자존심을 건 경쟁의식이 넘쳤던 그 때의 상황으로는 너무도 자연스런 귀결이었다.

조정래·김초혜·임웅수·문윤호·유근택·홍희표 등 20여 명은 <동국문학회>에 남았고, 김남웅·강희근·문효치·김남일·하덕조·유우·정의홍·김시중·김갑기·윤영창 등 30여 명은 <동대문학회>를 만들었으며 박제천·홍신선·신용선·선원 등 10여 명은 <다다동인회>를, 이영순·이종영 등 10여 명은 <아람동인회>를 조직해서 활동했다. 이로써 동국문단은 백화가 난만했으며, 선의의 경쟁이 치열하여 동국문학의 전성기를 열어갔다.

아직은 궁핍하고 암울한 시대, 이 무렵 명동은 젊은이들의 천국이었다. 저녁이 되면 '청동다방', '청산다방', '학사주점', '은성' 등으로 모여 호주머니를 털어 막걸리를 걸치고 문학과 인생과 시국을 논하며 열도 퍽 올렸다. 사람을 좋아하고 그러면서도 '나'는 어디까지나 '나'이기를 내세웠기 때문에 술을 곁들이고 보면 말이 되는 소리 안 되는 소리로 으레 핏대를 올려 다투기도 했다. 아무리 심하게 다투어도 다음날 만나면 아무렇지도 않은 듯 악수를 하며 웃어제끼는 대인풍(大人風)을 흉내내기도 했다. 술이 거나해지면 명동거리가 좁게 느껴졌다. 그러면 청계천 술집거리로 진출했다. 연탄화덕이 들어있는 드럼통 위 가장자리에 갓처럼 양철을 둘러 술사발과 안주 따위를 올려 놓았다. 우리는 여기에 둘러앉아 술과 연탄개스를 함께 마시며 다시 입씨름을 했다. 술사발 너머로 보이는 모습은 각각 달랐다. 임웅수는 취하면 고개를 푹 숙이고 혼자 무작정 걸어가는 습관이 있었고 준수한 용모의 홍기삼은 노래를 잘 불렀는데 세계 각국의 노래를 국경의 벽 없이 넘나들며 불렀다. 조정래는 술기운의 도수가 올라가면 웅덩이를 들썩거리며 열변을 토했고 껑충한 키를 작업복 속에 우겨넣고 다니는 홍신선은 가끔 고개를 뽑아 좌우로 흔들었다. 박제천은 몸에 보스기질을 감고 다녔고 강희근은 작은 몸에서 재치가 넘쳐 흘렀다. 선량한 눈의 정의홍은 끊임없는 다변으로 화제를 풍성하게 했으며, 통 큰 호주가 용선은 유머가 뛰어나 좌중에 웃음을 가끔 퍼부었다. 이즈음 조정래와 김초혜, 박제천과 김정희의 연애는 캠퍼스의 화제거리였다. 부러움 반, 시기 반으로 도마 위에 자주 올렸지만 모두가 정신적으로 응원을 보내 주었다.

때로는 강희근의 하숙집으로 몰려들었다. 방 가운데에 너벅지에다 막걸리를 담아놓고 바가지로 퍼 마시며 오징어다리를 뜯는 맛이 좋았기 때문이다. 정해춘과 서영의가 함께 쓰는 자취방을 습격하는 재미도 좋았다. 그의 모친이 시골에서 만들어 가지고 온 밑반찬과 정해춘의 즉석 안주 요리는 맛이 괜찮은 편이었다. 더구나 그의 안집에서는 밀주를 팔고 있어서 당연히 술이 나오게 되어 있었다. 친구들이 모여 그의 며칠 분의 식량을 축내고 있을 때면 정해춘은 구석에 앉아 슬픈 곡조의 퉁소를 불었다. "듣기 싫다 고마, 치워 삐리라" 서영의의 고함소리에도 아랑곳없었다.

언젠가 방학 때 을지로4가쯤에서 임웅수를 만났다. 그는 이름난 술꾼이었고 나도 술좌석 분위기를 좋아하는 터였으므로 자연히 청계천 드럼통 연탄화덕 앞에 앉게 되었다. 술 마시는 동안은 참 즐거웠다. 그러나 술값 계산을 하려고 보니 둘 다 돈이 한 푼도 없었다. 방학 전 왕십리 중앙시장 골목 술집에 잡혀놓은 임웅수의 스웨터, 내 손목시계, 김남일의 우산도 아직 찾지 못한 처지여서 뭐 잡힐 물건도 없었다. 난감했다. 임웅수는 하늘을 한동안 쳐다보더니 혁대 밑 라이터 호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지폐 한 장을 꺼냈다. 그는 자살하기 위해 약 살 돈을 구부려 놓은 것이라 했다. 농담으로 알았다. 술값을 해결하고 그는 또 고개를 푹 숙이고 혼자 걸어서 가버렸다. 그러나 그의 자살은 농담이 아니었다. 그길로 속리산에 들어가 독초를 캐먹고 쓰러졌다. 다행히 지나는 사람에게 발견되어 살아나긴 했다. 왜 죽으려 했는지 그 사연은 아무도 모른다. 그 후 자살할 돈으로 술을 마신 임웅수의 술이야기는 친구들의 입에 회자되었다.

그러나 문학한답시고 가슴에 잔뜩 바람이나 넣고 맨날 술타령만 한 것은 아니었다. 강의를 충실히 들었고 레포트도 열심히 써냈다. 이병주 선생님의 《송강가사》 전권을 붓글씨로 써내는 등 방학숙제도 빠뜨리지 않고 했다. 서영의의 제안으로 독서회도 했다. 우리의 독서 목록에는 단테에서부터 장 주네까지, 그리고 《금오신화》에서부터 장용학에 이르기까지 동서고금을 망라했으며 의욕도 높았다. 책들은 주로 청계천 고서점가를 누비며 구해 읽곤 했다. 비록 등사물이긴 했지만 작품을 모아 작품집도 꾸준히 꾸며냈으며 합평회 때에는 신랄한 비판도 서슴지 않았다. 중강당 또는 종로예식장을 빌어 '문학의 밤'도 열어 널리 솜씨 자랑도 했다.

종로예식장에서 '문학의 밤'을 할 때였다. 시작시간은 거의 되어가는데 아직도 임원 몇 사람은 장내준비에 분주했다. 나는 피아노의 놓인 방향을 바로잡기 위해 힘을 쓰다가 그만 바지의 웅덩이가 터지고 말았다. 와이셔츠 끝이 꼬리처럼 비죽이 나왔다. 이제 곧 시작되면 내가 맨 처음 나가 인사말을 할 차례였다. 당황한 나는 앞줄에 앉아 기다리고 있는 관객 중 여대생 한 사람에게 다가가 염치불구 사정을 호소했다. 그녀는 웃으며 나를 따라 어두컴컴한 지하실까지 와주었고 내 바지를 벗겨 꿰매 주었다. 팬티바람으로 서서 내 옷을 꿰매는 그녀가 무척 아름답게 보였다. 나는 급한 상황을 모면했고 그 일로 해서 그 뒤 그녀와 데이트를 하며 달콤한 추억을 만들었다.

65년 언제쯤이던가, 김남일은 고향 청주에서 시화전을 열었다. 서울에서 이병주·김기동·최세화 교수님들도 격려차 내려왔다. 우리는 아예 거기서 며칠쯤 먹고 뭉갤 요량으로 전시장 옆에 방을 얻어 들었고 그 기간 동안 청주 곳곳에 추억을 만들어 놓았다. 무심천 뚝길을 걸어 이정호네 집으로 농주를 먹으러 갈 때 목덜미를 스치는 부드러운 바람은 지금도 생생하다. 강희근은 그 때 콧방귀 소리로 가야금 뜯는 흉내를 냈는데 우리는 그 소리가 재미있어 무심천에 웃음도 많이 뿌려놓고 왔다.

공덕동 미당 선생님 댁은 우리들의 요람이었다. 처음 선생님 댁을 찾을 때는 한국시의 거인의 댁을 방문한다는 게 다소 어렵고 가슴 두근거리는 일이긴 했으나 한번 길을 튼 제자들은 수시로 드나들었다. 제자들이 들이닥치면 선생님은 목탁을 두드렸다. 그 신호에 이어 조금 후엔 술상이 들어왔다. 술상 앞에서 며칠씩, 몇 달씩 손질한 작품들을 앞에 놓고 그분의 말씀 한 마디를 기다리며 가슴도 졸였다. 선생님은 원고지에 밑줄 긋고 가필도 해 주셨는데 때로는 숙제도 내주시면서 제자들을 지도해 주셨다. 공부 신세, 술 신세를 잔뜩 지고 나설 때면 대문을 활짝 열고(평소에는 쪽문만 사용함) "시인 나가신다"하며 우리의 의기를 높여 배웅도 해 주셨다. 우리는 이 거인의 훈훈한 품속에서 이렇게 귀하게 자랐다.

동국대학교는 위대한 '문인공화국', 우리는 여기에 4년씩 머물면서 젊음의 소중한 한 도막을 불꽃처럼 아름답게 태웠다. 이병주 교수님은 이 시기를 동국문학의 전성기라고 평가했다. 문단 데뷔도 이 시기에 가장 많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필자의 학년과 위 아래 학년으로 함께 공부한 동문 중 현재 50여 명이 문단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러나 수보다는 질이 오히려 승하다 할 수 있으니 이병주 교수님의 평가가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동국대학교 그 품속에서 지금도 많은 후배들이 펜을 벼리고 있으니 문인공화국의 전통은 면면히 이어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