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그리운 아줌마집 / 김강태(79졸)
지금도 그리운 아줌마집
김강태(79졸, 덕원여고 교사)
1.
1970년대 초 나의 국문학과 시절은 ‘비극적’이라고 해야 마땅하다. 김승옥의 소설 <서울, 1964년 겨울>이 내 의식을 휘어잡고 조세희의 <난·쏘·공> 분위기가 이 시대를 팽배해 있던 상태였다. 게다가 엄청난 정치적 혼란이 던져주는 의식의 과잉과 개인의 무의식적 정황이 몇 개의 혼돈으로 나를 사로잡았다. 1970년대는 거의 누구나 그랬다. 그 해 겨울은 내게 가난한 생각의 나열과 거덜난 생활 자체가 나의 추위를 부채질해 준 시기였다. 그때 나는 건방졌다. 속으로는 연애같은 짓에 냉소를 보내고 소주와 이웃 친구와 후배에 미쳐 있었다. 나는 큰 공군 회색 바바리(외투)에 내 몸을 감싸고 바닷가를 거닐곤 했다. 추웠다. 그러나 해풍은 다만 한 잔의 소주와 더불어 내 몸을 덥게 해주었다. 인천 앞바다-월미月尾는 나의 상습적인 매복 지역이었다. 그때만 해도 그곳은 인정이 후덕했다. 우선 물건 값이 쌌다. 내가 임시로 기거한 인천 신포동 <포란>, <리베르떼> 등의 화실과 <두손 디자인 연구소> 둥지가 나의 거처였다. 쌀밥은 어쩌다 마주쳤고, 라면과 소주·우동과 막걸리가 고작으로 주·부식 겸 간식이었다. 그때의 끔찍한 허기란…… 오로지 나만 오만하고 외롭고 안타까운 듯한 착각으로 지낸 것이다. 어쨌든 ‘황량荒凉’, 이것이 나의 또다른 이름이었다. 일부 고민하는 동료들의 이름이기도 했다.
겉으론 아닌 척했지만, 결벽에 가까운 나의 자존심은 대단했다. 다만 알량한 소갈머리 그것이 나를 지키는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지금도 나의 20대를 지켜온 유이有한 것, 자존심과 글쓰기, 이 두 가지를 돌이키면 솔직히 눈물부터 글썽이게 된다. 나보다 더 아파하는 친구들도 더러 있었다. 이것이 내 젊음의 실상인가. 젊음의 시작이란 말인가. 시간을 보내면서도 그땐 얼마나 억울해 했던가.
그러다가 나는 뒤늦게 입학한다. 동료들이 1, 2년 쯤 먼저 대학을 간 뒤였다. 그 시점에서 내가 오른 대학 캠퍼스는 그래도 살아 움직이는 그 무엇이 있었다. 우리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대화를 나누었다. 대학생만이 누리는 특혜였다. 개중에는 이런 대화도 있었다.
여자: 남자애들이 모이면 무슨 얘기하니?
남자: 음. 여자 얘기. 여자애들은?
여자: 우리도 남자 얘기하지, 뭐.
(중략)
새벽 6시. 서울역에 내리면 바로 길 건너에 ‘아침 찻집’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달걀이 든 ‘모닝 커피’라는 걸, 기차를 동숭한 예쁜 여대생과 몇 번 마셔본 적도 있다. 싱그러웠다. 그런데 어느 날, 저녁 때 만난 그녀의 눈빛이 이상해져 있었다. 이상한 눈빛…… 싫었다. 나의 순정은 그대로인데, 지금은 아쉬운, 지독한 염결성 탓이었다. 그녀는 사실 호리호리한 몸매의, 좋은 아가씨였는데. 그런데 만나지 않기로 마음 먹은 것은 밤 12시 부근 명동 길가에서 그녀가 어느 폼나는 남성과 데이트하는 모습을 목격한 뒤였다. 나는 술에 젖어 두리번대며 잘 곳을 찾고 있는 중이었다. 자정 부근이면, 나도 그녀도 인천으로 갈 수 없는 시간이다…… 나는 마냥 그녀를 원망하면서 모든 여자와의 정식 만남을 끊기로 다짐한다. 하나의 상처로 내 거지같은, 꽉 막힌 순정이 휴지조각처럼 구겨지는 모습을 보았다. 후배님들 말씀에 의하면, 그땐 내가 거지꼴이어도 ‘남성용’으론 괜찮은 편이었다는데. 그러나 이전까지의 추억은 아름답다. 아직도 지난 모든 기억은 아름답기만 하다.
2.
곁들여 나의 수상 경력이, 문학(문장 실력)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점을 깨달은 것은 입학한 해 봄이었다. 나는 처음부터 오만했고 동시에 자신에게 절망해버렸다. 많은 문청靑들이 국문학과 내외에 포진해 있었다. 불교학과에, 국어교과에, 신문사에, 철학과에도 있었다. 캠퍼스마다 넘쳐 있었다. 선배들, 특히 겁나는 <실험 동인>들이 속속 복학했다.
그들은 ‘문학의 특전 용사’처럼 보였다. 겁났다. 시부럴, 억지로 평가절하했다. 술에 취하면 나는 너무 밝은 백목련에 취했고 그 꽃잎새를 안주로 씹곤 했다. 싸름한 핏내음? 그리고 다시 목련이 지면—뭐가 그리들 바쁘다고 쉬지는가-나는 파릇이 돋는 잎새를 보며 그(목련)를 잊는다. 목련·여자, 둘 다 이별한 셈이다. 한동안의 방황이 이어졌다. 황량했다. 동료나 선배들, 대개가 뿔뿔이 흩어져 있었다.
국문학과 1학년 시대. 우선 국문과 야유회 겸 신입생 백일장이 있었다. 선배들이 학년별로 무수히 참가했다. 참 인상적이었다. 지금 신입생들마저도 2/3 정도, 2·3학년 선배 약간명만 모이는 모임에 비하면 격세지감을 느낀다만, 글쎄 이것도 하나의 신세대 풍조겠지만. 조趙라는 친구와 나는 입학 때부터 의기투합한 상태였기에, 우리는 사회를 보면서 글을 짓고 노래도 불렀다. 우리가 유명해진 곡이 성서의 삼손 일화인 <딜라일라>, 이름하여 ‘처용과 데릴라’였다. 곡에 향가인 <처용가> 가사를 입힌 발상도 좋았지만, 구절마다 후렴구로 ‘딜라일라! 딜라일라!’를 반복한 야단법석이 선배들에게 주효했다.(지금도 가끔 주석에서 초대받곤 하지만, 많이 멋적다. 거칠게 후렴구를 외칠 때 묻어나오던 슬픔의 반짝거림을, 그대들 진정 아시는지.)
나의 단골 곡목은 단연 가곡 <명태>였다. 국문학과 학생이라면 누구나 따라 부르고 장단을 맞추었다. <국문과가>인 ‘떠도는 몸이라고 사랑마저도…’와 함께, 평론가 홍기삼 선생께서 나의 ‘시집 해설’에서도 언급하실 정도였으니까…. 결코 잘하는 노래는 못 되는 나의 <명태>는 가곡풍이 아닌, 굳이 말한다면 판소리나 재즈풍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아직도 별명은 ‘강태명태’인데, 요즘 여러 사람이 흔히들 부르니 오히려 내가 조심스러워 마다하게 되었다.
동두천 태생 조군은 이장희 노래가 주특기였다. 특히 그의 한 여자에 대한 일념(순정)은 독하고 독하고 지독했다. 짜식, 그렇게도 여자가 없나.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연상의 선배를 따라다니더니만(서로 죽어라 하고 좋아하더니) 기어이 결혼까지 하고 만다. 그의 아내 영민 씨는 완전히 준準국문과 학생이었다. 그가 숟가락 몇을 한꺼번에 들고 손바닥에 부딪쳐가며 ‘어둔 밤 쓸쓸히 창가에 앉아~, 그건 너!’를 열창하면 꽤나 쓸쓸하고 멋져 보였다. 25년이 지난 지금 (끔찍해라)도 그 폼은 하나도 다르지 않다. 수년 전, 강화섬에 가서 우리 모임이 일박할 때 그가 들려준 <그건 너> 역시 예의 감동 그대로였다. 하마터면 나는 눈물이 맺힐 뻔했다. 어떤 날은 징징짜며 학생회관 건물을 오르는 '정'이라는 후배를 만났는데, 놈은 몸을 세우지 못할 정도로 잔뜩 취해 있었다. '형! 형! 나, 실연했어, 실연!' 엉엉 빗물(김추자의 <봄비>가 유행했다) 묻은 얼굴을 내 가슴에 묻고 펑펑 울던 모습이 바로 우리들의 지순한 순정이며 열정이었다. (어. 그런데 머릴 박박 밀고 온 것이다.) 처연, 추억, 눈물, 아픔, 어울림. 사랑.
…그리움. 아아, 70년대는 정말 갔을까. 내 마음에서 아직도 흥건한 그해 그 시절이 그리운 사람들-지금은 거의 등단한 시인 이명주·최순열 선배, 소설에 이상문·이원규 형, 똘순이 나영옥·박남준, 그들…. 시인 나혁채(오래 전에 시집 세 권을 한꺼번에 펴내서 깜짝 놀랐지). 김창범 형, 별호가 '성즈믄'인 평론가 강성천 형, 그리고 류마티스로 무척 고생했던 시인 바서주(방석준) 형, 항상 조용했던 수필가 이옥자, 시인 마숙현·장현숙 캠퍼스 커플, 후배 유한근·정조채·손병국 학형들도 그립기만 하다.
(중략)
3.
(중략)
당시, 대한극장 옆 '황우루 사무실'을 <블루진>에게 소개받고 잠시 비상근으로 다니고 있을 때였다. 대형 녹음기에 걸어 곡을 들려주더니 작사를 해달라는 것이었다. 일종의 번안이었다. 독일 노래였는데 참 괜찮았다. 차분하면서 잔잔했다. 나는 신나서 노랫말을 만들었다. 제목은 확실치 않지만 <두 개의 작은 별> 그것이었다. 가사를 조금 바꿀 수도 있고 분명치는 않지만 하여튼 그 가사가 어떻게 해서 윤형주 노래가 됐는지는 지금 와서 논하고 싶지 않다. '저 별은 나의 별 저 별은 너의 별… 슬픔만 남아요'. 당시 낙서용으로 끄적이던 공책을 나는 아직도 갖고 있다.
다만, 황씨는 새파란 대학교 1년생인 나에게 단 한 번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나는 그에게 아르바이트 비용을 받은 적도 없다. 처음의 구두계약은 그게 아니었는데 나는 겉모습인 친구나 작곡가 가수도 인기도 헛것이고 거품이라는 걸 정말 일찍이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쪽에서 일절 손을 씻는다. 그러나 그런 사회를 알려준 그들 모두에게 고맙다. 지금도 그때의 씁쓸함은 미움 없이 가슴에 남아 있다. (왜? 술과 밥과 책이 절실히 고팠으므로 동료들에게 한번 멋지게 밥 사고 술 사마 했는데. 그렇게 약속하고 했는데)
나. 나는 시를 써야 한다! 후회하며 이렇게 굳게 다짐하고 다짐한다.
(중략)
4.
그때 내가 처음 뵌 미당에 대한 인상은, 고교생으로 전국 백일장 대회 때 만난 김남조 시인에 대한 설레임 이상이었다. 나는 그분에게서 응큼한 어느 여왕 탐애기(?)도 들었고 이상과의 교류도 엿들었다. '달달박박이와 노힐부득이'를 통해 삼국유사에 관심을 가진 것도 이때였다. 내게는 미당 선생이 <정철 시가>에 나오는 틀림없는 주선酒仙이었다. 당신께서는 한잔 술로 발그레진 낯빛이셨다. 어쩌면 음淫스럽게도 보이기도 했던 그분. 그런데 그 깊고 오묘한 눈빛이라니! 과제로 내준 시창작 시간에 나는 <술>이란 제목의 작품을 냈다가 딱지를 맞았다. “자네가 무슨 술을 안다고!”가 당신의 한마디 변辯이었다.
술탕에 빠진 고전소설 담당 김기동 교수님을 배알한 것도 그 당시였다. 그분은 제자들과 술내기를 하셨다. 결코 지지 않았다. 양동이째 들이마셨다. 우리는 설레는 가슴과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정말 경이로운 체험이었다. 결국 그분은 나중에 술로 돌아가셨지만 선배들 틈에 끼어 도강하던 양주동 박사의 강의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말 그대로 동서東西를 넘나들고 시는 동서양 막론하고 백여 편을 암송, 낭독하셨다. 괴물이셨다. 침의 파편도 대단했다. 강단은 삐걱이는 발소리로 정신없었다. 교외 도강파도 언뜻언뜻 눈에 띄었다. 2학년 때 나는 어느 교수님께 술 주정하는 복학생 아무개 선배를 향해 양동이를 들고 정의감(?)으로 후려치려다가 도리어 워커발로 흠씬 맞았다. 그때 코피를 흘린 탓으로 여러 여학생들의 간호를 받던 추억은 황홀한 그리움으로 남는다. 그 사건으로 내 별명이 격에 맞지 않는 '깡패'가 된 것.
석전 이병주 선생님과 이동림 선생님 또한 잊을 수 없다. 당신 자신을 '돌밭'이라고 소개하신 '석전石田' 선생은 우리들에게 '동국인'과 '국문학도'라는 자부심을 가지라시며 이를 늘 주지시켜 주신 분이다. 강의는 엄하고 명료했는데, 내가 재학생(복학생 시절) 때 등단하자, 정신 차릴 틈도 없이 당신의 학점을 'A'를 주신 것. 기말고사를 치르는데, 갑자기 ‘강태군. 시험 볼 필요 없으니 나가보게.’ 하시는 게 아닌가. 당신의 말씀, 등단하면 사법고시를 패스한 것과 같다는 지론을 펴시며 나는 동료들의 부러움과 열띤 환호에 섞여 보무도 당당하게 나가는 영예를 누렸다(실은 시험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했으니 어쩌랴!) 이미 미당 선생께서도 당신의 3학점 과목에 A학점을 주신 터였다.
(중략)
이분께는 또 씻지 못할 창피한 일화가 있다.(이걸 꼭 밝혀야 하나) 우연히 김갑기 선배, 지금은 고인이 된 김종구 형, 극작가 김원석 형 등과 야유회를 다녀오다가 선생님 댁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문제가 하나 생겼다. 까만 빽 하나로 돌아다니던 내가 양말을 제대로 갈아 신었을 리는 전혀 없는 일. 그것이 문제의 발단이 되었다.-까만 구두 속에서 며칠을 보낸 양말 냄새는 맡아본 사람만이 안다. 그것 때문에 굳이 안 간다고 할 수도 없고 해서 그저 선배들께 파묻혀 댁을 방문한 것까진 좋았는데, 인사만 드리고 가자던 선배들이 선생님의 손뿌리를 마다지 못하고 그냥 당신의 서재로 들어가는 게 아닌가. 이거 참, 크나큰 낭패였다. 나만 문 밖에서 옹그려 앉았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도망나올 수도 없고 할 수 없이 나는 개 모가지 끌리듯 당신의 서재로 빨려들어가고 말았다. (신이여.)내 발 냄새는 나만이 안다. 모두들 의자에 앉았는데, 하필이면 또 발이 다 노출되도록 의자가 준비됐다니. 반가부좌(양반다리) 하면 양 발을 정강이에 껴둘 수나 있는데 1분도 안 가서 진동, 진동, 경천동지驚天動地할 내음! 내음! 나는 선생님 말씀을 하나도 들을 수 없었고, 자꾸 내 발끝으로만 시선이 꽂혔다. 5분쯤 지나자 아니나 다를까, 선배들도 큼큼대기 시작했다. 두리번거리는 선배, 제 발을 애꿎게 바라보는 선배, 발을 억지로 꼬는 선배 등, 정말 갖가지 모습들이었다. 사모님께서 차를 가지고 오셨다가 심상찮음을 눈치 채시고 곧 선풍기 두어 대를 준비하셨지만 그 와중에서도 선생님은 아무 표정도 안 지으시고 계속 말씀하셨다. 그 인내심과 어진 마음이시라니. 돌아오면서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지만, 선배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어이 참 꼬랑내 대단하더군. 누구야? 악성 족취足臭의 장본인은-죄스러워서 혼났어. 투덜투덜. 나는 후배라는 명목으로 저만큼 떨어져 걸었다. 다소 미안해서 고개는 조금 숙였다.
다소곳한 모습으로 20년도 훨씬 넘어서 고백합니다요. 선배님들. 그래도 그땐 무더운 여름 아니겠수? 우리 다 공범 아니우? 제가 특히 심했지…..
(중략)
5.
나를 유혹한 것이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죽음 유혹, 또 하나는 시 쓰기였다. 내가 자살을 감히 생각했으랴마는, 그때 친구의 빈번한(!) '생의 마감'은 내게 큰 고통을 주었다. 아픔(지병)으로 사고로 울분으로 음독으로… 연애 실패와 생활고, 그리고 삶에 회의를 품고 자살한 학교 선배가 있었다. 그는 유미주의자였다. 타 대학 불문학과에 적을 두고 당시 유행하던 음악감상실의 DJ를 겸하고 있었다. 유명한 디스크 쟈키였다. 나만 들어가면 어두컴컴한 '뮤직 박스' 안에서도 그는 좌석에 푹 고꾸라진 나를 위해 <Yester-me, yester-you, yester-day>, <Holiday>, <Epitaph>, <Stairway to Heaven>·양희은의 <내 님의 사랑은> 등의 멋진 곡을 계속 틀어주었다.
지금 밝히지만 내가 고3 때도 불러내어 술을 사주곤 했던 고마운 서러운 선배였다. '설희'라는 미치광이 여인을 주제로 소설을 쓴 적도 있었지. 아버지도 시인이었던 그가, 도원동 33번지 자취방에서 술 마시고 약 먹은 뒤, 자기 넥타이로 목을 매어 자살한 것이다. 그런데 그의 마지막 남김말이 우리들 가슴을 쳤다. 미안하지만, 대단히 멋진 종언終言이었다. 우리는 그의 죽음보다도 그쪽지 문구를 훔쳐보며 얘깃거리로 삼았다. 친구 하나는 죽음의 미학에 대해 줄곧 생각하게 되었다. 별 것 아니었다. 금방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어느 시인이 자살할 때 먹었다는 '페노발비탈'을 약국에서 찾는 해프닝도 벌였다. 한두 번 맛(?)도 모르는 대마초라는 이상한 담배를 태울 때는 적어도 우리들에게는 죽음이란 것이 가까이, 또는 몸에 묻어 있었다. 송도 청량산에 뼈를 뿌렸기 때문에 소주만 먹으면 그쪽으로 달려가 <Don't forget to remember>를 부르며 걱걱, 꺼이꺼이 울었다. 가사 속의 'my love'를 'my friend'로 부르며 신포동의 <짐 다방>, 답동 육교의 <커피 코너>. 쇼스타코비치도 <명태>도 라흐마니노프도 이때 알았다. 참.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의 <얼굴>이란 노래도 지금도 나는 가끔 이들 노래가 나올 때마다 가사를 바꿔 부른다. 함께 부르던 동네 선배 곤재이 형, 수철이 형은 어디 있는가.
그리고 시인 아비의 죽음. 누이의 반半실성…. 우리는 아직도 인천 시인 최병구를 기억한다. 그의 아들 대혁을 그리워한다.
6.
그때만 해도 우리는 겁없게도 한 학기에 둘 이상의 창작집을 만들었다. 지금 충무로에서 출판업을 크게 하는 조석규 등, 우리가 만든 창작집 <말>의 제호를 당시 서예의 큰 사람인 배길기 교수님께 겁없이 무작정 받아내기도 했다. 학년을 통합, 동인을 만들어 문집을 제작하는 패거리도 있었다. 그리곤 곧 선배들에 의해 '합평회' 소식이 열려지고 1학년은 거의 의무적으로 참여한 것이다. 오라면 가야 했다. 나중에 줘터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실제로 건방지다고 신나게 터진 친구도 있었다.
그러면 으레 그 자리에 4학년 고참 형들에 의해 초청 받은 선배 문인들 몇이 합석을 했다. 단골 손님이 박제천·홍신선·문정희 시인들이었다고 기억한다. 그들은 눈을 반쯤 뜬 채 한참 말이 없다가 합평회가 끝날 때쯤, 한 마디를 던진다. 그저 자리에서 술만 마시며 구부정 앉아 있던 박 시인의 촌철살인격인 한 마디, 홍 시인의 어눌한 몇 마디 말, 문 시인의 톡톡 튀는 씽씽한 직격탄… 그러면 우리는 황송한 듯 '옥같은 말씀'을 부끄러이 기록한다. (그 신성한 말씀을 술자리에서 후배 누군가가 'X같은 말씀'이라고 했다가 깡패같은 3학년 선배에게 늑신 얻어터졌다. 맞아도 싸지. 어디서 감히….)
끝나면 동료들이 몇 양동이의 막걸리를 길어왔다. 잔은 바가지거나 대형 양푼 안주라곤 달랑, 김치, 혹은 괜찮은 날은 두부가 거룩하게(?) 흐여멀거니 얹혀 있었다. 그 시간은 ‘내 작품에 대해 그 따위로 평가해도 좋으냐!’고 막 대들어도 용서해 주었다. 그런데 우리가 한갓지게 조용해도 '이 자식들, 패기도 없어!'라며 선배들이 패고, 우리가 너무 말이 많아도 '건방지다'고 두들겼다. 후배는 단지 종從(노비奴婢)였다. 술에 취해 충무로에서 뒹굴고 지금의 교수 식당이 있는 캠퍼스 광고판 밑에서 싸움박질하다가 이슬 맞고 쓰러져 자기도 한다. 물론 술값·밥값·여인숙값은 철저히 선배들 몫이었다.
엄청난 장발족인 나는 가끔 퇴계로 4가 파출소에 잡혀 선배들에게 SOS를 치곤 했다. 그러다가 우리들 몇은 방범대원과 친해져 통금 시간만 되면 미리 그 앞에서 얼찐거리곤 했다. 그 방범원 말이 우습다. '12시 되기 전엔 안되야!' 그러니까 막 사이렌이 불 때 정확하게 파출소 안으로 뛰어들어와야 한다. 그러면 법적으로 안 걸리는 셈이 된다. 언젠가의 파출소 구호가 '무엇을 도와드릴까요?'였던가. 우리는 잘 자리가 없으면 최종적으로 캠퍼스로 기어들거나 인근 파출소로 난입했다. 그리고 새벽 4시가 되기 전에 쫓겨난다. 4시면 '똥차'(잡범들을 경찰서로 끌어모아가는 차)에 쓰레받이 당할지도 모른다 해서 그런가하면 데모도 열심히 했다. 나갔다 하면 국문학과가 최선봉이었다. 부상이나 사진 찍히기의 대상은 우리들 중의 누군가였다. 주제는 '교련 반대' 등이라고 기억한다.
7.
꽃향기 아래서 소설을 쓰고 싶다던 교지 편집장 이운원 형, 극본 쓰는 원석이 형, 동화작가 정채봉 형 등이 바로 술값을 전문으로 대던 이들이었던가. 아침이면 학생회관으로 오르는 길목 계단에서 눈을 반쯤 뜬 친구들이 국문과 여학생을 향해 '처녀(비구니) 스님, 시주하소!'를 외쳐댄다. 강의가 없는 어느 여학생은 한심한 우리를 이끌고 아예 후문 밑의 <아줌마집>으로 데려가 우리 볼을 씻겨주고 라면을 끓여먹인다. 그러다가 또 막걸리 타령이 되면서 그날 강의는 땡. 한 시간 강의가 끝날 때마다 선후배들이 가슴을 움켜쥐고 드나들고 우리의 주연酒宴 일과는 다시 시작되고 그야말로 찬란한 밤. 그러나 명동은 아슬멀었다. 현찰이 없어 호프 한 잔 먹기가 힘들었다. 이때 내가 결심. 작심한 바가 있었다. 졸업하고 나서는 나의 후배들에게 꼭 갚으리라고 나는 한동안 국문과를 떨어져 있었지만, 오래 전부터 '신입생 백일장 대회'와 '문예창작 교실', 그리고 '동문·재학생 가을 체육대회'에 사전의 다짐대로 반드시 참가해오고 있다. 그건 나의 마지막 자존심.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없이 그냥 참가하고 어울리면 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우스개처럼 후배들에게 말한다. '너희들이 작성해주는 명찰을 받기 위해 온다'고 (실제로 내 방 서랍에는 각양각색의 행사용 <명찰>들이 쌓여 있다.) 다행히도 매년마다 만나는 자랑스러운 후배들이 있어 진정 그들이 고맙고 고맙다. 늘 오는 캠퍼스 커플(국문과)들도 있다. 우선은 후배들을 국문학과 귀신으로 만드는 것이다. 누가 뭐래도 난 국문학과 동문 선배니까.
한 가지 안쓰러운 것은 우리들로도 술의 행각은 충분한데 좀스럽게 후배들에게 여전히 대물림을 한 점이다. 특히 쌍칠(77) 학번들에게 미안하다.
이 글을 빌어 공식적으로 사과한다. 78학번 아우들에게도 너희들이 마신 술이 분명히 동악의 '사색의 길'을 쿵쿵, 굳건히 다졌으리.
개중에서 빠뜨릴 수 없는 과정은 역시 문학에 대한 거침없는 열변이었다. 그때는 문학이 나(우리)를 밥 먹여 주었다(!). 사실이었다. 앞에서도 비쳤지만 나의 단골 메뉴는 김수영과 가스통 바슐라르 상식 정도의 읽기로 시작한 그들은 나의 복학 때까지 첫 화두나 상습적인 메뉴로 이어진다. 지금도 자주 그들에 대한 추억담을 꺼내는 이들이 평론하는 아우 장영우·송희복·시인 윤제림 등이다. 훨씬 뒤의 일로 오늘의 시인 윤제림은 내가 복학하는 과정에서 만났지만, 고맙게도 언젠가 <아줌마집> 내 술값을 대신 갚아준 일화가 있다. 그 웬수를 내사 언제 갚노. 그동안의 물가고나 인플레를 적용하면 큰돈이 되는데 어쩐담.
글을 맺으며 후배들에게 한 가지 부탁이 있다. 마음속에 꼭 기억하시라. 동문의 이름으로 어줍잖게 아래 사항을 밝힌다.
① 매년 입학하는 신입생을 찾고 동기별로 단체로 한 번씩 술 사주자.
② 시간 있으면 4월경(식목일 부근?)의 <신입생 백일장 대회>에 참석하자. 소풍(원족)이다. 동문 선후배며 아무나 참여해도 되는 모임이다.
③ MT도 참여하자. 여의치 않으면 주머니를 털어 조금씩 경비를 보태자.
④ 1년에 한번 실시하는 <동문·재학생 체육대회>에 꼭 참가하자. 동기별로 차례로 주관하는 방법도 효율적이다. 상당히 기분 좋다. 밤새워 후배들과 마음을 나누는 자리다. 술값을 조금만 보태면 된다. 그리운 얼굴들이 많이 등장한다.
⑤ 매년 6월 말경에 <창작 교실>이 실시된다. 문인이 아니어도 괜찮다. 선후배들의 축제이므로 며칠 묵어가며 후배들과 대화하면 된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하고 교수실 등으로 질문하라. 절대로 큰 부담 안 준다. 당신 몸만 와주면 되는 것이다. 그것도 안 된다? (너무해요. 선후배님)
⑥ 1년에 딱 한번 교수님의 안부를 여쭙자. 동기별로 은사님을 모시는 자리도 고려해 볼 만하다.
⑦ 국문학과 동문의 애경사를 기억하자. 그리고 한 번쯤 확인 전화를 나누자…
⑧ 내 인적 사항(주소)을 꼭 국문학과(또는 한국문학연구소: ☏260-3501)에 알리자.
그리고 나는 어느 가을에 논산 훈련병으로 광주와 화천 7사단으로 끌려간다. 군번 '팔넷공둘넷팔하나공(84024810).‘ 주특기 포반장. (국문과 출신이 105미리 포대의 반장이라니.) 챠리 포대, 육군하사 김 하사. 논산훈련소에서 날짜 없는 장정으로 무려 40여일 동안 개기다가(?) 끌려간 곳이 하사관 학교였다. 밤에 하사관 학교 교정에 내렸을 때, 우리를 맞이한 내무반장(선임하사) 하나가 이렇게 말했다. 아찔했다.
'이 곳은 인간 제조창이닷! 지금부터 완전 군장으로 내무반까지 낮은 포복한다. 알았나?' 그새 몇 놈이 놈의 워커발에 맞아 나가떨어진 뒤였다. 정신이 퍼뜩 났다. 이제 시작이구나. 아아, 나의 70년대 초반이여. 영원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