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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학통의 정체성 모색기 / 유한근(79졸)

등록일 2026-10-05 작성자 학과 관리자 조회 93

70년대, 학통의 정체성 모색기

유한근(79졸, 명지전문대 문창과 교수, 문학평론가)

 

1970년대는 우리 사회가 산업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역사 발전의 파행적인 진행을 경험해야 했던 시대였다. 그뿐만 아니라 제3공화국의 정치 말기적 징후들로 해서 대학은 물론 사회 전반이 혼란스러웠다. 필자는 72년도 동국대 국어국문학과에 입학, 군 복무 후 1975년에 복학하여 대학원 석사과정을 '87년에 마쳤으니 1970년대를 통틀어 필동 목멱산 동악시단에서 보낸 셈이다.

그 시기에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던 선생님은 고전문학에 이병주·김기동, 국어학에 이동림, 한문학에 이종찬, 현대문학에는 서정주·조연현·홍기삼 선생님이었다. 그리고 명예교수로 양주동 박사께서 계셨다. (이 시기 교과 과목에 따라 국어교육과에 재직하셨던 최세화·김동준·김장호 선생님 등에게도 강의를 받았다.)

이렇게 사계의 권위자들로 짜여진 교수진의 지도를 받으며 그 시기 필자가 고민했던 것은 동국의 문학적 전통과 학통이었다. 국문학의 전통은 양주동 박사에서 찾았으며, 문학 전통은 만해 한용운 시인으로부터 시작되는 한국문학의 전통 그 자체 속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은 고통스럽게 방황했다. 학문적 전통과 문학적 전통이 분명한데도 그 맥에 따라 연구하고 창작하기보다는 그것에 저항하고 혼란스러워 했던 것이다. 교수의 권위 앞에, 그리고 교수들의 학문적인 연계 및 교류가 없는 단절 속에서 학생들의 문예 창작과 문학 연구는 활기를 찾지 못했던 시기가 1970년대였다.

김기동 박사는 고전소설 연구로, 이병주 교수는 두시연구, 이동림 교수는 동국정운 연구로 학계의 주목을 받았고, 서정주·조연현 교수는 한국 문단의 거목이셨지만 학생들에게는 늘 먼 분으로 계셨다. 그래서 학생들은 학생 선·후배들끼리 어울려 다녔고 서로 힘들어했다.

동국의 국문학 전통이 양주동과 한용운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면 불교문학이 학통으로 굳건히 잡혀 나가야 함에도 동국의 국문학은 학통만 운위될 뿐, 그 정체성을 확립하고 있지 못했다. 특히, 문예창작의 경우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선배 문인들은 별처럼 많았지만 학생 내의 학생 창작 풍토는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특히 산문(소설)의 경우는 더욱더 그러했다. 굳이 신춘문예 실적에 연연해 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 시기 변변한 당선자 배출이 없었던 시기였다.

따라서 학생들은 동국문학을 소생케 하기 위해 국문학과 중심으로 1977년 여름방학을 기해 <제1회 문학창작교실>을 속리산 법주사에서 개최했다. 장호(국어교육과) 교수와 홍기삼(국어국문학과) 교수의 지도로 문예창작 실기 워크샵을 시작한 것이다. 이 행사는 상징적 의미가 큰 것으로 생각된다. 그 때는 단순히 고사지경에 이르렀다고 생각한 동국문학을 소생시켜 보자는 생각에서 시작된 학생행사였지만, 돌이켜 보면 그것 이상의 큰 의미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것은 다름 아닌 동국 국문학과의 정체성을 세우기 위한 첫걸음일 수 있었다는 의미에서이다.

앞서 필자는 동국 국문학 전통은 불교문학이어야 한다는 견해를 개진했다. 그것은 우리 동국대 국문학과의 문학적 전통이 한용운과 양주동에 그 뿌리를 박고 있다고 할 때, 신라 가요와 한용운의 시세계, 이 양자의 공통인자가 <불교문학>이기 때문이다. 또 이들은 고전문학의 전통을 현대문학에 연계시키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보여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70년대 동국 국문학의 학통은 고대 고전문학과 현대문학의 학문적인 연계가 유기적 관계를 형성하지는 못했던 듯싶다. 학생이었던 우리들은 불교문학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했다. (지극히 개인적인 회고이지만, 그래서 필자는 당시 승가학과에 재직하셨던 김운학 스님께 부탁하여 '불교문학'이라는 강좌를 한 학기 개설하여 들은 바 있다.)

그뿐만 아니라 소설을 공부하고 싶은 학생을 위한 과목은 형식적인 것이었을 뿐, 실질적인 강의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잠시 외대에 계신 작가 이범선 선생님의 강의를 듣긴 했으나 그것으로 소설창작을 이해하고 실습하는 충분한 양이 되기에는 턱없이 미흡했다. 그래서 홍기삼 교수께 말씀드려 개인 지도를 받아야만 했다.

대학의 학문적 전통은 그 정체성을 찾아 세운 후 그것의 온축으로 이루어진다. 동국대 국문학과가 명문이 되기 위해서는 문인들의 배출 숫자가 있느냐보다는 그 속에서 수학한 사람들이 사회에 나와 어떤 학문정신 또는 문학정신으로 연구하고 창작하는가에 달려 있다. 필자의 경우, 동악에서 배울 수 있었던 것은 딸깍발이 선비정신과 창작에 대한 열정이었다. 이동림 선생님으로부터 양주동의 《고가연구》를 한 학기 동안 10쪽밖에는 배울 수 없었지만, 필자는 그 속에서 학문의 자세, 창의적인 학문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이해할 수 있었고, 이병주 교수의 <두시연구> 강의에서는 학문의 심층연구 방법론을 공부할 수 있었다. 물론 현대문학을 강의하셨던 미당 서정주 선생님의 강의는 학자로서의 강의라기보다는 시인의 강의로서 문학의 향기를 체득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고, 조연현 선생님의 면도칼 같은 비평 자세를 엿볼 수 있었지만 이것을 총체적으로 연계시켜 공부할 수 있는 힘이 없는 학생들에게 '학통'의 진정한 의미와 그 정체성은 전달되지 못했다. 필자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래서 우리는 동국 국문학과의 ’학통'을 말하는 자리에서 교수님 자랑과 많은 수의 문인 자랑밖에는 할 수 없었다.

동국대학교의 세계화를 위한 학교정책에 대해 필자는 알고 있지 못하다. 그러나 이를 생각할 때 국어국문학과의 전통은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세계에 내세울 수 있을까? 그것을 필자는 1970년대 시작했던 <제1회 문학창작교실>에서 찾을 수 있는 상징적 의미로 대신할 수밖에 없다. '불교문학'이 그것이다. 불교수련회도 겸하면서 창작실기 공부를 했던 그해 여름을 참가했던 모든 학생은 기억할 것이다. 어쩜 그 기억 때문에 참가했던 학생들 중 30여명이 문단에 나올 수 있었고 그 행사 전통은 아직도 이어질 수 있었을 것이다.

70년대 학교를 다녔던 국문학과 출신 문인으로는 71학번 김강태·김용옥(이상 시인), 72학번 유한근(평론), 73학번 박주관(시인), 정찬주·고광욱(이상 소설), 75학번 고재석(평론), 76학번 성낙주·윤은숙(필명: 윤재인, 이상 소설), 77학번 윤준호(필명: 윤제림)·남기정(이상 시), 장영우·한만수·송희복(이상 평론), 78학번 정광호·방기홍(이상 시), 박찬두(소설), 79학번 정희성(시), 김갑수(소설), 황종연·박혜경(이상 평론) 등이 있다.

이렇게 70년대에 동악을 오르내리던 문인들이 많은 데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한 색깔, 한 냄새, 한 모습의 문학 전통이 뚜렷하지 못하다. 그것을 우리는 그 시대적 상황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무명無明의 학문적·문학적 암흑기에서 정체성을 찾기 위한 학생들의 노력은 간단없이 지속되었고 그 결과 역시 결코 부끄러운 수준은 아니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편으로 이러한 학생들의 방황을 눈치 채고 정신적·실질적으로 큰 격려와 도움을 마다하지 않으신 존경할 만한 스승님이 계셨던 것도 큰 힘이 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다만 동국대 국어국문학과의 학문적 전통과 문학 창작의 전통을 총체적으로 종합하는 이가 그 후 조직화된 것으로 알고 있지만, 그 때 우리에게는 없었다. 따라서, 필자는 70년대 국문학과의 모습을 <학통의 정체성 모색기>로 본다. 동국 국문학, 학통 및 문학 창작 전통에 대한 정체성 찾기의 시기가 그때였다는 판단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