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국문문예창작학부
Dongguk University
바람처럼 지나간 날들을 돌아보며 / 이정미
바람처럼 지나간 날들을 돌아보며…
이정미(국문 2년)
어른들은 흔히 말씀하신다. '세월이 정말 눈 깜짝할 새에 지나버렸다'고… 지금 나에게 그만큼 절실한 말이 또 있을까.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1학년으로 교문을 들어선 지도 벌써 2년이 가까워온다. 그동안 보고 듣고 생각한 것들을 모아 보면 몇 년 치를 한꺼번에 산 느낌이지만, 나는 작년에 몇 달은 도둑맞은 기분으로 해를 넘겼다. 고작 석 줄을 써내려가는 동안 무수한 기억의 조각들과 수많은 얼굴들이 그새 스치고 지나갔다. 지금 나는 '따뜻하다'는 말을 떠올린다. 가슴도 어느새 훈훈하게 달아 있다. 마음이 따뜻해져 오는 추억이 낙엽 쌓이듯 수북한 우리는 얼마나 운좋은 사람들이던가.
새내기! 처음에는 그렇게 어색하더니, 슬슬 그 말에 정이 들 때쯤 공포의 환영회가 시작되었다. 워낙에 술들을 좋아하는지라 다른 과에서는 한번에 끝내는 일을 굳이 학년별로 치르는 악습(?)은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소주는 냄새도 못 맡아봤던 내게 그 의식은 생각보다 수월하게 지나갔다. 여자라는 점이 무기가 된 걸까. 동기들은 하나둘 쓰러져가건만 억지로 먹지 말라는 선배님의 말씀을 곧이 듣고 나는 시종일관 멀쩡했다. 그러나 회를 거듭할수록 괄목할 만큼 주량은 늘어가고 술잔이 오가는 가운데 허심탄회하게 풀어놓는 선배들의 이야기 보따리에 끌려, 그 후로는 술자리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몹쓸 버릇이 생기고 말았다.
신입생 환영회 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89학번 선배들과의 만남이었다. 무엇보다 나의 1학년 생활의 방향을 잡아주고 영향을 많이 미친 것은 그들이었다. 80년대 마지막 학번이라는 특수성 때문이었을까, 선배들은 다른 학번들과는 사뭇 분위기도 달랐고 여러 면에서 별난 점이 많았다. 첫 대면 때 자못 엄숙하면서도 세상만사에 통달한 표정을 짓고, 국문학과에서 갈고 닦은 달변으로 순진한 새내기의 혼을 쏙 빼놓던 선배들. 새까만 후배를 앞에 놓고 한바탕 쌔드무비란 야한 노래를 불러제끼더니 너 국문과 왜 왔냐고 묻던 선배들. 2학년 새 학기가 시작되고 한 동안 느끼던 허전함을 나는 선배들의 졸업 때문이라고 결론지었다. 명진관 계단을 1년 넘어 밟아온 지금, 이제는 선배들의 과장, 다소의 허풍쯤은 가려내게 되었다. 하지만 대학이라는 곳은 밥숟가락을 떠넣어 주는 곳이 아니니 이것저것 스스로 찾아다니고 용감하게 뭐든지 부딪쳐보라던 선배들의 말은 내게 큰 지침이 되었고 내가 선배가 되어 처음 96학번 새내기들을 맞던 날 자신있게, 그리고 진심으로 해주었던 말도 그것이었다.
그 후 나는 목표한 대로 1년 동안 이것저것 참 많이도 쫓아다녔다. 처음 <동국대 국문과로 오는 길>이라는 학과 홍보책자를 보고 벅차했던 분과들. 소모임들을 찾아다니랴 동아리도 들어보랴 소설분과, 시분과, 희곡분과, 고전분과, 국어학분과, 문학이론분과, 풍물패, 노래패, 광인(광고모임), 문화부, 사회부, 선전부 등등. 1학년에게는 모든 문이 열려 있었다. 들고나는 모든 것들이 다 자유로웠고 차츰 시간이 지나자 동기들은 보다 적성에 맞고 관심있는 분야를 선택해 나가게 되었다. 이렇게 1학년 때 나의 일주일은 할 일들로 꽉 차버려, 늘 한밤중에 집에 가곤 했다. 이때는 학과 수업보다도 수업 후의 시간들이 기다려졌던 것 같다. 하지만 2학년이 되어 전공수업이 많아지고 더 깊이 들어가면서는 국문학에 대한 학문적 재미도 간간이 느끼게 된다. 특히 고등학교 때 편협되게 배웠던 단순한 시각을 넓혀 나갈 때면, 배울 것이 참 많다는 생각을 한다. 문학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느끼게끔 이루어지는 수업들이 새롭고 좋다.
새내기라는 말이 시들해지고 방학이 되어 바쁘게만 돌아가던 일주일이 한가하게 느껴질 때쯤 나는 선배들과 농촌활동을 떠났다. 고등학교 때부터 늘 가고 싶어했던 농촌활동은 기대만큼 얻은 것도 많고 기억에도 남는다. 내가 농촌활동을 갔던 충북 제천시에 있는 하천리는 몇 년 동안 우리 과가 계속 들어갔던 곳이라, 마을 어른들은 오랜만에 보는 조카들 대하듯 반가와 하셨다. 신기하게도 봄농활 때 심었던 깨가 여름에 가니 어느새 다 자라 있었다. 그런가 하면 봄에 비닐을 씌우느라 고생했던 너른 밭에는 고추가 심어져 있고 여름에는 키만 한 잡초를 뽑느라 하루해가 다 갔다. 땡볕에서 일하다 보면 아저씨들이 1.5ℓ짜리 소주인 금복주를 수시로 권하신다. 사양을 못하고 그 독한 술을 다 받아마시던 남자 선배들은 그야말로 술김에, 끝이 없는 밭고랑을 후딱후딱 갈아엎곤 했다.
농활을 다녀온 후 우리는 금복주와 새참 이야기를 많이 했다. 시골분들이라 밥을 꽉꽉 눌러 한 사발 그득히 주시는 데다 워낙에 아침 먹고 참 먹고, 점심 먹고 참 먹고, 저녁 먹고 참 먹고 하루 종일 먹어대는 통에, 우리는 오히려 살이 올라 상경하곤 했다. 땡볕에서 비지땀을 흘리다 점심을 한 술 뜨고 잠시 맛보던, 굴다리 밑 그늘의 낮잠처럼 달콤한 것이 또 있을까. 남은 힘들어 죽겠는데 자꾸만 노래하라고 시키고는 이어서 받아 부르시던 아저씨의 구성진 뽕짝 메들리도 아련히 남아있다. 무엇보다도 트럭 뒤에 타고 마을로 들어가는 비포장 도로 위를 달릴 때, 하늘이 좁아라 다닥다닥 붙어 있던 그 많은 별들을 나는 잊지 못하겠다.
여름방학 때 있었던 또 한 가지 행사가 창작교실이었다. 우리 과科라는 소속감과 자부심을 한껏 느낄 수 있었던 때는 뭐니뭐니해도 창작교실을 가서였다. 95년도에는 보광사로, 96년에는 산정호수로 갔었는데, 두 번 다 나름대로 기억에 남는다. 조용한 절, 만세루에서 간간이 불어오는 산들바람을 맞으며 매미소리에 둘러싸여 합평을 하노라면, 저절로 문학적 향기에 흠뻑 취해 모두들 진지해지곤 했다. 처음 소설 합평을 받던 은미가 결국 울어버렸던 기억이 난다. 쟁쟁한 선배들의 냉혹한(?) 평을 견디지 못했던 것이다. 많은 동기, 선배들이 정성들여 내놓은 작품을 평가받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쓴 눈물을 삼키며, 밤을 기다려 술을 폈다. 그날의 주인공들은 뒷풀이 시간이면 술잔을 들고 합평 시간의 '그 선배님' 곁에 일찌감치 자리를 잡곤 했다. '뒷풀이'라는 말이 그렇게 적절할 수 없었다. 소설이며 시며 졸업한 선배님들의 옛날 이야기며, 그렇게 한잔 두잔 기울이다 보면 어느덧 동이 트고 있었다. 합평 시간이든 그 외 시간이든 워낙 얻는 것이 많은 행사였다.
며칠째던가. 어느 날은 새벽녘에 들어와 잠깐 눈을 붙이고 아침에 일어났는데 여기저기 어수선한 데다 술렁술렁한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이를 어째. 우리의 숫총각 철용이가 곤드레만드레가 되어 찾아 들어간 곳이 동네 과부댁이라는 것이다. "학생 하나 여기 있다우." 아침 일찍 전화까지 해주신 맘 좋은 아주머니, 얼마나 놀라셨을까. 절에서 술을 마실 수 없어 뒷풀이 장소가 캄캄한 밤길을 한참 더듬어 내려가야 하는 곳이긴 했지만, 방향을 잘못 잡아도 한참 잘못 잡았던 것이다. "분명히 절이었는데…" 기억에 없다는 것을 어찌하리오. 덕분에 그는 실컷 놀림을 받았는데, 집에 가는 그날까지 아니 그 후로도 오랫동안 하필 '과부댁'에 침입했었다는 것 때문에 사람들은 그 사실을 잊지도 않았다.
이리 말했듯이 마음 여린 우리의 은미는 졸지에 '보광사 그 여인'으로 또한 길이 남았는데 이는 은미를 대표로 한 몇몇 여성동지들의 끈질긴 투쟁을 기리는 이름이라 하겠다. 어느 날 뒷풀이 자리가 무르익어 갈 무렵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한번씩 다 돌아가며 불렀겠다 싶을 즈음 우리는 뭔지 모를 허전함을 느끼고 곧 그 원인을 찾기 시작했다. 오래지 않아 우리의 레이다망에 포착된 것은 다름아닌 이종대 선생님. "선생님 노래 불러 주세요." 미인계를 동원한 우리의 정예대원들이 처음에는 애교로 나중에는 오기로 졸라대는 동안 날은 훤히 새오고... 부끄럽게도 우리는 목적달성에 실패한 채 자진철수했다.
비록 선생님의 노래는 끝내 들을 수 없었지만, 그러나 역시 국문학과와 노래는 오묘한 상관관계가 있는 듯하다. 1학년 내내 학회실을 들락거릴 때마다 노래가 끊일 날이 없었다. 명진가든에서 밥을 먹다가 허공을 가르고 들려오는 노랫소리에 우리는 젓가락을 들다 말고 키득거리기 일쑤다. "90학번 누구다. 그치?" 물론 학회실을 주무대로 이용하는 고정파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모두들 마이크만 쥐어주면 날개를 달고 신이 날 사람들이다. 부르기도 가수 뺨치게 잘 부른다.
96학년 창작교실에서 이러한 '끼'는 선배들로부터 꾸준히 이어져왔음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특히나 문학 장르에 따라 한 곡을 다르게 소화하는 선배님들의 능력에 나는 그저 존경스러울 따름이었다. 원래 '명태'는 김강태 선배님의 18번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우리 과의 애창곡이었다. 먼저 성낙주 선배님이 걸걸하고 시원스럽게 다소 무게가 느껴지는 목소리로 '명태'를 부르셨다. 그러자 시를 쓰는 윤제림 선배님이 벌떡 일어나 "소설가가 부르는 '명태'를 들었으니 이번에는 시 쓰는 사람 '명태'를 들어보쇼" 하며 또 부르시는 게 아닌가. 그런데 우리가 무릎을 탁 치며 웃을 수 없었던 것은 워낙에 그 차이점으로 시·소설의 특성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윤제림 선배의 한껏 기교를 살리면서도 한 소절 한 소절, 여자들 애 낳듯 힘들여 내뱉는 모습에 덩달아 인상을 찌푸렸다 웃었다하며 우리는 충분히 공감했다. 노래가 끝나고 멋모르는 재학생들이 너나없이 감탄의 박수를 쳐대는 바람에 "늬들은 누구 편이냐!"며 잠시 시·소설 편가르기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쯤이면 나름대로 노래에 대한 철학을 지녔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동국대 국어국문학과에 들어온 새내기라면 첫 여름방학의 가장 기념할 일은 설악산 등반일 것이다. 이병주 선생님께서 '일람중소산一覽衆山小'을 내거시고 추진하셨다는 설악산 등반, 비오는 날만 출석을 부르시는 낭만파 선생님, 여학생들을 '샥시'라 부르시던 선생님. 과거 어느 핸가 그 샥시들이 남학생들보다 많이 들어왔다고 국문학과 부흥을 위해 고사를 지내셨다던 선생님. 특히 95학번은 유난히 여학생이 많은 관계로 학기가 시작되기 전부터 과연 그 전설이 재현될 것인가에 선후배 할 것 없이 초점이 모아졌었다. 그러나 선생님의 첫인상은 상상했던 것과는 달리 단아하고 손자들에게 하시듯 금방이라도 사탕을 집어주실 것같이 친근한 느낌이었다.
다시 설악산 이야기로 돌아오자. 워낙 환영회 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온 터라 '산타기'라면 질색하던 나도 설악산만큼은 꼭 넘어야겠다 싶었다. 어떤 선배는 설악산 등반 준비 체력단련으로 줄넘기를 했다고 하던데, 나는 일단 주변의 산을 차례로 정복해 갔다. 수락산·도봉산·북한산. 이런 연습 덕분인지 잡아주고 끌어주던 선배들 덕택인지 중도 포기 등의 오점도 남기지 않고 나로서는 큰일을 해냈다. 우여곡절 끝에 우리는 무사히 소청산장에 도착했다. 소청산장에서 짐을 풀 때만 해도 금방 비가 쏟아질 것 같았다. 사람들은 오른 김에 대청봉까지 가자는 파와 다음날 아침 일찍 가자는 파로 갈렸는데, 날씨 때문에 망설이고 있던 참이었다.
그때 묵묵히 계시던 서태룡 선생님께서 채비를 하시는 게 아닌가. 우리는 용기를 얻어 후들거리는 다리를 애써 진정시키고 길을 나섰다. 중청봉쯤 왔을까 드디어 비는 내리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이왕 뽑은 칼을 도로 넣을 수는 없는 일. 이래저래 비까지 오자, 내 몸은 본색을 드러내 뒤처지기 시작했다. 일행은 안 보이고 비 때문에 미끄러운 데다 뿌옇게 물안개에 가려진 아래쪽은 땅인지 공중인지 구분이 안 가 더럭 겁이 났다. 나는 그날 죽을 뻔했다. 더 부지런히 오르던 우리들은 1700M의 산꼭대기에서 강풍 때문에 45°로 내리꽂히는 비수를 맞으며 결국 대청봉을 밟았다. 빗소리에 뒤질세라 우렁차게 과가를 부르고 서로를 챙겨보던 우리들. "어! 선생님 어디 가셨지?" "아까부터 안 보이시던데." 날씨까지 어두워지고 있어 내려오는 길은 더 위험했다. 소청산장의 불빛이 어찌나 반갑던지. 그나저나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방문을 열자 아, 선생님, 선생님은 거기 계셨다. 중청봉에서 묵묵히 되돌아오신 것이다.
창작교실 말고도 선배님들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기회가 가을쯤 한번 더 있다. 동문 체육대회. 이날은 '우리'라는 것만으로도 더할 나위 없이 풍성해지고 뿌듯한 날이다. 내 경우에는 당일날도 남긴 하지만 유난히 분주하고 할 일이 많았던 준비기간이 더 기억에 남는다. 선배님들을 한 분이라도 더 모시고자 만든 엽서에 인쇄자는 인간미가 없다고 정 많은 국문인답게 '선배님. 저 보러 꼭 오세요!' 한 줄이라도 직접 써서 보내던 일. 바닥 안내문을 붙이며 '숨차시죠? 쬐끔만 더 오세요. 이쁜 후배들이 목빠지게 기다립니다' 등등 눈에 띌 말들을 만들던 일. 온 명진관에 기름 냄새를 풍겨가며 안주로 쓸 빈대떡을 부치던 일. 냄새 맡고 달려온 선배, 후배들에게 선심쓰듯 뚝 떼어 맛뵈던 일. 지치고 힘든 일도 많았던 것 같은데 이상하다. 지나고 나면 좋은 기억들만 걸러지는 것 같다.
지금까지 써 내려온 것들보다도 순간순간 더 좋은 일들이 많았지만, 우선 문득 떠오르는 기억들만을 펼쳐 놓았다. 문득 떠올랐다는 것이 가장 내 마음 속 깊이 파고들어 있다는 증거라면 지금 짤막하게나마 써 내려간 이 일화들은 다른 이들에게도 기억되어 있는 따뜻함일 거라 믿는다. 부디 나와 같은 경험을 했던 이들이 내 기억들을 엿보며 옛일을 떠올리고 빙그레 미소지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때 그런 일이 있었지' 하며 가슴이 따뜻해져 온다면 더욱 좋겠다.
이미 졸업을 하신 수많은 선배님들께서는 새까만 후배가 동악의 뜰에서 어떻게들 살아가고 있는지 부분이나마 살피신 걸로 만족하신다면, 또한 더할 나위 없이 기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