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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대 국문과 시절 / 유현목(49졸)

등록일 2026-10-06 작성자 학과 관리자 조회 69

동국대 국문과 시절

유현목(49 전문부 문과졸, 영화감독)

 

엑스트라 지원서

해방된 서울은 우리말을 되찾은 연극들이 좌우로 갈려 불을 뿜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념과는 관계없이 빼놓지 않고 보았을 뿐만 아니라, 그 연습장 한 구석에서 하루종일 지켜보는 것이 그지없이 즐거웠다.

해방 이듬해, 희곡공부를 위해 동국대 국문과에 입학했다. 아무래도 극작가가 제격인 듯싶었다. 해방의 물결은 굶주렸던 프랑스․미국 등지의 영화들이 밀려들면서 온통 명작임을 과시했고 내게는 감동의 연속이었다. 더욱이 프랑스의 피에르 슈날 감독의 <죄와 벌>은 나를 한껏 얽어 매었다. 거듭해서 열네 번이나 미친 듯이 보았는데, 마지막 열네 번째는 학질에 걸려 사십도에 가까운 몸으로 친구의 부축을 받아가면서도 놓치지 않고 볼 만큼 나를 매료시켰다.

시베리아의 삭풍처럼 스산한 중학교 겨울방학 때, 도스토예프스키의 이 소설을 읽고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의 어두운 색깔을 좋아했다. 온통 회색의 영화는 바로 그 색조였다. 그리고 그 언어매체가 지니지 못하는 이 영상의 세계는 나를 압도하고도 남았다.

지체없이 시나리오 작가 지망생으로 전환했다. 여름방학 때 국립도서관에서 시나리오 강좌가 처음으로 열렸다. 오영진․최금동․백철 선생 등이 강좌를 맡고 있었다. 시나리오 작가는 촬영현장 체험이 중요하다는 말이 가슴에 와닿았다. 그래서 강의가 끝나면 최인규 감독의 <자유만세>, <죄없는 죄인> 촬영현장을 찾아다녔다.

 

처음이자 마지막 데뷔작

해방의 깃발이 일렁이는 파도를 타고 우리말로 표현할 수 있는 연극이 귀소歸巢하던 때였다. 해방의 열기만큼이나 정비례했던 연극의 체온은 드디어 연극을 사랑하는 대학생들을 끓게 했다.

한편 해방의 물결은 영화의 해빙을 몰고 왔다. 금기의 명화들이 갑자기, 그리고 너무 우리들을 설레이게 했다. 그래서 1948년 동국대학교 국문과 재학시절, 한국 대학에선 처음으로 <영화예술연구회>를 창설하여 <해풍>이란 영화를 만들었다. <해풍>은 가난한 어촌을 무대로 풍파에 아버지를 잃고 미치광이가 된 젊은 아들의 이야기인데, 그것이 배우로서 나의 데뷔작이며 마지막인 셈이다.

납북되었다는 모더니즘의 시인 김기림 선생을 지도교수로 하여, 그 당시 허윤 학장의 영화예술에 대한 애정 때문에 우리는 거침없이 일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제작과정은 난관의 연속이었다. 학교의 지원금으로는 제작비 충당이 어려워 툭하면 학장에게 몰려가 읍소하는 해프닝을 몇 번이고 해야 했고, 회원들의 시계는 있는 대로 팔아야 했고, 번질한 신사화는 얼마든지 싸구려 일본 군화와 바꾸어야만 했다.. 굶어 가며 사 두었던 책들도 이미 없어진 지 오래였다. 이처럼 발랄한, 그리고 신선한 에너지로 하여금 드디어 <해풍>이란 작품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 당시 가난한 국산 영화계에도 간간이 무성영화를 만들던 상황임에도 우리는 유성(토키)으로 45분 짜리 작품을 완성했던 것이다. 당시 신문 기사에는 영화과가 없는 대학에서 학생영화로서 이처럼 토키대작을 만든 것은 동양에서 처음의 쾌거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처럼 당돌하고도 어리석은 짓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아 주시던 양주동 선생은 “배짱 하나 컸군, 내 막걸리 한 잔 사지” 푸짐하지는 못했던 막걸리였지만, 사지가 지구 속으로 침체하는 무력감을 가누지 못했던 것 같다. 돌이켜보면 선무당이 사람잡는 모험이었으나 오늘날 나의 길을 굳혀 준 출발이기도 하다.

 

(유현목, 영화 인생, 혜화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