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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말의 탕아 / 김덕희(98학번)

등록일 2026-10-06 작성자 학과 관리자 조회 66

세기말의 탕아

김덕희(98학번, 문예대학원 석사 2학기)

 

1998년, 내가 입학한 그 해는 소위 IMF시대라고 불리는 때에 속한다. 나는 지성이라곤 티끌만큼도 체험해보지 못한 날것의 새내기였다. 중․고등학교 6년 동안 오로지 대학진학을 위해 수험서에 매달려 지내기를 강요당했다. 그런 내게 IMF는 국제통화기금의 영문이니셜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매스컴 속에서는 연일 세상이 무너지고 있었지만, 나는 아무것도 목격한 것이 없었다.

1학년이었던 내게 대학이란 무엇이었던가? 고삐 풀린 망아지에게 자유는 낯설었다. 무엇을 해도 제약이 없는 곳, 대학은 놀이터였다. 술과 담배와 노래가 있고 남중 남고에서 모범생 흉내만 내며 살았던 내게는 여학생이라는 미답의 영역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곳에서 우상이 되고자 했던 적도 있다. 우상의 개념이 비뚤어져 있었음을 짐작하시리라. 그랬다. 술은 두주불사로 마시고, 학교 인근 술집에서는 언제든 외상이 가능해야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업엔 소홀함이 없어 장학금을 타는, 그런 대학생이 되려 했다. 어디 그뿐인가. 학생대표도 욕심을 냈고, 연애질도 빼놓을 순 없었다. 그러나 입대 전까지의 2년 동안 아무 것도 이룬 것 없는 얼치기에 그쳤음은 말하지 않아도 되리라.

입시교육의 피해자가 비단 우리 세대뿐이겠는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해보지 못한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는 부담스러우리만큼 남아돌았고, 뒤따르는 책임은 너무나 벅찼다. 나 같은 놈은 그런 상황에 나 자신을 아무렇게나 내버려두었다. 내가 기다렸던 것은 놀랍고도 숭고한 변화였다. 복권당첨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될 그 무엇을 간절히 바랐다. 그런 형편이니 나는 나날이 바보처럼 굴었고, 동음이의어를 이용한 유치한 언어유희로 주위를 어지럽혔다. 말하자면 그것은 남희석식 개그였는데 “저 시계의 이름은 자네 먼저 드시게”와 같은 식이었다. 친구란 놈이 그런 짓이나 일삼고 있으니, 동료들은 오죽 짜증스러웠겠는가. 흥미를 느낄 만한 일이 지독히도 없었던 나는 악착같이 친구들을 괴롭혔고, 그들의 괴로워하는 표정을 즐겼다. 그래서 ‘덕희적’이라는 출처불명의 형용사가 탄생했던 것이다.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일까만, 이 자리를 빌려 진심으로 뉘우치고 있노라고 사과하고 싶다.(그러나 간혹 내 헛소리에도 크게 웃어주었던 이들이 있었으니, 그들도 공범임을 고발한다.)

나 같은 놈이 있었나 하면 자기 관리에 철저했던 친구들도 많았다. 그들이 부럽기도 했지만, 사실 나는 속으로 비웃고 있었다. 모범생이자 장학생이었던 모군 모양들을 종종 못난이로 폄하했던 것이다. 가끔은 ‘대학의 낭만을 모르고서 어떻게 문학도라 할 수 있느냐’고 공공연히 욕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열패감에 시달리던 내 자신을 위한 변명에 지나지 않았다. 무엇을 해야 할지,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누가 가르쳐주는 것 같기는 한데 알아듣기는 힘들었다.

내가 무언가 해보겠다고 덤벼든 것이 있다면 광고였다. 그러나 어느 술자리에서 ‘광고를 왜 하려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15초의 예술’ 운운하다가 선배에게 크게 혼이 났던 게 생각난다. 무엇이든 그런 식이었다. ‘나도 뭔가를 하고 있다’고 떠들고 싶은데, 이왕이면 멋져 보이는 것이 없을까 하고 기웃거렸던 것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술을 마시고, 사람들과 어울려 있으려고 애쓰고……, 그러고 보면 참 외로웠던 것 같다.

1998년에서 2000년은 학과의 체제가 개편되던 시기이기도 하다. 국어국문학부 내에서 국어국문학 전공과 문예창작 전공이 운영되고 있었지만, 다소 갑작스럽게 문예창작 전공이 예술대로 가 독립학과로 개설되기에 이르렀다. 혼란스러워하기는 선후배 할 것 없었다. 지금이야 문예창작을 한다고 하면 당연히 예술인으로 생각하기 십상이지만, 그 당시에는 아무런 근거 없이 예술인들을 무조건 ‘딴따라로 매도하던 풍속’에 젖어 있었으므로 문과대에서 문예창작을 전공하던 학생들의 불만이 꽤 컸다. 1998년에 국어국문학부 전형으로 입학한 나는 이듬해 전공을 결정해야했고, 문예창작 전공을 택했으나 성적에 밀려 국어국문학 전공자가 되었다. 우울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런 내게 어느 선배는 문예창작 전공자가 예술대로 가게 된다는 정보를 흘려줌으로써 위로를 받기도 했다. 당시에는 그게 위로가 되는 문제였던 것이다.

지금도 대학 1, 2학년 남학생들에게 군대 문제는 만만찮은 고민거리일 것이다. 영장이 나오면 동기들끼리 한잔, 후배들과 한잔, 선배님들과 한잔. 이런 식으로 별의 별 건수를 만들어 이른바 ‘군주’라는 것을 마셨다. 술자리에서의 후배들, 특히 여학우들이 기억에 남는다. 그네들은 거짓말도 참 잘했다. 한 달에 한 번씩 면회를 가겠어요. 일주일에 한 통씩 편지를 쓰겠어요……. 나는 믿지 않았으나 그 절반에 절반 정도는 할 거라고 기대했다. 허나 막상 군생활을 해보니 영 꽝이었다. 선배들은 짓궂은 농담(바셀린에 얽힌 사연 한 토막씩 듣지 않은 남자가 있을까?)을 하며 위로했다. 예방주사를 기다리는 아이의 얼굴로 앉아 있는 이들도 있었다. 내 동기 남자 녀석들이었다. 나는 꽤 선배나 된 듯 녀석들에게 뻐겼다.

나의 경우엔 헤어질 애인이 없었기에 큰 고민은 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다만 큰아들을 군에 보내는 어머님의 상심이 걱정되었다. 내가 효자였다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워낙, 걱정과 근심이 많으시던 어른이라 심약한 분이 행여 병이나 얻지 않을까 했던 마음이었다. 1999년 12월 9일에 입대하여 훈련소에서 새천년을 맞이하면서 어머니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내 걱정은 쓸데없는 것이었다. 내가 상병을 달았을 즈음 어머니는 내게 고백하듯 말씀하셨다.

“군에 보내놓으니 오히려 걱정이 덜 되는구나. 그놈의 부대는 왜 애를 자꾸 내보낸다냐. 그냥 붙잡아두고 밥이나 apr이고 운동이나 시킬 것이지.”

입대 전에 술을 자주 마셨던 탓이었을까, 나의 입대가 술을 마시고 사고를 저지른 직후였기 때문이었을까. 어머니는 내가 아예 군에 붙들려 있길 바라신다는 투였다.

미약하나마 군의 복지가 개선되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이 방북하고, 햇볕정책이 추진되었으며 ‘북괴’가 ‘북한’으로 고쳐 표기되던 시절이었다. 새천년이 왔고 새 세상이 온 듯했다. 그러나 아무래도 복무 기간은 지루했다. 고삐가 풀려 마구 날뛰던 망아지가 다시 붙들린 셈이니 죽을 맛이었다.

아무 것도 모른 채 대학에 들어와 2년을 고스란히 탕진하고, 입대하는 남학생은 지금도 있을 것이다. 나는 1998년과 1999년, 20세기의 마지막 두 해를 그렇게 흘려보냈다. 2006년의 지금, 나는 그 시기에 '뭔가를 할 수 있었지 않았을까'하는 후회와 반성으로 하루하루를 아껴 살아가고 있다. 훗날 또 다른 회고의 기회가 온다면 좀 더 밝은 글을 쓸 수 있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