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국문문예창작학부
Dongguk University
성문 앞 보리수③ / 허혜정(90졸)
저녁이, 창밖으로 멀어져가고 있다. 황혼은 날마다 보이지 않는 곳으로 스며들어간다. 문득문득 싸늘한 물이 해변에서 빠져나가듯이, 정결한 기억의 모래알의 자그락임만을 남겨둔 채 멀어져 간다. 문리대 건물의 어두움은 오히려 나를 평온하게 한다. 너무나 강한 빛은 나를 상처 입혔다. 거기서부터 다시 이야기를 시작할 수도 있으리라. 높다란 도서관의 창가에서 커피 한 잔을 홀짝거리며 햇빛으로 하얘진 문리대 건물 앞의 조그만 교정을 내다보는 그 지점에서 말이다. 도서관 앞은 '팟쇼타도'라는 구호로 시끄럽고, 많은 도서관의 자리들이 이미 텅 비어 버렸다. 햇빛의 다발이 나뭇가지에 걸려 갈색 코일처럼 작열하고 있다. 때로 그 나뭇가지를 쪼개버릴 듯이 햇빛이 강해지기도 한다. 가지들은 그의 뿌리의 생명을 던지는 도전처럼 햇빛과 대결하고 그 광선의 메마름을 빨아들인다. 나뭇가지에 걸린 햇빛이 약해지고 바람이 가지를 휘어뜨려 둥그런 소리를 튕겨내기까지 나는 손바닥을 창틀에 얹고 그 광경을 바라본다. 검은 녹을 흘리며 창틀은 그녀의 손바닥에 들러붙어 뜨겁게 작열한다. 나는 도서관 창가에서 빛나는 태양을 본다. 나의 어둠과는 상관없이 밖에는 하늘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 비릿한 화염을 뿜어내는 태양이 휑뎅그레 박혀있을 것이다. 그 커다란 심장이 검은 화상자국 같은 흑점을 나의 얼굴 위에 떨어뜨려 놓을 것이다. 아니다. 두통 때문에 나의 시야는 뒤헝클어져 있다. 나의 흔들리는 시야 속에 보들보들한 참새 한 마리가 교정의 상공에서 날아와 부처님의 곱슬머리 위에 내려앉는 것이 들어온다. 그렇다. 그날 나는 토플책에서 'macula'란 단어를 발견한다. 흑점. 태양이란 의미에서 누락된 지대. 그곳에서 태양의 의미를 표상할 수 있는 불꽃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엄청나게 압축된 가스덩어리들은 그 어떤 욕망에 의해 또다시 그 전체가 폭발적인 불꽃으로 변해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직은 그 속에 아무것도 없고 검은 부정형의 가스덩어리는 아직 그 어떤 것으로도 해명될 수 없는 상태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그 태양 전체를 분쇄시켜버릴 만한 엄청난 에너지를 저장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다만 그 가능성을 바라볼 뿐이지만, 그 흑점은 휘날려 오는 불꽃에 움직임 때문에 보여지지 않는다.
나의 두뇌는 소리굽쇠와도 같이 작은 웅성임 소리에도 오래도록 웅웅거렸다. 두통은 혹독했다. 내 뇌는 머리 덮개가 뜯겨나간 듯이 민감하게 울렸다. 나의 뇌는 군데군데 파이고 딱지가 앉곤 한다. 마른 장미꽃잎 같은 딱지가 서서히 충혈되다 부서져간다. 나는 나의 머리 속에서 마른 세포들의 서걱이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태 동인 모임에서 나는 이탈하고 있었다. 사람들과 이야기한다는 것조차가 얼마나 힘든 일이었던가. 불면증이 수개월에 접어들자 의사는 뇌신경을 무감각하게 하는 약만을 처방해준다. 신경과 의사가 지껄여댄다. 이런 일이 있다고, 신경성 두통임에 틀림없다고. 내가 고개를 돌려 아버지를 바라본다. 늘 그는 그곳에 있으리라. 오랫동안 감지 못한 머리칼과 땀으로 진득해진 마른 팔이 늘어져 있는 것을 근심하면서, 그는 그 다음날도 그 신경과 진료실까지 동행할 것이다. 그리고 말하리라.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대학생이나 된 딸애를 따라 들어온 그 아버지를 어색하게 느끼며 의사가 하얀 진료카드에 내가 알지 못할 약이름을 갈겨 써 넣는다. 아버지가 그 진단서를 받아들고 차갑게 식어 있는 내 손을 잡는다. 나의 마른 손을 그의 손바닥으로 감싸쥔 채 조제국에서 받아 든 약봉지를 들고 세브란스 뒤뜰로 걸어가 시동을 건다. 분말에 섞인 그 알약이 내 뇌를 야금야금 갉아먹어 어떠한 생각도 제대로 이어갈 수가 없다. 나는 항상 침울하고 사소한 일에도 울음이 터질 것만 같다. 학우들이 파쇼타도를 외치며 몰려가고 있었지만 어느덧 그것이 부질없어 보였다. 나는 공기에 의지해 있었다. 나는 사람들로부터 나의 가느다란 그림자를 떼어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렇다. 시대가 아팠고 내가 아팠다. 그 라일락 지는 봄. 탈수된 검은 꽃잎들이 드러눕는 교정에서 나는 니체에 대해, 파멸에 대해 생각했다. 바람이 꽃잎을 찢고 가슴을 찢었다. 봄은 어둡고 외로웠다. 나는 엑스레이 카메라 앞에 앙상한 갈비뼈를 밀어넣는다. 하늘색 엑스레이복을 벗고 옷을 입고 있는데 간호사가 신경질을 부린다. 뭘 그렇게 많이 입고 왔느냐고 난 그다지 옷을 많이 입고 오지 않았다. 내 행동은 어느새 참을 수 없이 굼떠져서 거북이 동작처럼 답답해진 것이다. 또 다른 간호사가 나를 요위에 눕혔다.
그리고 뇌파검사를 하기 위한 차가운 이물질을 이마와 귀 밑과 머리칼 속에 발랐다. 나의 머리칼은 형편없이 더럽고 끈적끈적했지만 그것을 창피하게 여길 만한 기운도 나에게는 남아 있지 않았다. 나의 검은 심장은 터질 것만 같은 통증에도 불구하고 심전도 검사에서 정상이었다. 연탄가스에 멍해진 사람처럼 나는 학교를 드나들며 내 곁을 오가는 건강한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건강한 그들을 바라보자 다시 참을 수 없는 우울함이 밀려오기 시작한다.
나는 휴학을 생각하고 있다. 문학동인들의 만남은 열성적으로 진행되고 있었지만, 내가 거기서 채굴할 수 있는 것은 까맣게 타버린 고통밖에 없었다. 나는 커피와 불면에 노랗게 떠있다. 이상하리만치 커다란 공허감이 가슴을 비비고 들어온다. 내가 어두워져가는 숲 속의 빈 터에 있는 산책로를 올라간다. 싸늘한 공기에 모든 것이 간간히 흔들린다. 나는 책 한 권을 쓰고 싶은 것이다. 고요함이 어두움을 가로지르고 차가움이 불꽃을 소용돌이치게 하는 책. 숲속의 빈터의 아름답고 무성한 오솔길은 연인들을 위해 열려 있었다. 저녁이면 도서관에서 빠져나온 연인들이 모조나무 벤치에 앉아 허리를 안고 어깨를 기댄 채 앉아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 팔랑이며 내려앉는 나뭇잎들. 그들 중의 몇몇은 나무들로 숨겨진 오솔길을 따라 더 깊은 곳으로 숨어들기도 했고 몇몇은 그 숲 가운데 있는 한적하기 이를 데 없는 빈 집터를 찾았으리라. 언젠가 귀틀집 같은 것이 하나 있었음직한 그 집터로 나는 그 무렵의 단짝인 명수와 상란이랑 걸어들어간 적이 있다. 상란이는 위장염, 명수와 나는 편두통을 얻어 통원치료를 받고 있었다. 의사가 산소 부족이래, 명수가 말한다. 우리는 그 숲의 산소를 어질어질해질 때까지 들이마시고 뿜어대기 시작한다. 그리고 까만 주춧돌만 남아 있던 그 곳에서 우리는 하모니카를 불었다. 온몸이 묻혀버릴 만큼 가랑잎이 쌓이고 또 쌓여 있었다. 우리의 발소리에 놀라 여기저기서 풀풀 날아가는 텃새들. 가끔 다람쥐와 같은 것이 바삭거리며 지나가 우리를 놀라게 한다. 수천 개의 라디오 잡음 소리 같은 것을 내며 나뭇가지들이 흔들린다. 나는 그 중의 어느 소리도 분명하게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날개막 같은 나뭇잎들, 그 잎사귀 사이로 짙푸른 하늘이 갈라져 있다. 그곳에는 봄에도 낙엽이 진다. 기억은 이곳저곳에 책임없이 뿌려진다.
그것을 기억한다. 자, 저녁이 됐다. 모든 시간을 가로질러 황혼이 눈앞에 퍼져온다. 내가 국문과 친구들과 마지막 술자리를 같이 했던 것은 이층집에서였다. 이층집. 그곳은 국문과생들에게 친숙한 곳이다. 깔끔한 호프집과 사주점과 신식으로 개조되어가는 세련된 레스토랑 사이에 한 척의 난파선처럼 덩그렇게 놓인 공간. 밤과 막걸리와 건더기가 거의 없는 찌개와 노래의 앙상블에 꼬르륵 취해가는 얼굴들이 그곳에 모여 있다. 속까지 검게 기름녹에 절어 결코 깨끗하게 닦여지지 못할 곤로, 술 취한 녀석들이 곧잘 걸려 넘어지던 문지방. 그리고 햇빛을 언제나 뿌옇게 걸러내어 언제나 그곳을 황혼의 공간으로 만들어 놓던 간유리창이 떠오른다. 우리가 거기에서 모이고자 의도한 적은 없다. 아무런 계획 없이 그냥 그곳에서 모이게 된다. 내가 이층집 실내의 우중충한 기둥에 기대어서 거리를 바라본다. 얼핏얼핏 흘러가는 사람들과 불빛들이 간유리에 번져서 신비롭게 보인다. 우리는 깍두기 안주를 집어먹으며 술마시고 노래하고 또 술을 마셨다. 많은 이야기를 했지만 그것들은 기억에서 부스러져나가 알 수가 없다. 그러다 누군가가 갑자기 일어나 데모가를 선창했다. 많은 이들이 젓가락을 두들기며 고래고래 복창했다. 노래가 끝나자 중현이가 '어라, 청춘이 가네'란 제목으로 자작곡을 취입하고 자서전도 한 권 써보겠노라고 했다. 그러자 기수가 자신도 같은 해에 '늑대처럼 굶주린'이란 곡을 발표하고 순회공연에 돌입하겠다고 큰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