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국문문예창작학부
Dongguk University
'큰 바위 얼굴' 성낙주 / 김응열
‘큰 바위 얼굴’ 성낙주
김응열(前 대원국제중 교장)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생소한 용어가 일상의 언어가 되어 갈 즈음 난 정년퇴임을 맞이했다. 그동안 함께했던 사람들을 초대하여 퇴임식 후 소주잔이라도 기울여야 할 날이었지만, 3인 이상의 모임이 엄격하게 금지되던 시절이라 후일을 기약하며 전화로만 서로의 안부를 묻던 시절이었다. 그러다 성 선생님의 부음을 전해 들었다. 그 소식을 듣는 순간, 혈압은 200에 육박했고 맥박도 120을 넘어설 만큼 충격이었다. 죽음을 걱정할 나이도 아니었고, 또 누구보다 건강하셨던 분이셨고, 무엇보다 해야 할 연구와 쓸 글들이 많아서 죽으려야 죽을 수 없는 운명이었기에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소식이었다. 전날까지도 통화를 했고, 얼마 전엔 김소월에 관한 시평 원고까지도 보내와 그에 관해 오랜 시간 통화까지 했기에 더군다나 믿기지 않는 소식이었다.
금요일 퇴근길이어서인지, 강서구 방화동에서 노원구 장례식장으로 향하는 길은 거의 두 시간여 걸렸다. 운전하는 내내 가슴이 방망이질했다. 도대체 이 분은 내게 어떤 분이셨길래 이리도 마음이 안정되지 않는지 생각해 보았다. 성낙주 선생님은 내게 형 같은 분이셨다. 그러나 나는 선생님 생전에 단 한 번도 형이라고 불러본 적이 없다. 친밀하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그를 통해 사람을 챙기고, 언행을 경계하고, 시대를 관통하는 정신을 배울 수 있어서였다. 또 그는 내게 늘 기준과도 같은 사람이었고, ‘큰 바위 얼굴’ 같은 사람이었으니 ‘성 선생님’보다 더 어울리는 호칭은 없어서였다.
그런 그와 처음으로 만난 해가 서슬 퍼런 전두환 군부독재 시절이었던 1982년이었다. 폭압적 분위기를 마냥 견디어 내기에 우리 피가 너무 뜨거웠기 때문일까? 우리는 퇴근 후에 늘 ‘꼬끼오’란 상호를 가진 통닭집에서 만나 통닭에 생맥주를 놓고 허기진 배를 채우며 울분을 삭이곤 했는데, 그는 전략가도 아니고 운동권에 몸담아 학습을 통해 이론가로 성장한 사람도 아니지만, 아무리 복잡한 문제도 운동권의 논리를 들이대지 않고도 아주 간결하고 명징하게 풀어냈다. 그래서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없던 희망도 생겨났고 학교라는 작은 권력사회였지만 그곳에서라도 그릇된 관행을 멀리하고 교사의 권리와 학생의 인권과 학교문화를 개선하기 위해 늘 경계하며 살아야겠다고 마음먹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교사운동과 교육운동에도 눈을 뜨게 되었다. 또 대략 그때쯤, 그는 첫 장편소설인 『차크라바르틴』을 구상하고 있었는데, 그는 우리가 ‘차산리 콘도’라는 별호로 불렀던 그의 마석 본가에서 밤새워 고타마 싯다르타 사문과 비유리, 춘다와 나무크시아, 춘다를 돕는 사촌들과 나무크시아를 사랑하는 야수미라는 여인, 나무크시아의 친구로 진리를 찾아 고행의 길을 떠나는 나가사 등 부처님 시대 당시에 존재했을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그것은 지금도 소설 『차크라바르틴』 탄생에 함께했다는 나만의 영광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가 우리 곁을 떠나 서방정토로 향한 지 올해로 벌써 3년이다. 하지만 아직도 그가 그리워 간혹 그의 부음을 전했던 기사나 추모의 글을 찾아볼 때가 있다. 그중에서 그를 가장 잘 묘사한 표현이 “석굴암에 미쳐 신화와 싸우다 산화한 사람”이었다. 그 말 그대로 스스로 소설가로서의 정체성도 멀리하고 그는 햇살신화와 원형논쟁의 한복판에서 싸우다 산화한 사람이었다.
오늘따라 많은 어려움 끝에 결국 거대한 종을 만들어 천상의 소리 ‘옴’을 완성한 춘다와, 늙은 몸을 이끌고 마지막 유행을 떠나 그 유행의 길에서 병을 얻어 죽게 된 붓다의 모습에 성 선생님의 생전 모습이 겹쳐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