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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끝 뒤의 어쩌다가 무지개처럼 / 윤재웅

등록일 2026-10-06 작성자 학과 관리자 조회 70

비끝 뒤의 어쩌다가 무지개처럼

윤재웅(동국대학교 총장)

 

성낙주 형이 창졸지간에 우리 곁을 떠나간 뒤, 살아서의 호탕한 목소리와 부리부리한 눈빛이 비끝 뒤의 어쩌다가 무지개처럼 떠오르곤 합니다. 귀한 보물 유산을 구해서 이리 보고 저리 보고 벙글벙글 웃으며 천진난만으로 좋아하던 형의 모습이 어찌 설레는 무지개 가슴이 아니겠습니까.

 

“이게 말이지, 한국 미술사에 한 번도 나온 적 없는 양식이야. 그런데 중국이나 일본 양식도 아니거든. 틀림없이 우리 것인데 이런 양식은 초출이란 말이야, 흐흐흐.”

 

처음엔 귀에 다가와 고조곤히 속삭이다가 어느 순간 ‘지,징,지,따,찡’으로 울어 대는 징소리처럼 가슴 먹먹해집니다. 형은 그런 몰입자였습니다. 한국에 몰입했고, 역사에 몰입했고, 불교에 몰입했고, 미술에 몰입했습니다. 그처럼 푹 빠져 사는 이는 다시 보기 어렵습니다.

동국 사랑하는 마음은 언제나 용암처럼 펄펄 끓고, 미당이며 석전이며 소석 선생 등 스승 기리는 마음 또한 세상의 물감 가게에서는 쉬이 볼 수 없는 저 조선왕조 때의 붉디붉은 진사 빛이어서, 하와이나 인도네시아에서 미친 듯이 화창하게 피어나는 부겐빌레아 꽃송어리보다 훨씬 아찔합니다. 이런 열혈의 일편단심으로 형은 동국 인문학의 묵은 밭을 잘 갈고 갔습니다.

 

소소리바람이라 해도 좋고 일진광풍이라 해도 좋습니다. 형은 한바탕 바람처럼 그렇게 왔다 갔는데, 모르게라, 아마도 새로운 바람이 또 올 것입니다. 형이 이쁘게 잘 갈아놓고 간 밭이랑 이랑 사이에는 꽃씨와 풀씨들이 무시로 날아올 테지요. 영원을 향해 가는 머지않은 한 출발선상에서 동국의 꽃밭은 나날이 싱그러울 것입니다. 그 꽃밭 강의실에는 새벽 별빛부터 저녁 달빛까지 출석하여 경전을 소리높여 독송하는데 인간의 새파란 자녀들이 들을 만한 내용도 이따금 풍편에 들려오긴 합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면 무지개처럼 가슴 설레는 일도 좀 배우고, 무언가에 흠뻑 젖어 열심히 몰입할 줄도 알고, 아찔하게 치열한 일편단심도 길러서 호탕해야 하느니…….”

 

성낙주 형 생각을 하려니 냉철한 이성의 언어 대신에 뭉클리는 가슴의 언어가 발을 먼저 걷어 젖히며 달려 나옵니다. 옛적 고전소설 『구운몽』에는 여장을 한 양소유에게 깜박 속은 정경패가 발 뒤에 숨어 분을 삭이지만, 요즘 같으면 발을 스스로 걷어 젖히면서 할 말을 다 하는 것으로 각색될 것입니다. 가슴에 뭉클리는 말들은 이런 글자리나 술자리 같은 데 아니면 본색을 잘 드러내지 않습니다.

 

형의 생애를 눈감아 돌아보니 주류 담론에 저항하는 씩씩한 소수의 외침인지라 발 자리를 걷어차고 풍기쳐 나오고 싶은 현대판 정경패의 마음이 왜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형은 그처럼 씩씩했으나 고독했고, 열혈남아였으나 외로웠습니다. 남은 사람들은 이제 무엇을 하면 좋겠습니까. 형이 남긴 씩씩한 고독을 잘 살펴서 우리도 한 번쯤 홍의장군 적삼처럼 입어보는 것입니다.

 

동국 꽃밭의 꽃송이 형제들은 껄쭉죄한 마음의 때일랑은 모두 벗어버리고 형이 그랬던 것처럼 천진난만으로 벙글거리며 한편으론 무섭게 몰입하면서 또 한편으론 묵직한 일편단심으로 살아간다면 굳이 천상의 화원을 찾아 무엇하겠습니까. 여기가 늘 성낙주 형의 향기로운 꽃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