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국문문예창작학부
Dongguk University
차크라바르틴과 산유화 / 신홍래
차크라바르틴과 산유화
신홍래(소설가)
1. 땅(地)
대학 2학년 시절, 우리는 연극을 했다. 성낙주 희곡, 연출의 「사사기 12장」이란 창작극이었다.(원고와 대본집은 전하지 않음) 하지만 당시에는 긴급조치 9호가 내려져 있어 마땅한 무대가 없었다. 교내외를 막론하고 3인 이상 모일 수 없었고, 이를 위반한 교수와 학생은 해임 또는 제적될 수 있었다.
선배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간현행을 결정했다. 1979년 10월 9일, 한글날 연휴를 기해 75학번 선배와 78학번들이 비밀리에 2박3일간의 엠티를 떠나기로 했던 것이다. 그 며칠 전, 이종찬 지도교수님을 찾아가 말씀드리자 “난 못 들은 일로 하겠네.” 하더니 선생님은 다시 자리에 앉아 무심히 책만 읽을 뿐이었다.
우리 학년은 감시받기에 충분한 전력이 있었다. 불과 석 달 전, 우리는 ‘민주주의 장례식’이란 대형사고를 쳤다. 그것도 교문 밖 대로에서. 우리는 ‘민주주의’라는 시신을 들쳐메고 퇴계로 선술집 호남선에서 대한극장을 거쳐 제일병원과 후문, 교정 한복판 석가여래상 앞까지 “민주주의 죽었네, 어허이 어이” 상두가를 부르며 장례 행렬을 벌였던 것이다.
그러니 쥐도 새도 모르게 꾸민 간현행이라지만 왜 몰랐겠는가. 다만, 연극 이상의 단체행동을 하지 않았고, 연극 내용도 시국과 관련이 없었기에 학교에 상주하던 정보과 담당자가 묵인해 준 것 같았다. 아니면, 한 과 전체가 제적되는 초대형 사고가 날 테니까 눈감아 준 건지도 몰랐다.
기독교 신자도 아닌 형이 왜 성경에서 소재를 가져왔는지 알 수 없다. 성경 이야기에 상상력을 가미한 작품이었다. 판관 입타는 이스라엘을 침략한 암몬 부족을 무찌르기 위해 하나님께 힘을 청한다. “이들을 물리치고 돌아갈 때 저를 맞으러 처음 나온 사람을 주님께 번제물로 바치겠나이다.” 하고 서원한다. 마침내 승리를 거두고 개선하는 그들 앞에 맨 처음 나타난 이는 그의 외동딸. 이스라엘 자손들의 악행과 주님의 진노, 그리고 인간의 비극적 운명과 사랑을 이야기한 작품으로 기억한다.
작품 속에 <샬롬>이란 합창곡이 있었다. 형이 직접 지은 노래였다. 평소 <명태>나 <사의 찬미>를 불러제끼다가 패티 페이지나 엘비스 프레슬리의 노래를 감미롭게 부르던 형이었다. 형의 중화동 집에는 팝이며 클래식 음반이 꽤 많았다. 카루소와 쌍벽을 이룬다던, 그 귀하디 귀한 베니아미노 질리의 LP판이 있었을 만큼 형은 음악에 조예가 상당한 사람이었다.
간현의 삼선천변 목정밭에 군용담요를 둘러 세운 가설무대. 마침 그곳에 야영 나온 스무 명 정도의 보이스카우트와 고교 문예반 학생, 선생님들이 관객으로 앉아 있었다. 연극이 끝나고 어둑할 무렵 ‘난 모르는 일’이라던 이종찬 선생님이 대학원 선배와 같이 막걸리 한 말을 들고 우리를 찾아왔다.
2. 물(水)
1980년 1월, 우리는 제주 모슬포항에 발이 묶여 있었다. 교지 『동국』 편집장이던 형과 필자, 사진 담당 후배까지 셋이서 마라도 취재차 내려와 있었으나 풍랑에 오도 가도 못한 채 여인숙에 죽치고 있었다. 계속되는 풍랑으로 배는 뜰 기미가 없었다. 취재비를 아끼기 위해 우린 하루 한 끼로 버티고 있었다.
나흘째 아침이었다. 제주로 나왔다가 돌아가지 못한 가파도 주민들이 고깃배를 세내 돌아간다는 소식을 들었다. 형이 흥정에 나섰다. 배 주인한테 5만 원을 드릴 테니 마라도까지 데려다 달라며 매달린 끝에 승낙을 받아냈다.
가파도에 주민들을 내려주고 우리 세 사람을 태운 배가 마라도 쪽으로 나서자마자, 파도가 배를 집어삼킬 듯 덤벼들었다. 산만한 바닷물이 허공으로 치솟았다가 곤두박질치듯 떨어졌다. 어른 걸음으로 열대여섯 보나 될 만한 자그마한 어선은 말 그대로 일엽편주였다.
바닷물을 흠뻑 뒤집어쓴 채 마라도에 닿았다. 이튿날부터 취재를 시작했다. 설화와 유적, 주민의 생활상까지 돌아보고 촬영하는 데 이틀이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또다시 모슬포로 돌아갈 일이 막연했다. 여전히 뱃길이 막혀 있었다.
형과 나는 각기 바람에 난 굴 하나씩 차지하고 들어앉아 시간을 보냈다. 바람 밑으로는 파도가 크르렁거렸으나 그 안은 푸근했다. 아마 형은 그 시간에 작품을 구상한 것 같았다. 그렇게 사나흘쯤 지난 정오 무렵 멀리 모슬포에서 하얀 행정선이 다가오는 게 보였다.
무사히 서울로 돌아온 형은 마라도 기행을 써낸 뒤 뒷일을 모두 떠넘긴 채 작품을 쓴다며 집에 들어박혔다. 그리고 두 달쯤 지났을까? 300매 가량 되는 중편소설을 들고 형이 나타났다.
3. 불(火)
1989년 가을, 형은 전교조로 해직돼 교단을 떠나야 했다. 교육개혁의 한가운데서 일하는 한편으로 형은 소설에 몰두할 수 있었다. 그때 필자의 인사동 사무실과 집을 오가며 쓴 작품이 등단작 『차크라바르틴』이었다.
600자 원고지에 쓴 작품을 동료, 후배들이 돌려 읽으며 합평했고, 형은 고치고 또 고치며 작품을 다듬었다. 그 치열함이 이루어 낸 결실이 『차크라바르틴』이었다. 그리고 문예지 『상상』의 장편공모 응모, 제1회 상상문학상 수상작으로 뽑혔다. 심사를 맡은 문학평론가와 작가들로부터 “탁월한 역량을 가진 작가”가 쓴 “종교성과 현실성의 본질을 탐색한 훌륭한 작품”이라는 호평을 받으며 문단에 나왔다.
형은 붓다 시대의 한복판으로 뛰어들어 무명의 땅을 갈아엎었다. 인간과 신, 속명과 비운에 맞섰다. 형은 매사 그렇듯이 힘겨운 주제를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부딪쳐 나갔다. 앞이 보이지 않을 때에는 싯다르타에게 직접 묻고, 답을 들었다. 또 춘다와 나무르시아, 비유리에게도 묻고 또 물었다. 그리고 그들의 말을 받아 적었다.
개인적으로, 동서양을 아울러 싯다르타와 그 시대를 다룬 작품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꼽는 『차크라바르틴』은 이렇게 세상에 나왔다.
4. 바람(風)
잘 알려진 것처럼 형은 자신의 부끄러움을 감추지 않는 성미였다. 또 무엇이든 새롭게 보려는 태도를 지녔다. 누구나가 인정하는 상식조차 ‘왜 그런가?’ 되묻고 나름의 방식으로 이해하려고 했다.
『차크라바르틴』 이후 이태 만에 장편소설 『왕은 없다』를 발표했다. 하지만 1997년 「문화전사 유홍준의 미덕과 해악」이란 칼럼을 발표하면서 ‘석굴암’ 논쟁 속으로 뛰어들었다. 낱말 하나, 토씨 하나까지 소홀할 수 없는 엄중한 논쟁의 시기를 어떻게 홀로 견뎌냈을까. 필자는 가끔 형의 그 시기를 생각하면 가슴이 저렸다.
하지만 형은 20년이 넘도록 바윗덩어리처럼 완강한 ‘문화권력’에 맞서 고독한 싸움을 했고, 마침내 그 완결판이라 할 수 있는 『석굴암, 법정에 서다』까지 발간했다.
물론 긴긴 싸움 끝에 석굴암에 대한 오류와 곡해는 바로잡았지만 진실은 모두 밝혀지지 않았다. 형 역시 “오늘 우리 눈에 미처 안 뜨인 부분은 훗날 누군가의 밝은 눈길을 기다리자.”라고 적었다.(『석굴암, 그 이념과 미학』, 250p)
세상을 뜨던 그해였을 것이다. 『왕은 없다』에 나오는 연주암에 이제서 다녀왔노라며 밀린 숙제를 마친 학생처럼 흐뭇해했다. 이즈음 형에게서 소설을 다시 쓰고 싶다는 말을 들었다. 또 주위 선후배들도 그런 얘기를 들었노라고 했다.
그런 의미에서 형이 블로그에 연재를 시작한 ‘우리 시, 낯설게 읽기’는 예사롭지 않은 작업이었다. 시가 종종 우리를 감성의 본질로 이끌고 문학적 영감을 샘솟게 한다는 점에서 보면 이 작업은 소설로 회귀하려는 ‘결연한’ 의지가 아니었을까.
그해 시월 초였을 것이다. 형은 그 여덟 번째 글 ‘산유화-시인의 소명’을 보내왔다. 이 시를 소월의 ‘자화상’으로 읽어내고 형은 참으로 기뻐했다.
돌아보니 <산유화>가 소월의 자화상이듯 ‘춘다’는 형의 자화상이 아니었을까.
춘다는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그 지수화풍이란 걸 가지고 갖가지 물건을 지어내는 우리 대장장이들은 무엇이겠느냐? 신이라 말할 수 있다면 바로 우리들이야말로 작은 뜻의 신이 아니겠느냐? 그래, 우리 대장장이들이 바로 신인게다. 신분으로야 보잘것없지만, 그래서 남들이 들으면 비웃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명백한 이치란다.”(『차크라바르틴』 상권, 328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