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pup zone

'미술사학자' 성낙주 선생을 추모하며 / 소현숙

등록일 2026-10-06 작성자 학과 관리자 조회 76

‘미술사학자’ 성낙주 선생을 추모하며

소현숙(원광대 학술연구교수)

 

성낙주 선생은 소설가로, 미술사 연구자로, 국어교사로 다양한 삶의 궤적을 그려 왔지만, 내가 아는 그는 ‘미술사 연구자’다. 선생과의 인연은 석굴암으로부터 시작되었다.

1999년 12월, 신라문화제 행사의 일환으로 경주에서 ‘석굴암의 신(新)연구’라는 주제의 학술대회가 열렸다. 그해 여름 「8세기 초 신라 불교조각 연구」로 석사 논문을 쓰고 막 복직했던 나는, 이때 선생을 처음 보았다. ‘질의 응답’ 시간이었는데, 관중석에서 단상의 발표자를 향해 우렁찬 목소리로 질문을 하던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내 기억에 당시 선생은 매우 긴장했던 것 같다. 학계의 석굴암 연구에 대해 비판적인 생각은 많았지만, 그걸 속된 말로 ‘세련되게’ 풀어내지 못한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그 열정에 전염되어 서울로 돌아와 ‘석굴암 연구자 성낙주’를 취재했다. 인연도 잠깐, 2001년 내가 중국 유학을 떠나면서 관계는 단절되었다.

인연이면 다시 만난다더니, 2014년 석굴암이 선생과 나를 다시 연결해 주었다. 한국 문화유산의 세계적 가치에 관심이 많던 김홍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은 당시 석굴암 돔의 비밀을 전 세계 학자들과 함께 풀어 보겠다는 원대한 구상을 갖고 있었다. 당시 그 일에 참여했던 내게 김 관장은 한국의 석굴암 연구자로 선생을 지목했다. 학계에서는 ‘애써’ 외면하지만, 선생만큼 석굴암을 사랑하고 잘 아는 한국 연구자가 드물 거라는 데 우리는 뜻을 같이했다. 이후 그 일로 선생을 여러 차례 뵈었다. 석굴암 관련 자료를 제공받기도 하고, 해외 답사도 함께하며 석굴암 돔에 대한 그의 열정을 확인했다.

성낙주 선생의 미술사 연구는 대략 두 주제에 집중되어 있다. 석굴암과 에밀레종으로 불리는 성덕대왕신종이다. 둘 다 한국 문화의 흥성기라 꼽히는 8세기를 대표하는, 그리고 세계 어디에도 없는 독창적인 유물이다.

신라의 종(鐘)은 중국이나 일본의 종과 전혀 다르다. 기능적으로나 미적으로 신라 종의 뛰어남은 일제시대 일본 학자들도 인정한 바다. 성낙주 선생은 신라 종의 기원을 중국 상대의 청동 악기인 용종(甬鐘)으로 보아 오던 기존의 견해를 비판하고, 신라인들이 “과거의 전형을 파괴하고 새로운 종의 전형을 완벽하게 창출했다.”라고 평가했다. 그리고 새로운 전형의 창조에 신라인의 이데올로기와 미의식이 개입되었음을 주장했다(「신라 종 양식의 ‘용종기원설’ 비판」, 『신라사학보』 7, 2006; 「신라종 양식의 기호학적 해석」, 『신라사학보』 9, 2007). 어느 논문에서 살짝 내비쳤듯이 성낙주 선생은 ‘정신사로서의 미술사’ 연구를 지향했다. 그가 유물을 만든 예술가 개인의 정신세계에 몰두하고, 유물의 미학적 면모를 깊게 들여다보는 것도 모두 그 때문이다.

그는 프로필에서 자신을 ‘석굴암미학연구소장’, 혹은 ‘석굴암 연구자’로 소개한다. 이런 자부에 걸맞게 미술사학자 성낙주의 진가는 석굴암 연구에서 빛을 발한다. 1999년 출간한 『석굴암, 그 이념과 미학』(개마고원)은 석굴암 연구의 이정표였다. 간행물윤리위원회와 출판인협회 등에서 우수도서로 선정되었던 이 책은 새로운 각도에서 석굴암을 들여다보고 있다. 1980년대 이후 학계의 석굴암 연구는 건축, 조각, 역사 등 다양한 부문에서 따로따로 진행되었고, 연구 방향도 미시적인 접근을 통한 심층 연구로 기울어져 있었다. 선생은 달랐다. 석굴암의 창건 동기와 주체, 석굴암 건축의 국제성과 조각의 미학적 성취까지, 석굴암 전반을 창건자 김대성의 입장에서 재구성하고, 석굴암의 건축과 조각 모두를 망라하여 그 미학적 의미를 찾아보고자 했다. 특히 석굴암 건축과 로마 판테온의 건축적 유사성을 처음 제시함으로써 석굴암 연구의 지평 확대를 기도했다. “석굴암은 한 권의 예술사”라고 밝힌 그가 책 서문에서 언급한 내용은 그의 연구 방법론을 잘 보여준다.

 

『석굴암, 그 이념과 미학』은 석굴암 자체와 관련 문헌을 주 텍스트로 삼은 실증적 작업의 산물입니다. 자료와 자료 사이의 공백에서는 상상과 직관을 동원했습니다. 실증적 자료를 바탕으로 한 상상과 직관은 때때로 진실로 다가가는 지름길이 되기도 합니다.

 

학자가 갖추어야 할 첫 번째 자질은 실증적 태도다. 이런 의무에 부응하여 그는 먼저 석굴암 현지 조사는 물론, 관련 문헌에 대한 상세한 조사와 분석, 그리고 고증을 시도한다. 학자로서의 책무와 관련해 꼭 말해 두고 싶은 것은 그가 가진 소장 자료의 방대함이다. 남산 근처에 있던 연구실을 방문했다가 다양한 자료의 수량에 놀랐던 적이 있다. 석굴암 관련 자료라면 그것이 어디에 있건, 또 가격이 얼마건 백방으로 구하고자 노력했다. 그 결실은 석굴암 사진전의 개최와 도록의 출간으로 나타났다(『석굴암, 백년의 빛』, 동국대출판부, 2009).

자료가 아무리 많아도, 그것들이 석굴암에 대한 우리의 궁금증을 모두 해소해 주진 못한다. 여기저기 성글게 산재한 단편의 정보만으로는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석굴암’이라는 위대한 작품을 직조해 낼 수 없다. 곳곳에 구멍이 보이는 것은 필연적이다. 그 구멍을 거칠게나마 메워 주는 게 ‘역사적 상상력’이다. 그러나 그것도 전가의 보도는 아니어서, 항상 개운치 못한 구석을 남기게 마련이다. 그래서 연구자들은 “하루라도 좋으니 타임머신을 타고 8세기의 그날로 가고 싶다.”는 몽상마저 갖고 산다. ‘김대성 설화의 재해석’에서 보듯, 선생은 문학적 상상력을 통해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아마도 이 지점이 학계와 그를 구분 짓고, 그의 이름 앞에 ‘재야’라는 단어를 덧붙이는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석굴암 소재의 소설을 쓰기 위해 취재하다가 학계의 석굴암 인식에 의문을 품고 석굴암 연구를 시작했다는 선생. 그의 글에 학계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강한 것은 당연지사다. 『에밀레종의 비밀』(푸른역사, 2008)과 『석굴암, 법정에 서다』(불광출판사, 2014) 두 권의 책에서는 학계에 대한 그의 비판이 매섭다. 특히 후자가 석굴암 원형에 대한 기존의 논의를 하나하나 갈질하기 위한 것임은 ‘신화와 환상에 가려진 석굴암의 맨얼굴을 찾아서’라는 부제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8세기 중엽 신라시대 석굴암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석굴암의 원형’은 학계의 난제다. 전실 평면의 절곡(折曲) 여부, 광창의 존재, 전실 목조 전각의 설치 여부 등에 대해 다양한 주장들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그 배경에는 일제시대와 1960년대에 행해진 두 번의 석굴암 대(大)수리공사가 있다. 석굴암에 대한 다른 견해는 수리공사에서 다른 결과물로 표현되었기 때문에, 두 수리공사 모두 훗날의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게다가 수리 주체였던 ‘일본제국주의’와 ‘박정희’라는 정치성까지 개입하면서 석굴암 원형 문제는 더욱 복잡해졌다. 특히 현재 석굴암이 1960년대 공사의 결과물이기 때문에, 그때의 수리에 대한 비판과 비난이 지금까지도 끊이지 않고 있다. 그런데 『석굴암, 법정에 서다』가 1960년대 수리공사 책임자였던 황수영 박사에게 헌정된 걸 보면, 성낙주 선생은 1960년대 수리공사를 적극 변호하고자 석굴암을 법정에 세운 듯하다. 선생의 미술사 연구의 궤적을 따라가면, 그 맥(脈)이 우현(又玄) 고유섭과 그의 제자 황수영 박사에게 닿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 책은 그런 학문적 지향을 잘 보여주는 저술로 보인다.

석굴암 본존불의 크기가 현장법사의 ‘대당서역기’에 언급된 인도 보드가야 마하보리사의 정각상(正覺像)과 같다는 ‘위대한 발견’에 대해, 연구자들은 모두 ‘강우방’이라는 학자를 기억해 내고 그의 이름을 호칭한다. 반면, 석굴암의 평면과 구성이 로마의 판테온과 놀랄 만큼 흡사하다는 ‘중대한 발견’이 성낙주에 의해 이루어졌음은 침묵한다. 이런 학문적 인색함 뒤에는 학계의 울타리 의식, 그리고 선생의 신랄한 학계 비판에 대한 반감 등이 강하게 작동하고 있다. 그러나 학문이 비판을 통해 성장하며, 학문적 성과는 저술의 수준에 따라 평가받아야 한다는 점을 상기할 때, 이제는 그의 프로필 앞에서 ‘재야’라는 딱지를 거두어야 한다. 선생은 더 이상 ‘재야미술사학자’가 아닌, ‘미술사학자 성낙주’로 불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