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pup zone

제54회 전국 고교생 문학콩쿠르 수상작

등록일 2016-05-31 작성자 학과관리자 조회 7278
<소설 장원>  

파란색 라이터

안양예술고등학교 2학년

윤정은

  지우는 손에 들린 라이터를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파란색 라이터 속 가득 채워진 연료가 찰랑거리며 흔들렸다. 지우는 부싯돌을 돌렸다. 화르륵 불꽃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게 여느 라이터와 다름없어 보였다. 동네 편의점에도 수두룩하게 진열되어 있을 법한 흔한 라이터였다. 그런 라이터를 오늘 지우는 택배로 받았다. 지우에게 택배를 보낼 사람은 없었다. 더군다나 택배로 라이터를 보낼 사람이라니. 단순히 장난으로 치부하기엔 어딘가 찝찝했다. 잠시 라이터를 노려보던 지우는 책상 구석으로 라이터를 가볍게 던졌다. 성큼성큼 현관 쪽으로 걸어가 겉옷을 입고 마스크를 썼다. 낡은 자취방 철문을 여는 지우의 손에는 엄지손가락만한 크기의 작은 캠코더가 들려 있었다. 지우는 초조하게 지하철을 기다렸다. 1호선, 특히 퇴근 시간의 1호선은 유독 사람이 붐벼 지우가 자주 타는 지하철이었다. 열차가 들어온다는 안내 방송이 들리자 지우는 소매 안으로 반쯤 숨긴 캠코더를 쓰다듬었다. 발 디딜 틈도 없이 꽉 찬 지하철 안을 비집고 들어간 지우는 익숙하게 치마를 입은 여자 뒤에 섰다. 밝은 갈색으로 염색을 한 여자는 이어폰을 꽂은 채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지우는 오른손으로 여자 앞에 있는 손잡이를 잡으면서 왼손을 여자의 치마 쪽으로 향하게 했다. 엄지손가락으로 캠코더를 더듬어 녹화 버튼을 누르자 작게 띠링, 소리가 난 것도 같았지만 금세 지하철 소음에 묻혀버렸다. 지우가 일명 ‘지하철 도촬’ 일을 하기 시작한 건 몇 달 전부터였다. 남들 따라 공부하고, 대학교 가고, 군대 가고 어영부영 졸업까지 한 지우였다. 남들보다 특별한 스펙도, 학점도 없었지만 지우는 끊임없이 입사 지원서를 제출했다. 그리고 계속 떨어졌다. 지우는 가장 마지막으로 본 면접 때 심사위원이 한 말을 아직도 기억했다. 떨리는 목소리로 입사 포부를 밝히는 지우에게 심사위원은 다리를 꼬고 허리를 한껏 뒤로 젖힌 채 말했다. “사람이 다 좋은데 개성이 없어, 개성이. 특별하지가 않다고.” 면접은 떨어졌다. 지우와 함께 면접을 봤던 다른 청년이 붙었다. 지우보다 한 단계 더 높은 대학을 나온데다 아프리카로 해외봉사까지 갔다 왔다던 사람이었다. 지우는 탈락 통보를 받은 날 양복을 세탁소에 맡겼다. 다시 찾으러 가지도 않았다. 부모님께는 조금 더 공부를 한 뒤 다시 취직해보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하루 종일 컴퓨터만 했다. 그날도 다름없었다. 컵라면을 먹으며 인터넷을 하던 지우의 눈에 자극적인 문구의 성인사이트 광고가 들어 왔다는 게 다르다면 다른 점이었다. 헐벗은 여자가 나오는 아무 영상이나 틀어놓고 바지춤을 만지작거리던 지우는 댓글이 백 개가 넘게 달린 글을 발견했다. ‘지하철 여대생 도촬’이라는 제목의 글에는 10분 남짓한 동영상이 올라와 있었다. 댓글은 하나같이 글 작성자를 찬양하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걸 찍으셨어요, 정말 대단하세요. 지우는 바지 속에서 왼손을 빼냈다. 컵라면 냄새가 온 방 안에 퍼질 때까지 댓글만 바라봤다. 자취방 안에 붉은 석양이 들어오기 시작했다는 걸 알아차렸을 때 지우는 휴대폰 하나 달랑 들고 자취방을 빠져나갔다. 그게 시작이었다. 지우는 얼마 전 아예 캠코더도 샀다. 지우가 인터넷 사이트에 동영상을 올릴 때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찬양 댓글이 지우의 글에도 달리고 있었다. 지우의 왼손을 여자가 눈치 채는 바람에 오늘 영상은 7분 남짓하게 끝났지만 지우는 상관없었다. 사람들은 오히려 여자가 눈치 채고 언성을 높이는 장면을 더 좋아했다. 지우는 몇 번 더 지하철을 배회하다가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컴퓨터에 캠코더를 연결하고 영상을 옮기던 지우는 뭔가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라이터가 보이지 않았다. 분명 나가기 전까지만 해도 던져놓은 그대로 책상 구석에 있던 라이터였는데 감쪽같이 사라져있었다. 그때 누군가 지우의 자취방 문을 두드렸다. “택배입니다.” 지우는 침을 꿀꺽 삼키며 현관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지우가 도로 문을 닫으려고 할 때 지우의 발치에 무언가가 채였다. 작은 택배 상자였다. 상자는 가벼웠다. 노란색 테이프를 뜯어 상자를 열자 USB 하나와 파란색 라이터 하나가 보였다. 영상 업로드가 진행 중인 컴퓨터에 USB를 꽂자 동영상이 나왔다. 지우는 잠시 머뭇거리다 동영상을 재생시켰다. 몇 초 후 영상에 밝은 빛과 함께 남자 한 명이 들어왔다. 남자는 캠코더를 이리저리 돌리다가 곧 책상 구석으로 던졌다. 화면이 회전하는 것을 멈췄다. 책상 앞에 앉은 남자가 보였다. 남자는 지우 자신이었다. 지우는 떨리는 손으로 동영상 제목을 확인했다. ‘할 일 없는 변태의 일상’. 영상은 모자를 눌러쓴 남자가 방안에 들어와 캠코더를 가져가는 것으로 끝났다. 지우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USB와 함께 온 파란색 라이터를 바라봤다. 컴퓨터에서 영상 업로드가 완료되었다는 알림이 울렸다. 라이터 부싯돌 사이 아주 작은 검정색 점이 반짝이며 빛났다.   <소설 차상>  

까마귀와 그림자

 대광여자고등학교 3학년

조민정

  새가 떠나간 곳에는 그림자가 있었다. 새의 꼬리 끝에는 항상 그림자가 맞물려 있었는데, 나는 왜 그림자가 새를 따라 날아갈 수 없는지에 대해서 늘 의문을 품었다. 새는 그림자를 벗어나고 싶어서 떠나는 거야. 그러니까 그림자가 함께 떠나면 안 되는 거지. 형은 나의 의문에 그렇게 답하며 무언가를 불쑥 내밀었다. 그것은 은색 새장 안에 든 까마귀였다. 너무 까매서 그림자와 구별조차 되지 않는 그런 까마귀. “까마귀, 처음 봐.” 내가 말하자, 형이 입꼬리를 약하게 말아 올리며 웃었다. 흙냄새처럼 텁텁하기도 했고 알코올처럼 알싸하기도 한 웃음이었다. 형이 없을 때면 벽지에 핀 곰팡이의 개수를 세거나 물때의 모양을 보고 이름을 지어주며 시간을 죽이던 나는 이제 까마귀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까마귀는 정말로 새까매서 눈을 뜨고 있는지, 눈을 감고 있는지 구분이 가질 않았고 또 날려고 하지도 않아서 날개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정말 형의 말대로, 새는 그림자를 떠나고 싶어서 나는 것인가봐. 그림자가 까만 발끝에 엉겨 붙어 떨어지지 않으니까 까마귀가 날지 않아. 나의 말을 듣고 있던 형은 집으로 들어오던 걸음을 멈추었다. 그렇구나. 노력조차하지도 않았던 것이구나. 형은 빨갛게 부어오른 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미처 마무리하지 못했던 일이 있어서 잠시 나갔다 올게. 쾅, 하고 문이 닫혔다. 형은 또 무슨 일을 하러 가는 걸까. 형은 재주가 많은 사람이니 뭐든지 할 수 있을 것이다. 며칠 전에는 그림을 그려다 팔았다고 했다. ‘피카소 알지? 피카소의 그림처럼 입체적인 그림을 그렸단다. 물론 너도 그렸지. 너는 원, 뿔, 구… 이런 것들을 이용해서 그렸어. 색깔은 보통 검은색, 회색, 남색. 파느라 조금 애먹었단다. 옆집 김씨 할아버지가 사갔는데, 이런 우울한 그림을 사주는 것은 자기밖에 없다며. 참나, 그냥 하는 말이겠지? 그렇지?’ 형의 목소리가 아른거렸다. 형의 직업은 항상 바뀌었다. 의사, 판사, 시인, 화가, 큐레이터…. 형은 늦은 저녁에 집으로 돌아와 나에게 돈을 벌며 있었던 일들을 알려주었다. 항상 형의 그런 이야기를 듣고 당연하게 받아들이곤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나는 형이 그림을 그리는 것도 시를 쓰는 것도 제대로 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형은 그동안 뭘 하고 다닌 걸까. 형이 이따금씩 달고 오는 상처들과 손가락에 박힌 굳은살들의 출처가 문득 궁금해진다. “형은 허풍쟁이야.” 내 말이 먼지처럼 가라앉고 방 안에는 침묵만이 떠다녔다. 나는 눈을 꾹 감고 미약하게 남은 형의 냄새를 찾았다. 형의 냄새 대신 죽음처럼 졸음이 밀려왔다. 쏟아지는 졸음을 밀어내기 위해 뺨을 가볍게 두드렸다. 찰싹, 하는 가벼운 소리 뒤로, 요란하게 푸드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감고 있던 눈을 뜨고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형이 사준 까마귀는 없고 오직 빈 새장만이 끼걱끼걱 소리를 내며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새장 쪽으로 다가갔다. 새장 안에는 까마귀의 깃털 같은 그림자가 바닥에 눌어붙어 있었다. 나는 떠나간 까마귀를 찾지 않는 대신 조용히 현관문을 잠갔다. 돌아올 사람이 없었으므로 문을 열어둘 필요는 없었다.   <소설 차하>  

플레어링

 이화여자고등학교 3학년

김효민

  토슈즈에 물이 축축하게 배어든다. 나는 길게 늘어진 로맨틱 튜튜를 황급히 들어올린다. 대기실 바닥에 물이 엉망으로 고여 있었다. 공연 매니저가 나를 향해 멋쩍게 웃어 보인다. 프리마에게 어항이 선물로 온 것 같은데, 그게 흘러버려서……. 나는 바닥에 황망히 자리하고 있는 어항을 들여다본다. 그 안엔 유독 색채가 짙은 물고기 몇 마리가 물매를 가르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헤엄치는 물고기였다. 물고기들은 다른 것들과는 다르게 지느러미를 날개처럼 펼치며 헤엄쳤다. 팽팽히 솟은 지느러미가 펄럭일 때마다 붉고 푸른 비늘이 보랏빛으로 반사된다. 어유, 저것들 같이 두면 안 되는데. 베타 물고기라고 하는 것들인데 저들끼리 두면 서로 겁주느라 헤엄을 못 쳐요. 지금 쟤네 헤엄치는 게 아니라 플레어링이라고, 몸 부풀리면서 화내는 거예요. 자기들 건드리지 말라고. 매니저가 혀를 쯧쯧 찬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동공에 반짝이는 비늘을 그득 담는다. 지느러미가 아스라이 흐르는 모습이 꼭 발레 튜튜가 흔들리는 것 같았다. 아. 내 입새로 여린 신음이 흐른다. 나는 연습실 바닥에 주저앉아 토슈즈를 벗는다. 발꿈치에 손톱만한 가시가 박혀 있었다. 쟤지? 엄마가 감독이어서 프리마돈나로 꽂힌 애. 저런 애는 당해도 싸. 동료들의 목소리가 귓전을 적신다. 혀끝이 떨려온다. 나도, 발레, 하고 싶어서 하는 거, 아니야. 나는 잇새로 짓이긴 음절을 토해내며 숨을 크게 몰아쉰다. 손바닥 아래에서 플레어스커트가 힘없이 구겨진다. 내 목소리는 동료들의 웃음소리에 낮게 자취를 감춘다. 나는 다리를 절뚝이며 연습실을 나간다. 엄마의 방을 가득 메운 담배 연기가 코끝을 찌른다. 나는 엄마의 뒤통수를 향해 조용히 읊조린다. 엄마. 나 이제 정말 발레 그만둘래, 이건 내 길이 아니야. 엄마의 조소가 연기를 타고 흘러든다. 심장이 파르르 요동친다. 또 그 소리지. 너 발레 그만두면 뭐하게. 넌 우물 안 개구리에 불과해. 나 없으면 거기까지 올라가지도 못했어. 엄마가 날카로운 눈동자를 부딪혀온다. 엄마는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말 한 마디를 툭 던진다. 너 혼자 이 너른 바다에서 살아나갈 수 있을까?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다. 꼭두각시 인형처럼 그저 멀거니 서 있을 뿐이다. 무릎을 굽히며 드미쁠리에, 공중을 가르며 를르베. 공연은 기계처럼 늘 흐르던 대로 흐른다. 엄마는 맨 앞좌석에서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씬이 바뀌자 나는 빠르게 로맨틱 튜튜를 몸에 끼워 넣는다. 그 치마를 보니 문득 베타 물고기의 꼿꼿하던 지느러미가 머릿속을 스친다. 누군가 내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갔다. 다시 흐르기 시작한 음악 뒤로 그 아이의 목소리가 날아든다. 병신 같은 년. 귓가에 이명이 왕왕 울린다. 병신, 아무것도 못하는 병신. 화가 뜨겁게 치밀어 오른다. 머릿속 필름이 뚝 끊긴다. 나는 박자를 무시한 채 무대로 달려 나간다. 튜튜가 패랭이꽃 모양으로 솟는다. 플레어링, 나는 그 단어를 중얼거린다. 늘 웅크리던 나는 드디어 온몸으로 화를 뿜어내는 것이다. 나를 건드리지 마. 난 바다로 나아갈 거다. 나는 지느러미를 활짝 펼치며 몇 번이고 턴을 한다. 그러다 이내 무대를 박차고 뛰어나간다. 그렇게 날 가두던 어항을 깨뜨린다.     <소설 차하>  

0.4의 세계

 안양예술고등학교 3학년

송세미

  운이 좋았다. 무려 200:1이 넘는 경쟁률을 뚫고 마트 경품행사에서 1등을 하다니. 살살 긁을 때부터 좋은 결과를 직감했었다. 1등 상품으로 받은 신형핸드폰의 외관에는 로즈골드 빛이 은은하게 감돌고 있었다. 운이 좋았다, 고 생각했다. 적어도 핸드폰 키패드의 0.4를 발견하기 전까진 그랬다. 그러니까 *과 # 그리고 0부터 9까지의 숫자만 있어야 할 번호 키패드에 0.4가 난데없이 끼어들어 있었다. 불량품이 분명했다. 마트 측에 전화를 해봤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다. 나는 신경질적으로 0.4를 눌러댔다. 전화가 걸리지도 않았고 문자가 보내지지도 않았다. 0.4는 취업에 실패한 채 하루 종일 빈둥대는 삼촌처럼 무쓸모했다. 내가 다음으로 전화를 건 곳은 통신사였다. 통신사 직원의 대답은 놀라웠다. “아 고객님, 0.4는 저희 하이폰만의 신기능입니다. 0.4는 덧셈이나 뺄셈 같은 계산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무쓸모한 숫자입니다. 0.5 이상의 소수들처럼 1로 반올림되지도 못하고요. 고객님의 전화번호부에도 그처럼 쓸모없는 분들이 있으시죠? 그분들의 번호를 태그해 0.4에 갖다 대시면 그 번호가 삭제됩니다. 뿐만 아니라 키패드의 0.4는 여러분의 머리와 닿을 때마다 기억담당 뇌인 해마를 자극해 삭제된 번호의 주인에 대한 모든 인적사항을 지울 겁니다.” 직원은 여러 번 똑같은 말을 반복한 듯 기계적이고 정확하게 말을 쏟아냈다. 놀라웠다. 쓸모없는 사람에 대한 정보를 머릿속에서까지 지울 수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인터넷을 둘러보자 0.4를 이용해 매일 돈을 빌려달라고 전화를 하는 친구놈을 지웠다, 밥도 안 사면서 취업정보를 가르쳐 달라고 하는 후배를 지웠다… 등등의 글들이 넘쳐났다. 그들은 하나같이 만족스러워 보였다. 나도 시험 삼아 전남자친구의 번호를 0.4에 태그했다. 바로 옆반이라서 볼 때마다 여간 껄끄러운 게 아니었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 엄마는 내게 이렇게 물었다. “걘 요즘 뭐하니? 왜 네가 전에 사귀던 3반 애.”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런 애가 있었나? 그때부터 나는 본격적으로 0.4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나는 지영이의 번호를 0.4에 태그했다. 전학을 와 친구가 없던 내게 말을 걸어준 고마운 아이였지만 이젠 아니었다. 이젠 나도 친구가 여럿 생겼고 지영이는 성적도, 평판도 좋지 않아 같이 다녀도 득이 될 게 없었다. 0.4를 이용한 뒤 내 인생은 한결 윤택해졌다. 이제 내 전화번호부에 남아있는 사람은 스무 명이 채 되지 않았다. 명문대에 간 민영선배, 자기소개서를 잘 쓰는 찬미, 정보력이 좋은 이나… 모든 관계는 효율적으로 이뤄졌다. 집에 돌아가자 머리를 맞대고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부모님이 보였다. 둘도 어느새 핸드폰을 바꿔 0.4를 이용하고 있었다. 어느새 대부분의 사람들은 0.4를 구입하기 시작했다. “우리도 이만하면 많이 했지. 이젠 큰 형님이 보살필 차례예요.” 둘은 치매에 걸린 할머니의 번호를 0.4에 밀어 넣었다. 얼마 뒤, 학교에서 지영이란 여자애가 자살을 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아무도 자신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게 죽음의 이유였다. 누군진 몰라도 안됐다고 생각했다. 상품처럼 기능이 없으면 잊혀진다. 그건 0.4가 나오기 전에도 통용되던 섭리였다. 나는 엄마아빠와 둘러앉아 밥을 먹었다. 그들은 몇 십 년 뒤 늙고 노쇠해질 것이고 병으로 많은 돈을 쓸 것이다. 먼 훗날, 그들도 내 0.4가 될 거란 생각을 하며 밥을 한 숟갈 떴다.   <시 장원>  

못의 재발견

 안양예술고등학교 3학년

윤효진

  호두 두 알을 손에 쥔 채 곤히 잠드신 아버지가 보입니다 지난달까지는 가장 바쁜 한낮이었는데 텅 빈 거실에서 나른히 햇살을 쬐고 있습니다   낯선 오후의 정적 물 찬 손목시계 소리가 엇박으로 울려 퍼지고 아버지는 진물같은 침을 흘리며 구부러진 못의 자세로 뒤척입니다 누가 저기다 못을 박아놓았을까요 빗나간 망치질에 굽은 등이 점점 아래를 향해 바닥에서부터 드르륵 드르륵 코를 골아온 아버지 장롱 밑에 굴러들어갔다 오랜만에 세상 밖으로 나온 사람처럼 빛을 향해 온몸을 구부러뜨립니다 쉬는 날에도 새벽이면 눈이 저절로 떠진다더니 텔레비전 브라운관 위 회전목마 오르골이 알람소리처럼 같은 구간 반복 연주 중입니다 바람에 엉킨 머리카락 사이로 하얀 머리카락이 보이고 얼굴 위로 기울어진 전신줄 그림자가 내려앉습니다 반쯤 벗겨져 녹슨 굳은 살 아버지는 자신에게 가족을 걸어두다 납작하게 응축된 피곤을 바깥에다 이어놓았습니다   해질녘 노을 한 켠 접어두는 지금 손목시계 위로 까만 얼굴과 회전목마 오르골의 선율이 겹쳐지고 휘어진 못이 기지개를 켭니다 잠에서 막 깨어나기 시작한 아버지를 가만히 바라보는 중입니다   <시 차상>  

지하방

 현대고등학교 3학년

김도환

  달에서 얇게 썬 레몬조각 씨앗들이 사라졌다 그것은 파리를 책으로 내리쳤을 때 천장과 벽에 남은 흔적과는 차원이 다른 또 다른 맹점이었다 파리는 전구가 나간 스탠드에 앉아 열심히 침을 발라 세수를 하고 포병에서 전역한 형은 복학할 생각을 접고 은둔형 외톨이로 변태하고 있었다 중국집 배달 스쿠터를 타고 게임중독자의 얼굴로 중앙선을 넘나들었다 퇴직한 아빠는 약정이 지난 핸드폰으로 안개가 낀 새벽계곡의 꽃을 찍어 보냈지만 아빠가 떠오는 약수는 베란다의 식물들이 마셔버렸다 치매가 심해진 할머니는 아빠를 부를 때마다 돌아가신 할아버지 이름을 불렀다 상만이 오빠아 아카시아 꽃이 피었는데 우리 언제 하늘을 봐요? 오늘밤 회전목마에서 만날까요 아파트에만 젱일 틀어박혀 있으니 누에고치가 따로 없어요 빨래걸이로 전락한 러닝머신에 앉은 아빠는 한마디 말없이 손목시계의 초침을 바라보았다 여동생 방에서 오래된 레몬즙 냄새가 흘러나왔다 다리를 털면서 마우스를 클릭하는 소리가 형의 방안에 깡통 따개를 쌓아올렸다 나는 물휴지로 지구본스탠드를 닦았다 미립자로 앉은 어두운 지구의 밤들이 걷히고 지구보다 헐렁한 방의 우주에서 외로웠다 지구본 달이 밝히는 우주의 귀퉁이에서 누군가에게 다가가기 위해 나는 자판기를 두드리는 습관을 들였다 각자의 세계에 웅크리고 있는 사람들 어금니로 푸른빛을 깨문 나는 모니터 속 화살표 커서에 글자를 이식하고 있다   <시 차하>  

엄마찻집

 삼성고등학교 3학년

안찬우

  시장통 너머 시간이 뒤집어진 골목 낡은 나무 간판을 길러온 전통찻집이 있다   한 사람의 티타임을 위해 달여진 달맞이차 엄마도 이 골목에 가게를 내놓으려고 매일 밤 산달을 앓았을까 새파란 머리의 어머니 무녀리 동생과 아버지 놀이공원, 회전목마 유년의 기억도 찻잔 안에서 회전한다 꽃물 자작한 차의 맛을 알게 되었을 때 눈앞에 서있던 반백의 어머니 매달 기다리던 보름이 얼마 전 문을 닫았다는 것은 농담이 아니겠지 엄마를 대신해 차오른 달맞이 꽃차, 엄마의 주름진 얼굴이 찻잔 위로 보기 좋게 피어오른다 계절과 계절 사이 시계의 초침을 연중 흐르고 ‘가을철 인기 꽃차’를 검색하시던 어머니 새 화분을 들이려 달맞이 화분을 치운다 이만하면 됐지 싶다 이만하면 잘 살았지 싶다 찻집을 들르는 사람들의 수다가 흐드러지는 오후 새파란 어머니의 가냘픈 손목시계는 찻집 모퉁이에서 끓는 점을 기다린다 귀퉁이가 깨진 찻잔 안에서 어머니, 단잠을 자고 있는 중이다   <시 차하>  

아버지

 동아여자고등학교 2학년

최윤정

  내가 ‘당신’이었다는 것을 잊고 당신을 꺼내먹었다 잘린 당신의 머리에서는 화살나무가 자라났다 생살을 가르고 나오는 화살촉 줄기엔 자줏빛 조등이 걸려있었고 나무활의 시위는 나를 향해 뻗어 있었다 목에서 가슴으로, 가슴에서 다리로 붉은 반점이 점점 피어올랐다 나는 미친 듯이 사타구니를 긁으며 발화되기 직전, 그 싱싱한 언어를 씹고 있었다   나는 얼굴의 범주를 잃어갔고 회전목마 기둥의 거울처럼 흐릿해져 갔다 당신의 눈은 나무의 겨울눈처럼 하얗고 나의 그림자는 길었다 손을 쥐었다 펴는 그 찰나, 갈라지는 당신을 보았고 당신의 손목시계 틈 사이로는 시간이 유실돼 흘러 내렸다 나의 시간까지 씻어 내리며   나무의 잔가지는 나의 속눈썹처럼 파르르― 떨고 있었고 당신이 자랐던 시간을 먹어치우듯 내게로 뻗어진 가지들은 모두, 송곳니로 끊어버리곤 했다 나무의 열매가 둥글어진 것은 그 후의 일이었다   화살촉에 찔려 생채기가 날 때면 나의 몸에선 나무가 자라나기 시작했다 붉은 반점은 투명해진 채 둥근 열매가 되었다 손톱 밑 여린 살에서부터 나무의 씨앗이 뿌리내려졌고, 내 몸은 활처럼 휘어져갔다   당신을 향해 살을 당긴다   <수필 장원>  

오빠의 택배

 문일여자고등학교 3학년

마세영

  아빠는 언제나 오빠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오빠가 중학교 그리고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아빠와 오빠의 사이는 멀어져만 갔다. 오빠는 시간이 지나 군 입대를 할 때가 되자 아빠의 자부심인 해병대에 입대하겠다고 말했다. 결국 오빠는 해병대 입대 신청에 통과하게 되었고, 오빠의 입대 날은 다가오고 있었다. 엄마는 식탁에 잘 갈무리된 반찬을 내려놓으며 오빠를 빤히 바라보았다. 내일 오빠가 입대를 하는 게 못내 아쉬운 눈치였다. 오빠는 고슴도치처럼 삐죽 솟은 머리를 긁적이며 어색하게 웃었다. 엄마는 아무 말 없이 수저를 들어 올리는 아빠의 어깨를 툭툭 쳤다. “머리 저렇게 바짝 깎으니까 진짜 군인 같지?” 엄마의 말에 아빠는 그저 인상을 찌푸리며 유난 떨지 말라는 말만 툭 쏘아붙였다. 엄마는 툴툴대며 수저를 들었다. 아빠는 아무렇지 않은 듯 밥을 떠먹으며 오빠를 흘깃거렸다. 오빠를 흘깃대는 아빠의 눈동자가 희미하게 일렁이는 것만 같았다. 덜컹거리던 차가 이내 멈춰 섰다. 오빠는 머리에 푹 눌러 쓰고 있던 모자를 벗으며 차문을 밀어 열었다. 오빠의 버석한 머리가 햇빛을 받아 유난히 도드라져 보였다. 나는 오빠를 따라 차에서 나오며 어색하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빠는 이내 시동을 끄며 차문을 밀어젖히며 나왔다. 오빠는 아빠와 엄마 그리고 나를 바라보며 어색하게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아들, 잘하고 와.” 엄마는 오빠를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 오빠는 엄마의 품에 꼭 안긴 채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빠는 아무 말 없이 오빠를 빤히 바라봤다. 오빠는 느릿하게 아빠에게로 다가섰다. “잘 하고 올게요.” 오빠는 물기에 젖은 듯한 축축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는 그래. 짧게 대답하며 오빠의 어깨를 툭툭 쳤다. 오빠는 슬쩍 입 꼬리를 올리며 이내 뒤돌아 걸어갔다. 아빠는 오빠의 뒷모습이 점이 되어 아스라이 사라질 때까지, 눈을 떼지 못했다. 낯선 택배 상자가 현관에 자리 잡고 있었다. “오빠가 입고 간 옷 보냈나 보다.” 엄마는 택배 상자를 열며 말했다. 상자에 붙여져 있던 테이프를 뜯어내자 익숙한 오빠의 냄새가 밀려들었다. 상자 안에는 오빠가 입고 간 옷가지와 편지봉투 그리고 군복을 입은 오빠의 폴라로이드 사진이 들어있었다. 아빠는 상자를 흘깃 보다 푸른색 편지 봉투를 꺼내 들었다. 봉투에 투박한 손글씨로 ‘아버지에게.’라고 쓰여 있는 게 보였다. 아빠는 가만히 편지 봉투를 바라보다 이내 안방으로 향했다. 나는 느릿하게 아빠의 뒤를 쫓았다. 살짝 열린 안방 문 틈새로 아빠의 목소리가 비집고 들려왔다. “그래. 아들놈이 나 따라 해병대 간다 하더니 잘 지내고 있나 보더라.” 아빠는 친구와 통화를 하는지 핸드폰을 꼭 쥔 채로 말했다. “오늘 택배에 편지도 보냈다. 지 잘 지낸다고. 그래도 내가 자식 농사는 잘했다. 싶더라.” 아빠는 말갛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빠의 손에 들린 편지 봉투에 투박한 손글씨가 눈에 아른거렸다. 나는 아빠를 따라 환하게 웃어보였다. 아직도 택배 상자 안에서 익숙한 오빠의 냄새가 밀려드는 것만 같았다.   <수필 차상>  

긴 생머리 그녀

 고양예술고등학교 1학년

변자영

  인터폰에서 벨소리가 흘러나왔다. 택배회사 조끼를 입은 남자가 화면을 가득 메웠다.   “누구 왔니?”   엄마가 설거지를 하다 말고 물었다. 택배라고 하자 엄마는 서둘러 고무장갑을 벗더니 현관문으로 달려갔다. 택배봉투를 꼭 끌어안은 엄마는 안방으로 가 봉투를 뜯었다. 내가 내용물을 보려고 하자 엄마는 그 내용물을 황급히 이불 속으로 밀어 넣었다.   “또 옷 산 거야?”   엄마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구제 옷 쇼핑은 엄마의 몇 안 되는 취미 중 하나였다. 엄마는 주로 구제 인터넷 쇼핑몰에서 옷을 사곤 했는데, 택배가 올 때마다 아빠는 엄마에게 잔소리를 퍼부었다. 옷장 가득 쌓여 있는 옷을 가리키며 입지도 않을 거 왜 사냐고 물으면 엄마는 고개를 푹 숙였다.   “아니, 다 입는다니까…….”   엄마는 조그마한 목소리로 말꼬리를 흐렸다. 엄마와 아빠의 전쟁은 언제나 엄마가 더 이상 사지 않겠다고 약속하며 끝이 났다. 그래도 택배기사들의 방문은 끊이지 않았다. 배달이 오면 엄마는 택배봉투를 처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엄마는 이번에 온 택배봉투를 작게 접어 쓰레기통 깊숙이 쑤셔 넣었다. 엄마가 못 보던 원피스를 입고 외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제 배달 온 옷인 것 같았다. 어딜 가냐고 묻자 엄마는 건강검진 결과를 들으러 간다고 했다. 원래 가족이 다 같이 받는 검진이라 며칠 전에 한꺼번에 결과가 나왔었다. 그런데 엄마만 따로 정밀검사까지 받게 되어 이제야 결과를 듣게 되었다. 엄마가 병원에 가고 얼마 뒤에 문자가 한 통 왔다.   ‘엄마 조금 늦게 들어갈 것 같아.’   그날 엄마는 10시가 넘어서야 들어왔다. 엄마는 많이 피곤한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곧장 안방으로 들어갔다. 다음 날부터 엄마는 매끼마다 여러 개의 알약을 먹기 시작했다. 엄마는 그 약이 갱년기와 관련된 거라고 말했다. 엄마는 점점 활기를 잃어갔고 말수가 줄어들었다. 마치 축 늘어진 파김치 같았다. 인터넷으로 옷을 구경하다가도 자꾸만 한숨을 내쉬었다. 화장실 세면대에 머리카락들이 떨어져있었다. 누군가 머리를 빗다가 빠진 거라고 하기에는 양이 너무 많았다. 동생이 빗에 끼인 머리카락을 뺀 뒤 치우지 않은 건가 싶었다. 그러나 빗에는 여전히 머리카락이 감겨 있었다. 화장실뿐만이 아니었다. 거실 바닥에도 머리카락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안방도 마찬가지였다. 안방 화장실에서 불빛이 새어나왔다. 문틈으로 엄마의 뒷모습이 보였다. 엄마의 손가락이 머리카락 사이사이를 훑고 지나가자, 머리채를 잡고 싸우기라도 한 것처럼 머리카락이 한 움큼 뽑혔다. 엄마의 입에서 나온 한숨이 갈 곳 잃은 머리카락을 멀리 흩뿌렸다. 한동안 엄마의 구제옷 택배는 오지 않았다. 매일 사소한 일로 엄마와 언성을 높이던 아빠도 요즘은 잔소리를 아꼈다. 우리 집의 분위기는 평소와 다르게 조용했다. 모두 무언가 알고 있지만 그것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것 같았다.   “띵동.”   외출이 잦아진 엄마가 나간 사이 오랜만에 택배가 왔다. 택배 상자가 아닌 봉투인 것으로 보아선 엄마가 간만에 옷을 산 모양이었다. 나는 택배봉투를 안방 화장대에 올려두었다. 갑자기 엄마가 산 구제 옷에 대한 궁금증이 치밀어 올랐다. 택배봉투를 뜯자 비닐에 싸인 내용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 안에 들어있던 것은 옷이 아니었다. 그건 바로 가발이었다. 택배봉투 속에서 작은 명함을 발견할 수 있었다. 커다랗게 적힌 ‘가발나라’ 밑에는 작은 글씨로 무언가가 적혀 있었다.   ‘유방암 환자들을 위한 가발 맞춤 제작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지만 마음속에서 알고 있던 무언가가 확신이 되어 온몸을 흔들었다. 내 손에 부드럽게 감기는 엄마의 가발을 만지작거리며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삑삑,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수필 차하>  

택배

 

구지선

  오래된 터미널 상가 2층에 있는 할머니의 한복집에 택배 하나가 왔다. 정갈하게 쓴 받는 곳과 달리, 보내는 곳은 알아볼 수 없었다. 연변에서 보내는 택배라는 게 부끄러운 것일까. 익숙한 택배였다. 미주 언니는 너덜너덜한 박스를 테이프로 감아 볼품없는 이 택배를 받을 때면 환한 미소를 지었으니까. 더 이상 반기는 수령인이 없는 택배는 구석에 덩그러니 남겨졌다. 교복을 입은 내 모습을 무척이나 부러워하던 언니는 뜬금없이 내게 물었다. 나 앞으로 뭐해야 될까. 항상 여기서 살아야 할까. 어디든지 갈 수 있는 사람들이 부러워. 나는 차를 마시며 별 고민 없이 한복집을 차리라고 했다. 언니는 피식하고 웃으며 말없이 바느질을 했다. 나는 언니가 떠난 뒤에야 내가 언니의 고민을 너무 쉽게 말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할머니가 넓은 천을 잘라서 중심 바느질을 마치면 언니는 마무리 작업을 돕는 일을 했다. 주말이면 바느질을 하는 언니 옆에 꼭 붙어서 시시콜콜한 수다를 떨었다. 언니는 열아홉이고 연변에서 건너와 한국에 정착한 지 삼 년이 되었지만 여전히 먼 곳에 있는 가족이 그립다고 했다. 그 그리움을 잊으려고 바느질을 멈추지 않았을까. 항상 같은 자리에서 없는 듯 조용히 바느질만 하던 언니가 한복집을 떠난 것은 아무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언니는 수납함에 들어있는 40만원과 짐 가방 외에는 달리 가져간 것이 없었다. 며칠이 지나도 미주 언니가 오지 않자 나는 울적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할머니는 구부정한 허리에 뒷짐을 지고 내게 말했다. 너무 서운해 마라. 미주가 특히나 너한테 정이 깊어서 더 그랬을 것이다. 할머니는 미주 언니와 함께한 시간을 바느질하듯, 한 땀 한 땀 정성을 기울여 홀로 한복을 완성해나갔다. 나는 보내는 곳과 받는 곳이 같아서 이곳을 벗어나지 못한 채 맴도는 것 같아. 언니는 씁쓸한 표정을 하고, 한복집 창문 너머로 보이는 고속버스를 보며 말했다. 그냥 흘려들었던 언니의 입버릇 같은 말이 내 머릿속에 맴돌았다. 간신히 테이프로 버티고 있는 택배 상자는 커터칼이 다 들어가기도 전에 날개를 내놓았다. 이제 반대쪽만 뜯으면 미주 언니가 은밀하게 뜯어보는 택배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나는 커터칼을 가져가다 멈췄다. 지금 뜯어버리면 언니는 또 다시 한복집을 벗어나지 못할 것 같았다. 나는 커터칼을 수납함에 집어넣고, 테이프를 꺼냈다. 흐물해진 박스의 날개를 잡고 다시 모양을 잡았다. 테이프를 길게 뜯어 붙였다. 그리고는 배송지가 적힌 스티커를 손톱으로 긁어 떼어냈다. 깔끔하게 떨어져 나가지는 않았지만, 받는 곳도 보내는 곳도 더 이상 적혀있지 않았다. 나는 언니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지만, 언니는 첫 걸음을 뗀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신도 모르게 붙어버린 도착지를 떼고 직접 스스로가 내딛는 첫걸음 말이다. 나는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은 언니의 택배를 언니가 종종 서 있던 한복집 창문 근처에 내려놓았다.   <수필 차하>  

삶의 택배

 

완도금일고등학교 3학년

박은서

  “이거 다 보내는 거야?” “응, 다 택배로 부칠 거야”   그날은 집안이 상자로 가득 차 있었다. 학교를 마치고 돌아와 보니 가구들은 이삿짐센터를 통해 보내고 자잘한 물건들만이 상자 안에 담겨있었다. 나의 물건이 담긴 상자도 한자리를 차지했다. 내 손으로 직접 담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이질적인 느낌이 들었다. 별 물건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니었다보다. 좁긴 했지만 초등학생 딸과 그녀의 엄마가 살기엔 넉넉한 곳이었는데 그곳이 한가득 메워진 걸 보면 이곳에서 만들어 낸 추억이 이렇게 많든가 의구심이 피어올랐다. 처음 이사한다는 말을 들었을 땐 무슨 일이 있어도 가고 싶지 않다고 느꼈다. 어린 날의 나에겐 친구가 필요했고 지금 서 있는 이 자리가 내 친구가 있는 유일한 곳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낯가림이 심한 나에게는 새로운 곳, 새로운 친구, 새로운 삶은 버거운 것이었다. 앳된 눈에 한가득 눈물을 담기 싫다고 말했다. 침대로 뛰어들어 베개에 얼굴을 박고 갖은 투정을 쏟았다. 그러자 엄마가 다가와 떨리는 나의 몸을 감쌌다. 그렇게 담담하게 내 떨림을 받아주었다. 엄마의 손은 따뜻했고 단단했다. 하지만 난 그녀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그녀의 목 안에 죄책감과 처절함이 묻혀있는 걸 알지 못했다. 멍하니 집을 바라보고 있는 사이 엄마가 택배를 보내러 밖으로 나갔다. 택배기사가 나의 추억을 차 안으로 집어던졌다. 나는 아직 보낼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이곳에서의 내 자리는 이미 지워졌다. 그렇게 차가 떠났다. 그 차가 어디로 떠날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내가 앞으로 지내게 될 곳인 건 알겠지만 가보지도, 상상해 본 적도 없는 곳이었다. 하지만 차는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이 빠르게 나에게서 멀어졌다. 이곳에서 나의 삶이 떠나갔다. 그날 밤 이불 한 장을 거실에 깔아놓고 엄마와 둘이 잠자리에 들었다. 전등에서 죽어있는 벌레를 세며 택배로 보내진 내 삶을 생각했다. 어디로 도착해 나를 이끌어줄까. 안전하게 도착은 했을까. 수많은 감정과 생각이 뒤엉켰다. 그때 엄마가 내 손을 잡았다. 딸, 미안해. 뭐가? 이사 가는 거 말이야. 그게 왜? 가기 싫어했잖아. 괜찮아. 일부러 담담한 척 말했다. 더 이상 엄마에게 큰 짐을 지게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엄마는 괜찮다는 말을 듣고 아무 반응이 없었다. 나는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뒤돌아 있는 엄마의 어깨가 흔들리는 걸 보았다.   “엄마, 울어?”   희미한 달빛 아래에서 엄마가 울고 있었다. 어떤 소리도 내지 않으려 쌓여있는 슬픔을 삼키고 있었다. 그때 알았다. 내가 이곳에 미련을 갖는 만큼 엄마에게도 추억이 존재한다는 것을. 무엇보다도 딸이 싫어하는 일을 하는 것이 죄책감이 되어 밀려온다는 사실을, 알았다. 나는 그녀의 등을 껴안았다.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 그녀가 내게 해주었듯이. 이제는 안다. 내 삶을 빼앗는다고 느낀 엄마의 심정을. 하지만 그 택배는 그런 역할이 아니라는 것 역시 안다. 택배는 단지 내 삶을, 이어주는 것이었고 택배가 도착한 곳에서 많은 추억을 만들 수 있었다. 나는 그 택배 때문에 성장할 수 있었다. 이제는 말하고 싶다. 엄마, 이젠 혼자서 택배를 보낼 수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