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pup zone

1964년 제 2회 콩쿠르 수상작(송영섭, 윤상규, 최명희, 이재순)

등록일 2015-06-26 작성자 학과관리자 조회 1356
<시부 장원> 주발 송영섭(대전 보문고) 나의 주발에는 하늘을 담자. 하늘같이 어진 은혜를 담자. 나의 주발에는 기린같이 목을 늘이고 서서 산을 바라보는, 산을 바라보며 언제나 착한 아들이 되나 착한 아들이 되나 하고 염려하는 눈빛을 담자. 얼르고 달래서 보다의젓하고 튼튼한 재목을 만들자고 사시사철 모진 시련을 가해오는 눈보라나 비바람 같은 늘 ?기워 푸른 구름 사이의 하늘 같은 그런것들로 도타운 씨앗이 자라고 가없는 바다 어느 구비진 물목에서 노도에 찢기는 두려움같이 가난한 생활을 용하게 끌어올려주시는 어머니의 까실까실한 입술을 담자. 효성이 모자라서 심장은 대견하니까 따뜻한 품자리에 묻힌 혈은, 저녁마다 등잔 아래에서 떡을빚고 날만 새면 시장에 나가 어린것들을 길러주시는 어머니의 그윽한 눈길을 담자. <언제 커서 아들 노릇을 하나, 어느 세월에 자식 덕보며 살게 되나> 어머니는 틈만있으면 푸념인가 애정인가 바다같이 엄숙하게 계절이 나의 안에서 나를 키우고. 그윽한 눈길에 비치는 것. 날마다 새벽 마다 맑은 물 떠놓고 아들을 빌어주시는 그윽한 눈길에 비치이는 것. 그것은 달처럼 무거운 피로이실까. 별같이 숱하게 쪼개져 다라나는 먼 기억속에서 저미어 오는 아픔일까. 나의 주발에는 언제나 간절한 숨이배어있고, 너무 값지고 맛있는 사랑이 담겨나와서 목을 메이게 하는 격정의 소용돌이 속에 나는 가없이 울고플리야. 울어서 노을처럼 타 오르는 숲이 되고플리야. <시부 가작> 바다 윤상규(윤후명, 용산고) 눈빛 요란한 얼굴로 바다는 몸부림의 숨막히는밤을 무수하게 지새운 한 마리의 성난 짐승일 것이다 연한 꽃잎 요정이 놀다간 오월 어느 날 참으로 은은한 저녁 종소리처럼 그는 지금 나즉한 목청으로 울고 있구나. 노을이 넘쳐 깔리는 언제나 이 때마다 곱게 사라지는 하루의 모습을 그는 소중히도 간직하고 있다. 환하게 물결치는 새 아침을 말하라. 낙일의 바다여. 늘 떠나는 환상을 가슴 가득히 품고 울부짓는 바다여. 날마다 듣기좋은 모음으로 바다와 나는 속삭이고 있다. 금빛 자욱한 저녁 바다에 서면 내 안에 모든 곳을 철 철 넘쳐흐르는 서정의 강물. 어디서 조용히 들려오는 귀익은 목소리. 가장 깊숙한 곳에 포효를 파묻은 채 바다는 여기, 해일이 남긴 아픔을 안고 새로운 빛남의 아침을 기다리는 것이다. <소설부 장원> 잊혀지지 않는 일 최명히(전주 기전여고) 늦바위 고개는 호젓했다. 그렇게 칙칙하고 음산하던 소나무들도 다 베어지고 잔 소나무만 엉성히 서 있었다. 그리고 두려움의 대상이 혼자 되어오던 늦바위도 이제는 그저 한 바윗덩어리의 형체만 남아 뭉텅하니 앉아 있었다. 나는 멍청스레 그 바위를 바라 보았다. 늦바위는 내가 어렸을 적만 해도 꼭 사람 같았다. 그래서 산마을 사람들은 그 바위 모양이 꼭 머리 풀고 앉은 여인같아 과부 바위라고도 했다. 그리고 그 늦바위는 우중충한 날이면 조금씩 움직여 산 길 한가운데 앉는다는 말도 있고 비가 오는 날밤에 흐느껴 우는 소리를 직접 들었다는 사람도 있었다. 또 읍내 장에서 돌아오던 장꾼들 중에 담이 좀 크다는 사람이 하루는 불을 켜 들고 늦바위에게 슬슬 다가갔더니 어느 새 바위는 벌떡 일어나 저 쪽 기슭에 가서 다시 쪼그리고 앉더라는 것이었다. 국민학교 5학년이던 나는 그 말을 듣고 무서워서 며칠은 억지로 학교에 가곤했다. 아무리 비가 와도 누나랑 같이 기어히 학교에 가야했다. 누나는 육학년이었다, 만약 아픈 날 외에 학교에 가기 싫다고 안 갔다가는 아버지에게 회초리로 맞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이 산마을의 많은 아이들 중 국민학교를 제대로 졸업한 사람은 없었다. 모두 오학년쯤 다니다가는 머슴으로 가거나 나무꾼이 되었다. 아버지도 어쩌다 한 번씩 검사를 나오는 국유림에서 풀나무를 해다가 읍내에 팔곤했다. 우리는 원래 읍에서 살았지만 얼마 전에 이 산마을로 들어왔다. 왜 그 큰 집을 팔고 이 산골짝으로 들어와야했는지, 왜 일이라곤 모르던 아버지가 지게질을 하며 삼십리가 짱짱한 산 길을 넘어 읍내로 나무를 팔러 나가야 했는지. 어린 소견에도 이상하고 알 수 없었다. 가끔 아버지는 "임자! 미안시럽소……." 하고 어머니에게 말했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무심 말씸을 그렇게 허싱기라우……  살자면 다 그렇재." 하고 맞받아 말씀하셨다. 어느 무더운 여름 밤이었다. 낮에부터 쨍쨍하던 하늘이 기어히 비를 내리고 말았다. 늦은 여름 비는 끈적끈적하게 달겨 붙었다. 금방 산에서 풀 나무를 해온 아버지는 잠뱅이를 훨훨 벗어던지고 부채질을 활랑활랑 하셨다. 비는 쏟아질 듯 하다가도 꾸적꾸적 내리는가하면 집안은 끕끕하게 눌렸다. 아버지는 줄줄 흐르는 땀을 닦으며 "에이! 원놈의 날이 지랄 허게 더웁디아 쏘내기가 한번 쏟아지면 좀 시연히야재 원 비가오나 안오나 똑 같구먼……." 하고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그 때 나하고 나란히 업드려 숙제를 하던 진녀누나가 벼란간에 뒤로 나자빠지더니 눈을 뒤집고 떨기 시작했다. 나는 놀라서 울기 시작하고 어머니는 당황해 허둥대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부채를 내 던지고 방으로 뛰어 들어오셨다. 조금 후 아버지는 베잠방을 뀌셨다. 어머니는 울듯한 얼굴로 "어짤라고 그러시오 "하고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지는 "읍내장에 가야지…… 늦으면 죽어. 분녀년도 일찍 서둘렀으면 안죽었어" 하고 침통한 어조로 말씀하셨다. 분녀라는 말이 나오자 어머니는 돌아서서 눈물을 훔치었다. 분녀는, 나는 본일도 없는 큰누나라는데 어려서 풍을 앓고 죽었다고 했다. 진녀누나도 지금 풍을 앓는다고 허둥댔다. 나는 공연히 가슴이 출렁하고 눈물이 막 쏟아졌다. "그래서 이 밤에 기여 읍내를 가실라요  늪바위 고개를 어뜨케 지낼라고 그러시오……. 여간 무서운 고개여야 말이재……." "갔다오께……. 후딱 갔다오야재……. 설마 죽을 랍디여 " "아이고……. 그리도……." 어머니는 어찌할 줄을 몰라 종잡을 수 없이 허둥대기만 했고 아버지는 비가 군질군질 내리는 먹칠 같은 속으로 뛰듯이 가셨다. 아버지가 가신 뒤 어머니는 진녀누나 손발을 주무르며 울 듯 울 듯 하다가도 울음을 삼키셨다. 그날 밤 아버지는 돌아오시지 않았다. 이튿날 새벽 날씨는 씻은 듯이 개이고 하늘이 푸른구슬빛이 되었다. 어머니는 몇번이나 고갯길을 바라보시며 안절부절을 못하셨다. 진녀누나는 기운이 다했는지 혼곤히 잠이 들어 있었다. 어머니는 마루끝에서 서성이는 내게 "갑재야, 너는 멋을 그러고 섰냐  하마 아부지는 읍내서 주무신 갑다 어젓깨 밤에는 깨나 비가 쏟아졌는디……. 너는 어서 학교갈 채비나 채려." "엄니, 누우는 오널 학교 못가겠고만." "잉……. 그럴랑가 모리겠다." 나는 누나가 학교에 못갈른지 모른다는 말에 풀이 죽었다. 막 돌아서는데 "아이고……." 하는 낮고 날카로운 어머니 소리가 들렸다. 아랫집 성안양반과 탑골양반이 아버지를 둘러매고 뒷곁으로 들어온 것이다. 얼굴이 찢기고 옷이 피로 흥건한 아버지를 본 어머니는 입을 쩍 벌린 채 다물줄을 몰랐다. 성안양반은 담배를 붙여 물더니 "걱정하겠지라우  엉굴양반도 미쳤재. 그 무선 늦바우고개를 어뜨케 그 비오는 밤에 온다요……. 아 글씨 우리는 어저께 낮에 갔다가 비가오는 바람에 읍내서 하룻밤 잤지라우……. 엉굴양반이 막 솔밭을 헤치고 댕긴몬양이라 무서먼 헛것도 뵈거덩……. 아글씨 새복길에 막 오는디 늦바우 고개밑에 씨러져 있드랑게……. 어서 지름질이 나야 살재……. 쩟쩟." 하고 말하며 내려갔다. 늦바위고개는 무척 가파른 길이었다. 늦바위가 버티고 ?은 고개에는 음산하고 칙칙한 잡목숲이었다. 그리고 바람이 없이 햇발이 고운날에도 이상하고 으시시한 바람이 끊일새가 없었다. 칙칙한 소나무 빛깔은 어찌보면 검기도 했다.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를 소름이 끼칠 지경이었다. 더구나 늦바위고개 밑에는 인공때 후퇴하던 빨치산이 무더기로 학살되었다는 넓덕하고 긴 무덤이 있었다. 똑 얼마전에는 겁많은 아랫마을 처녀가 으스름한 저녁에 그 고개를 넘다가 실신을 하고 미쳤다는 소문이 돌았다. 아버지는 사흘을 앓다가 돌아가셨다. 산마을에서는 귀신이 들려 죽었다고 쉬쉬거렸다. 그 때 읍내에서는 호열자가 한창이었다. 풍을 앓고난 진녀누나는 얼굴반쪽을 못쓰고, 웃을 때에는 얼굴이 뒤틀리며 이상하게 실룩거렸다. 그것마저 동내에서는, 귀신이 집안에 머무른 탓이라고 쑤근대어 상종을 꺼려했다. 또한 같이 읍내학교에 다니던 아이들도 하나씩 둘씩 학교를 그만 두기 시작하더니 끝내는 진녀누나까지 학교에 안가겠다고 했다. 그날 밤 어머니는 밤이 늦도록 노기를 띄우고 우리남매를 훈계하셨다. "느그들은 배워얀다. 어찌든지 배워얀다. 느그 에미는 무식히서 이렇게 살재만 느그들은 꼭 배워서 도시로가 살어라. 지발 이 골짝서는 살지마라. 느그 아부지도 평상 느그 공부걱정만 허셨드니라. 부지런히히라. 느그들은 본토양반이랑것을 알어야히여…….." 어머니말을 들으며 누나는 울었다. 누나는 공부하기 싫어서 학교에 안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어제 읍내에서 놀림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읍내 머슴애들은 누나가 지나가자 "곰보곰보 양곰보 바들바들 풍곰보." 하고 놀리며 돌을 던지고 침을 뱉었다. 누나는 원래 어려서 천연두를 앓아 얼굴이 빈틈이 없이 얽었다. 그래도 어찌나 상냥스럽고 영리한지 "그저 엉둘댁 빼다박었당게……" 하고 칭찬하는 동네사람들의 소리를 들을 때 나는 어깨가 우쭐거리곤 했다. 또 일도 무척 잘해서 어머니도 겨우 당하시는 이불빨래 같은것도 뒷개울에 가져가 야무지게 빨아오곤 했다. 동네서는 모두 진녀누나가 얽보인 것을 안타까워하고 아까워 했다. 그러던 누나가 풍을 앓고난 뒤 얼굴이 이그러지고 손이 가늘게 떨리었다. 내가 보기에도 고개가 돌려질 만큼 뒤틀리는 얼굴이었지만 그래도 나는 누나가 좋았다. 나도 전처럼 그렇게 웃을 수는 없었지만 나를 더 아껴주었다. 우리는, 지름길이 나면 시오리밖에 안되는 길을 그 무섭고 음산한 산길로 돌아서 가자면 삼십리가 짱짱했다. 요즘은 더구나 그 늦바위있는데를 지나자면 등골이 소름이 끼쳐 도망가듯 달리는 것이었다. "누우! 지금질이 나먼 참 좋겄징 " "잉……..갑재야. 저……. 지름질이 생기면 인자 좀 편헐턴디……" "글고(그리고) 아부지도 안 돌아가셨을랑가 몰른디……" "긍게 말이다….." 이런 이야기들이 우리 남매에게서만 있는게 아니라 동네 모든 사람들이 그저 만나면 지름길 이야기였다. 그러다가 날씨가 추워지기 시작했다. 첫눈이 내렸다. 얼음이 얼었다. 이제는 땅속까지 언 듯 싶었다. 모두들 코끝도 내보이지 않았다. 나랑 진녀누나가 학교에 가지 않은지도 거의 한 달이 되어갔다. 정부에서는 무슨 셈이섰는지 야산에도 산지기 장정을 대여섯씩이나 두었다. 산에 들어서지도 못하게 했기 때문에 풀나무 커녕 산 속 구경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되자 우리 세 식구는 두 손 벌리고 앉아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산마을에는 작년에 보리 농사도, 고구마 농사도, 심지어 옥수수 농사도 모조리 망쳐 버리고 말았다. 그렇기에 가뜩이나 가난한 동네는 굶기 시작하는 집이 하나둘이 아니었다. 더구나 탑농댁이 말하기를, 칠십 평생에 처음이라는 추위가 닥치는 마을은 죽은 것 같았다. 음력 설을 보름 앞 둔 동네는 불안에 싸여 엉성하기 이를 게 없었다. "아이고, 지름질……" "그 놈의 지름질만 있어도 이러고서 있겠능가….." 모두가 만나면 하는 소리었다. 사실 얼마전에 강골양반이 견디다 못해 산지기 몰래 나무를 해서 읍내로 지나가다가 그 멀고 북풍이 정면으로 몰아치는 산 고갯길에서 쓰러져 죽은 뒤 모두들 읍에 나갈 일은 엄두도 못냈다. 고픈 배와 몰아치는 바람은 사람을 죽이는 능력이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연 나흘을 굶었다. 얼음조각만 깨먹던 우리는 모두 지쳐 쓰러져 바윗돌 같은 방바닥에서 바짝 마른 입술로 춥다고 배고프다고 울었다. 어머니는 벌써 일어나 부엌으로 들어가시더니 식칼을 집어 뒷곁으로 가셨다. 들릴 듯 말듯하게 산에 나무 껍질을 벗기러 간다는 말을 남긴 채…… 나는 누나를 붙들고 떠듬떠듬 말했다. "누우…….추워……." 누나는 차디찬 손으로 내 손을 꽉 쥐었다. 누나도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내 눈물이 범벅이 되었다. 조금있다가 누나는 후들후들 떨며 밖으로 나갔다. 눈도 내리지 않은 채 바람만 몰아치는 깡마른 추위가 달겨왔다. 나는 지쳐 기운이 다 해졌다. 얼마나 있다가 누나는 돌아왔다. "삭정이 갖고왔응게 불 때 주깨."하는 소리가 가늘게 들려왔다. 직감으로 산직이 탑농양반네 집에서 가져온 것이라는 걸 알았다. "그 집서 주었어 " "아니……." 나는 그냥 잠이 들었다.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기분이었다. 다만 허기진 눈망울이 무거웠다. 얼마 후 누나의 비통한 고함 소리에 놀라 뛰어 나갔을 때 누나는 온 몸이 불덩이가 되어 마당에 뒹굴고 있었다. 그때 산에서 돌아온 어머니는 누나를 보고 기절하고 말았다. 그후 이틀 밤을 겨우 넘긴 누나는 죽었다. 어머니는 불을 때다가 누나가 잠이든 게라고 하며 쉴새없이 울었다. 누나는 아버지 옆에 묻히었다. 그리고 얼마 있다가 어머니는 재너머 정첨지네 집에 후처로 시집을 갔다. 시집가는 날도 어머니는 "망할 놈의 지름질……. 그 질만 있었어도……." 하고 말하며 막 우셨다. 이듬해 가을, 읍내로 통하는 하얀 신작로가 산마을에는 났다. 그 신작로가 나는 날 어머니와 나는 조그만 봇짐을 싸들고 다시 산마을로 돌아왔다. 정첨지가 쫓아냈다. 신작로를 본 어머니는 함성을 질렀다. 그러나 다음 순간 "저 갑재네 아부지 묏동(무덤)허고 진녀 묏동허고 질을 깎니라고 깨꼈당만……." 하는 소리에 얼굴이 노랗게 되었다. "원래가 국유지다냐……. 원……. 질깎기 한달전에 먼 통지가 왔잖이여  그것이 그 묏동옮기라는 통지였디야. 사람이 있어야 옮기재……." 그 말을 들은 우리는 그저 멍청하니 읍내로 뻗은 하얀 신작로, 바라고 기다리던 지름길을 바라보았다. 지금은 내가 이렇게 자라 다시 이 늦바위 고개에 앉아서 멀게 보이는 허연 신작로를 내려다 볼 때 영 잊혀지지않는 신작로가 새로 나던 날이 머리 속에 맴돌았다. 그리고 전에 아버지와 누나의 무덤이 있었을 만한 곳을 더듬어 보았다. 오랜 기억처럼……. <수필부 장원> 옷 이재순(상명여고) 브리앙! 어제까지도 이렇게 발광스런 바람이일때면 뇌리끼한 액체를 놓고 어처구니없는 코스모폴리턴이 되었었더랬네. 그리고는 오랭생의 싯귀를 외웠더랬지. 죽은여자보다 좀더 가엾은 것은 잊혀진 여자라고……. 그위에 지금처럼 활개치는 아카시아향내의 발 아래에선 저작권없는 제멋대로의 시인이되기도 했었네. 오늘. 오늘이 있음돼. 이 따위 앙탈 같은 외침을 지르면서도 자꾸만 비어가는 텅빈공간을 무얼로 채울길이 없었지. 해서 한군데에 미쳐보고 싶었더랬네. 나비날개의 프시케에게 열중한 애욕의 신 에로스에게 말일세. 그리고는 우리를 불협화음으로 만든 행복과 운명의 여신 터케를 미워했고 저승의 입구를 지키는 괴물 키마이라를 원하지 않았나  브리앙ㅡ. 어제 오늘 난 심한 우울병에 빠졌다네. 표정없는 긴 권태에 용틀임하던 내가 죽음을 본 거란 말이라이. 얼굴은 고왔다구. 예쁘장한 가시내였다네. 거센 차바퀴가 지나간 자취에 허옇게 튀긴골, 부러진다리, 펄떡이는 시뿌연 허벅지……. 그건 도마위에 처절히 절단된 동물. 막다른 공포가 일었네. 확실히 인간이 인간의 죽음을 본다는 건 가혹한 벌인가보이. 왈칵 울음이 터질 것 같았지. 그 공포가 똑 같은 농도의 허무로 내게 집착한때문이라네. 꺼먼 옷을 입었던 우리가 무척이나 가엾어 보인때문이라구. 도의 선생의 연애행각에 심한 반발을 품고 성경책을 든 가시내를 비웃던 우리. 쓸쓸한 인간의 지성과 애정의 계속에서 마냥 짜증을 부리던 자네와 내가 지난 시간을 시꺼먼 삼류극장에 다 내던진 어처구니없는 못남에 흠씬 혐오를 느낀 때문이라이. 심장이 멈춘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얇은짓들을 해온 우리가 웃으웠다구. 브리앙! 공복의 배 속에서 야릇한 음향이 열져온다. 묘한 심경이 되어가네. 이렇게 의식과 육체가 내 못난 삶을 난도질하고 있을시 자넨 아직도 짙은 권연 냄새에 취해있을거라. 내일을 생각지 말자는 시뻘건 마음의 연소에 한껏 만족해 있을것이네. 브리앙! 이 시간엔 커단 소리로 자넬 불르고 싶으이. 잠시 오차에 빠져 현실에 도리질하는 자네를 내 하얀 맘의 옷으로 꿰매주고 싶단 말이여. 초점없는 무질서의 우리상태에서 웃을 수 있는 기지를 주고 싶다구. 브리앙! 오늘 너와 나의 새로운 시작에서 우리 멋진 친구가 되어보세나. 자신을 학대한다는 데에 잔인한 통쾌함이 있다는 자네와 내가 말일세. 난폭한 바람 같은 자네에게 얼핏 통곡스런 만족이 일어나네. 허지만 곧 침통해지는건 무얼 의미하는 걸까  결국 자넨 핀트없는 인간이었나보이. 생을 떠난 조잡한 일에만 용감해질수 있었나 보네. 조각처럼 단아한가시내에게 곧장 열중해지고 마는 그 따위 엷은 용감을 갖고 있었다구. 브리앙! 오늘 우리 녹색아까시아에서 가버린 엄마를 느껴 보세. 착해 보자나. 해서 생에대한 참을 맛보자구야. 정녕 먼날 웃을 수 있는 걸 향해 이를 악물어보세. 가시내에게 채었다고, 수학시험지가 영점이 나왔다고 비릿해지는 그런 못난이 옷을 입지 말고, 살아 보자는 멋진 옷을 입어보세나. 불만에만 떠는 인간이 되지 말고 인간을 향한 용감이란 두툼한 옷을 입어보자구야. 다시 자네를 향한 내 정이 늪가의 태양처럼 익어 가네. 그럼, 안녕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