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제 13회 콩쿠르 수상작(김산춘, 김인호, 이숙경)
등록일 2015-06-26
작성자 학과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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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부 장원>
뜰
김산춘(배문고)
하얀 오후의 문을 열고
향긋한 사랑이 숨쉬는 곳으로 가면
늘상 즐거운 친구들이 웃고 있는 걸.
청포도 넝쿨은 내 키를 넘어
나는 그 그늘 아래 쉴 수도 있고
남들은 잘 알지 못하는, 착한 사람들의 시를 읽으며
꽃잔 위에 넘치는 사랑을 나눌 수도 있으니
오늘은 친구들과 슬기로운 잠에 취해
꽃잎 떨어지는 소리라도 들어봤으면.
아이는 아침마다 물을 긷는데
우리의 영롱하고 지혜로운 뿌리는
별함께 비함께 내리는 뜰의 사랑을
화안한 미소로 쫓고 있는 걸.
긴 세월 속을 걸어오느라 피곤한 나래를
꿈속 그윽한 못(沼) 위에 띄워
흥겹도록 눈부신 오수(午睡)에 잠재우고
튜울립 한 송이를 몰래 따다가 그대에게 보내는 편지에 붙여
모두 떠나버린 그날 밤
그리운 책갈피나 펼쳐봤으면.
<소설부 장원>
키다리
김인호(경성고)
아침식사마저 잊은 채 원두막을 향해 걷는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상쾌한 여름 아침임에도 몸이 떨림은 커다란 공포에 사로잡힌 까닭인지도 모른다. 하늘과 땅이 구분 없이 빙그르 돈다. 거꾸러질 것만 같다. 그럴 수도 있었다니…….
무관심 아래 질투는 바보에게서도 엄청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머리에 헝겊을 맨 동생 키다리의 얼굴이 나타나며 헝겊의 핏자국이 점점 커지며 다가온다. 눈물어린 눈초리, 그것은 바보의 눈일 수만은 없었다. 원망과 저주를 삼키는 무서운 눈이었다. 멀리 원두막이 보인다. 여느 때와는 달리 발걸음이 가뿐 하지를 못하다. 평범한 들판의 키 큰 원두막에 키다리 모습이 어른거리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키다리는 차라리 모자란 아이라고 부르는 것이 나았다. 하는 행동거지가 열 살은 족히 부족하여 동네 꼬마들에게도 놀림감이었다. 어릴 적부터 바보의 모습은 역력해 별명도 ‘아다다’ ‘천치’ ‘오줌싸개’ 등 갖가지였다.
그런데 열 세 살적부터 자라던 키가 열다섯이 된 지금은 이미 1백 70cm가 넘어, 이제 동네의 모든 사람은 동생을 키다리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키다리도 으레 그러하듯 아무런 불만도 없었다. 아직까지 소학교도 제대로 나오질 못해 어머니도 동생을 불쌍히 여겨 돌보아줄 뿐, 이렇다 할 관심이나 희망을 두지 않았다.
키다리는 나의 충실한 심복이었다. 그렇게 강요한 것도 아닌데 동생은 무척 나를 따랐다. 그러함에 나는 작은 키에 비하여 든든함을 느낄 수 있었고 그만큼 키다리를 그의 바람대로 데리고 다니는 것은 나의 기쁨이기도 하였다. 두마지기 남짓한 수박밭은 어느 해보다 풍년이었다. 더욱이 온 정성을 다해 씨를 뿌리고 거름을 주어서 밭을 일군 나에게는 커다란 보람이었다. 나는 밭가에 원두막을 짓고, 그곳에서 살다시피 밭을 돌보았다. 더욱이 수박을 팔기 시작한 여름임에도 지겨울 줄 모르고 일을 했다. 바쁜 틈에도 항상 키다리는 곁에서 잔일을 거들어주었다. 많은 수학은 벌써 수익을 안겨주었고 그럴수록 나는 눈코 뜰 새 없이, 밤은 원두막에서 지새우며 희망의 나날을 보내었다. 어느 날 힘든 생존경쟁에 헐떡이다 밤을 맞았다. 이날따라 너무 피로하였기에 자꾸만 감겨지는 눈꺼풀을 더 이상 견뎌 낼 수가 없어, 키다리에 밤을 잘 지키라고 부탁을 한 후, 이내 쓰러져 꿈속을 헤매었다. 짓궂은 서리꾼을 둘은 항상 번갈아가며 지켰던 것이다.
찬 아침 이슬에 퍼뜩 잠이 깬 나는 습관대로 우선 주위를 둘러보았다. 키다리도 이제는 피로했는지 꼬꾸라져 새우잠을 자고 있었다. 담요도 덮지 않고 코를 고는 그는 자리가 불편한지 이따금 잠꼬대도 하였다. 갑자기 눈에 익은 밭모퉁이가 얼핏 흩어진 모습으로 눈에 띄었다. 나는 신발 신는 것도 잊은 채 달려가 보았다. 보람이 산산히 부서지는 느낌이 들자 나는 우뚝 서고 말았다. 서리꾼이 설익은 수박과 넝쿨은 짓이겨 놓은 채 밭은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원두막에 돌아오자마자 키다리를 끌어내고, 영문도 모르는 녀석을 구타하기 시작했다. 사정없는 발길질에도 분이 풀리지 않아 키다리를 쫓아버렸다.
“보기 싫으니, 썩 꺼져버려. 그리고 다시는 내 눈 앞에는 오지도 말아.”
우는 것도 칠칠맞게 울며 동생은 무조건 잘못을 빌며 용서를 바랐다. 덩치답지 않게 그러한 녀석이 더욱 보기 싫었고 하나의 용서도 없이 집으로 보내버렸다. 그 후에도 키다리는 눈물어린 호소를 하며 같이 있어주길 바랐지만, 애써 가꾼 밭의 충격이 엄청났기에 좀체 화가 가라앉지를 않았다. 그래서 동생이 가까이 오기만 하면 쥐어박곤 했다.
며칠 후 그날도 원두막을 지키다 이상스런 예감에 남폿불을 치켜드니 서리꾼이 밭에서 달아나고 있었다. 소리를 쳤지만 원두막을 내리기도 전에 도둑은 시야에 사라지고 없었다. 내 눈으로 직접 목격한 도둑을 잡지 못함에 다시 한 번 더 오면 기어코 잡으리라는 생각과 동시에 커다란 몽둥이를 준비해 두었다.
그런 얼마 후, 달도 뜨지 않은 캄캄한 밤이었다. 별의 노래에 귀 기울이며 시원한 바람과 벗하며 즐거운 공상을 하고 있는데 왠지 곁이 허전했다. 일주일간이나 동생과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웬만하면 이제 키다리와 같이 지내야겠다는 생각을 하는데 밭에서 ‘바스락’ 소리가 들렸다. 준비해 둔 몽둥이를 꽉 움켜 쥔 나는 원두막을 살짝 내려갔다. 하지만 어둠의 정적에 그 소리는 커다랗게 났고, 도둑은 다시 달아나고 말았다. 이제는 서리를 맞음이 분한 게 아니라 어떠한 비상 책을 강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며 차분해졌다.
다음 날, 내 주위에서 언제든지 쓸 수 있도록 팔매들을 마련해 두었다. 키다리도 이제 나의 용서를 바라지도 않는 듯 먼저 나를 피하려 했다. 갑자기 용서하고 싶었던 생각이 사라지고 나는 녀석에게 또 화풀이를 하고, 전보다 힘이 들기만 하는 노동을 즐거움도 없이 힘겨웁게 하였다. 이렇듯 내가 좌절에 빠질만한 일도 없었건만 계산에만 눈이 밝은 장사치들과의 싸움에 짜증만이 났다. 어머니가 옆에서 도와주고 위로해 주었지만 하루 종일 불쾌할 뿐이었다. 밤이 되자 부엉이처럼 눈을 뜨고 밭을 살폈다. 서리 맞은 다음날은 도둑이 오지 않는다는 법이었지만 좀체로 잠이 오지도 않았다. 요란스런 풀벌레의 울음처럼 울어댈 수도 없는 자신을 탓하며 깊어진 밤의 궁전에 안기려하는데 또 바스락 소리가 났다. 자연히 눈이 벌컥 치켜떠지며, 오늘은 기필코 잡고야 말겠다는 필사의 다짐을 몇 번이고 되뇌었다. 어느덧 밭에 뛰어내려 납작 엎드렸던 도둑이 위험을 느낀 탓인지 도망가기 시작했다. 어둠에도 키 큰 도둑의 윤곽을 느낄 수 있었다. 달아나던 도둑이 쓰러질 듯 기우뚱했다. 돌에 맞은 것이다. 거리가 좁혀지자 도둑의 윤곽은 보다 분명해지고 밤의 보호색인 알몸을 하고 있는 지능적인 도둑임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워낙 빠른 도둑의 주력을 따라갈 수 없어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마을 사람 하나하나를 다 생각해 보았지만 얼핏 생각이 떠오르질 않았다. 나의 원망을 사고 있는 사람은 없었고, 이렇게 끈질기게 나의 밭만을 서리할 만한 사람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도둑은 맞출 수 있었던 통쾌함에 오랜만에 가뿐한 잠을 잘 수 있었다.
그리고 새벽같이 일어나 모처럼의 따뜻한 밥을 생각하며 상쾌한 걸음으로 집을 향했다. 집에 가까이 왔는데 굴뚝에는 연기의 기색조차 없어 어둑어둑한 초가집은 삭막한 느낌이 들었다.
“어제까지도 정정하신 어머니께서 아프셨을까 ”
이상한 분위기에 놀라 혼자 중얼거리며 방문을 열었다. 언뜻 보이는 것은 어머니의 손에 쥐어진 피 묻은 헝겊이었다. 그리고 옆에는 키다리가 누워 있었다. 어머니는 나를 반겼지만 키다리는 얼른 얼굴을 이불 속으로 숨겨버렸다. 빨간 피에 소름이 끼쳐짐을 느끼며 어머니의 곁으로 가까이 갔다.
“글쎄, 이 녀석이 요사이 밤늦도록 놀러만 다니더니 어제 밤에는 이렇게 머리가 피투성이가 되어가지고 들어 왔단다.”
어머니의 말에 이상한 예감을 짐작한 나는 이불을 걷어찼다. 키다리가 이불을 끌며 마구 울어댔다. 머리의 상처는 돌에 맞은 것이 분명했고 흙투성이의 몸뚱이를 보자 나는 모든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형언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에 나는 밖으로 뛰쳐나왔고 갈 길마저 몰라 허둥대는 나의 걸음은 오던 길을 되돌아 갈 수밖에 없었다. 자꾸만 붉은 피와 동생의 얼굴이 커지며 작아지며 어른거렸다. 나는 원두막에 다 이르지도 못한 채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알 수 없는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무한히 넓은 하늘과 키다리의 모습이 점점 나에게 다가왔고, 나는 목이 메었다.
<수필부 장원>
시계
이숙경(숭의여고)
온갖 인간사에 쫓겨 생활하다 우연히 시계 초침소리를 의심할 때, 난 갑자기 놀라곤 한다. 그러나 그 때처럼 내가 생존하고 있다는 것을 절실히 느낄 때는 없는 것 같다.
난 가끔 현대인의 생활은 시계의 숫자판에 다 담겨 있지 않을까 생각할 때가 있다. 시계의 바늘이 가리키는 대로 사람은 시계를 따라가고 그 정확성에 사람은 운명을 맡겨 버린다. 문득 시계를 쳐다보면 잃었던 조용하고 한가로웠던 어느 날이 생각난다. 하나하나 조금도 어김없이 가고 있는 시계. 난 거기서 조그맣게 인생을 느껴본다. 시각을 다투는 어느 병자의 어머니는 얼마나 근심스럽게 시계를 볼 것인가.
어쩌면 무한한 시간을 유한한 기계에 담아버린 인간을 원망하지 않고 매몰스럽게 가는 시계만을 원망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빠나 엄마를 기다리는 어린 아이의 눈은 얼마나 밝고 웃음 진 얼굴로 시계를 응시하겠는가.
그 순진한 어린아이는 어쩌면 시계가 엄마나 아빠를 돌아오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시계는 오늘도 조금의 마음의 동요도 없이 그냥 가고만 있다.
이렇게 아름다운 날이면 조금씩 늦게 가고 지루했던 수학시간은 좀 빨리 가고 이런 생각을 하다 난 가만히 웃어버렸다.
나도 시계를 시간으로 착각해 버린 것이 아닌가. 시계는 늦게 갈 지언정 시간은 그대로 가는 것이니까 말이다. 만약 그렇게 되면 난 고장 난 시계를 가지고 만 것이 아닌가. 시계는 몰인정하긴 했지만 고도의 인내력과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는 최대의 순응력이 있었다.
끊임없이 숫자판을 왕래하는 그 마음과 가기 싫을 때도 있으련만 한 번의 이탈도 없이 그대로 몰고 있다.
난 시계의 인품을 배우리라. 또 시간관념이 없고 또 시간을 알려주는 시계마저 방임하는 사람들을 징계하려 가끔 멈춰버리는 그 냉정한 마음까지도 배우리라. 지금 내 팔 위에서 가볍게 가고 있는 이 시계는 나의 고등학교의 전 생활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 같다. 이 시계 속에는 시계를 처음 낀 날 사랑스럽게 들여다보던 눈빛이 담겨 있고 지각을 하던 날, 땀 흘리며 쳐다보던 초조함이 있고, 시간을 느끼지 않고 살았던 평이한 날들마저 담겨 있다.
이렇듯 내 생활 속에 동화된 시계건만, 마감시간이 가까워 오는 데도 시계는 오늘따라 더 힘차게 가서 그 둔탁한 소리로 내 마음을 깎아내리고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