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 제 15회 콩쿠르 수상작(조재훈, 윤성근, 한현수, 육영수)
등록일 2015-06-26
작성자 학과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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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부문 장원>
음악
조재훈(부산 브니엘고)
Ⅰ
투명한 바람이
가늘게 떨고 있었다.
노을을 죽이며
어둠이 달려오고
여자가 웃고 있었다.
갈갈이 찢어진 의식이
펄럭이고 있었다.
Ⅱ
소리는 피를 흘리고
기슭이 눕고 있었다.
텅빈 웃음이
허공에서 파닥이다
떨어지면
바람의 뿌리가
쓰러지고 있었다.
Ⅲ
어둠이 씻기고 있었다.
햇살 한 줄기마다
밤의 껍질을 태우고
파닥이던 바람은
돌이 되고 있었다.
기슭이 일어서고
소리가 열리고 있었다.
<시부문 가작 1석>
음악
윤성근(대구고)
1)
들리지 않는 숨결이 불어주는
짙은 어둠의 언저리 어디에선가
노래소리가 번져 오면,
시리도록 차가운 이파리 속 속살의
꽃이 피어
스스로가 일구어 온 꽃밭에
하늬바람 자양많은 사랑을 드리우고
뜨락 깊숙이 숱한 씨알을 내림에사
꽃의 결실하는 가슴마다
한자락씩의 음악을 선사 할 제,
움막의 물레방아에 실리어 돌아가는 하오는
누구에게 보내는 화신의 꽃말인가
무희(舞姬)의 내성(內城)을 노래하는 바람은
무명천 자락을 흘러 내려
뽀얀 들녘에 가득히 어디로 날리우는 것일까
꽃내가 끝없이 흐르는 강가에
바람은 소리없이 추적(追跡)하고 계절의 사라진 잎새들마냥
참! 아득히 멀어진 날의 거울 같으니
과목이 노을에 잠자는 호숫가에
구름이 쉼없이 한 타래의 연줄을 뽑으면
기꺼이 한 줄기 비
우리네의 가슴팍 가장자리로 음악을 들려주리.
<소설부 가작 1석>
사발
한현수(동대부고)
‘녀석이 우리를 배반했다. 우리는 녀석을 없애야 한다. 치사한 자식.’
소년은 이같이 생각하면서 묏등을 뛰어 넘었다. 아이들도 뒤따라 넘었다.
‘칠보의 꾐에 속아서 우리가 숨은 곳을 말하다니…… 그렇게도 그게 맛있더냐…… 우리는 이 자리를 빨리 피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칠보네 편의 나무단검이 날아온다. 몸에 살짝 닿기만 해도 우리는 죽어야 한다’라고 소년은 생각했다.
“자 빨리 숨어라. 칠보 네가 온다?.”
우리는 무덤 뒤 비석 아래 아기소나무 밑에 웅크리고 숨었다. 천득이와 관태는 아직도 숨을 곳을 찾지 못해 뛰어 다니고 있었다.
“엎드려 빨리!”
그러는 사이에 칠보네 편에서 단검이 날아왔다. 소년의 편에서도 단검을 던졌다. 삼득이 하고 길수 녀석이 죽었다. 소년의 편은 네 명 밖에 남지 않았다.
“자 공격!”
일어서서 단검을 던지려다 두 명이 더 죽었다. 칠보네 편은 아직도 세 명이나 살았다.
“자아 그만 항복하그라. 해보나 마나여…… 니네들은 아무리 그래도 모기 밭에 고무신이여.”
소년은 또 하나의 단검을 던졌다. 빗나갔다. 소녀의 단검은 이제 두 개 밖에 남지 않았다.
두 개를 한꺼번에 던졌다. 도망을 치려했으나 여러 개의 단검이 소년의 몸에 떨어졌다. 마침내 소년의 편은 모두 죽었다. 소년은 미륵돼지 같은 칠보를 업고 논두렁을 내려와야 했다. 소년은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여기서 운다면 칠보네 편한테서 놀림을 받기 때문이었다. 바보 같은 대장이 운다고…….
서 쪽 하늘이 붉게 물들어 간다. 소년은 갑자기 무릎이 쓰려오는 것을 느꼈다. 생채기가 나 있었다. 그제서야 묏등에서 미끄러질 때 생겼다는 것을 알았다. 어깨가 뻐근하고 다리가 아팠다. 그리고 배가 고팠다.
집으로 돌아가는 논두렁길이 몹시 질척거렸다. 논두렁을 지나가 소년은 도랑에 가서 깨끗이 씻었다. 무명옷에는 벌건 황토 흙이 묻어 있었다.
“수빈이 자식, 만나기만 하면 칵 쥑이뿐다. 누룽지 한 사발이 그리도 좋노, [바른말 고운말을 사용합시다.] 같은 자식…….”
소년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가무잡잡한 누룽지를 생각했다. 침이 넘어갔다.
“나는 대장이다…… 나는 대장…… 그런 것 안 묵어도 괜찮다. 병신 자석들 녀석처럼 허연 이밥 두 사발만 묵으봐라. 너 같은 녀석은 찍도 못할 기라.”
혼자 중얼거리면서 소년은 사립문을 열었다.
소년은 자리에 누워서도 잠이 오지 않았다. 낮에 칠보의 단검에 맞아 눈덩이가 퉁퉁 부어도 말 한 마디 못하고 눈물만 글썽이던 관태 녀석. 소년은 가슴이 답답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분통이 터지는 일이었다.
다시 자리에 누웠다. 쌀 한 줌 정도 하고 쑥을 넣어 끓인 푸르죽죽하고 멀건 죽 그릇과 칠보네 푸른 밥사발에 담겨 있는 이밥을 생각했다. 서늘한 바람이 불어온다. 사방이 고요하다.
“관태, 상득이, 길수, 천득이에게 이밥 두 사발씩만 멕여 놓으면 다음에는 안 질 낀데…….”
손간 소년의 눈이 반짝였다. 큰 눈에는 어떤 무서운 각오가 스쳐갔다.
‘그렇다. 쌀을 훔치자. 칠보네 광 옆에는 조그만 개구멍이 있다. 그리로 들어가서 광문을 열고 한 말쯤 퍼오자. 녀석의 집은 부자니깐 그 정도는 훔쳐도 된다.’
그날 밤 눈썹 같은 그믐달 이외에는 아무도 소년을 보지 못했다.
황혼이 이슥할 무렵, 소년은 애기 굴 앞에 아이들을 모이게 했다. 아이들의 손에는 놋그릇, 사발, 수저 등이 들려 있었다. 드디어 솔이 걸리고 조용히 불을 지폈다. 쌀 냄새가 퍼지자 아이들은 침을 질질 흘리며 빨리 밥이 되기를 바랐다. 밥이 되자 아이들은 앞을 다투어 퍼먹기 시작했다. 반찬이라고는 길수네 집에서 가져온 열무김치뿐이었다.
갑자기 관태가 먹던 것을 멈추고 눈을 둥그렇게 떴다. 뒤에는 김초시가 턱수염을 덜덜 떨며 서 있었다. 몽둥이를 든 머슴들이 빙 둘러서 있었다. 김 초시는 부들부들 떨면서 소리를 질렀다.
“뭣들 하는 거여…… 저…… 저 고얀놈들을 물고를 내놔라…… 죽도록 두들겨 패라! 고얀 놈들 같으니, 이놈들…… 이 도둑놈들…… 어이 고얀 놈들……”
김 초시는 제대로 말도 하지 못했다. 아이들은 입안 가득히 밥을 문 채로 덜덜 떨고 있었다. 소년은 일어났다.
“내가 훔쳤어요. 이들은 아무 죄도 없어요.”
그때서야 아이들은 사방으로 도망치려고 했으나 머슴들은 아이들을 사정없이 두들겨 팼다. 입안 가득히 든 밥알들이 튀어 나왔다. 코피가 터졌다.
소년은 정강이에서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곧 허리, 어깨, 등, 얼굴에서도…… 소년은 무어라고 말하려고 했으나 말이 나오지가 않았다. 소년의 희미한 눈동자에는 풀 속에 쏟아져 있는 하얀 밥알과 금이 간 푸른 사발이 눈에 들어왔다.
점점 의식이 흐려졌다. 소년은 쓰러지면서도 입술을 움직였다. 그러나 아무 소리도 할 수 없었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수필부 장원>
지팡이
육영수(여의도고)
내가 시골서 학교를 다니던 중학교 2학년이 되던 해, 마루가 넓은 우리 집에 자주 모여 노시던 할머니와 그 분 친구들이 가까운 직지사로 놀이를 가자고 한 때는 뒤뜰의 오동나무가 넓적한 손바닥으로 5월의 푸른 햇살을 받아들이고 짚더미를 쌓아 두었던 앞마당의 푸릇푸릇한 상추가 한창 먹음직스러운 때였다.
아버지께서는 노인들만의 여행이 불안스러우셨는지 나를 따라 보내셨다. 나는 내심 귀찮은 마음이 앞섰지만 마지못해 따라나섰다.
기차 안에서 할머니들 일행은 마치 소학교 시절에 손꼽아 기다리던 수학여행을 떠나는 것 같이 벌써 달걀, 사과 등을 꺼내 가지고 서로 권하며 잡수시는 것이었다. 김천역에 내려 마침 대기하고 있던 버스를 타고 직지사 입구에 도착하였다.
양쪽 길옆으로 올망졸망 늘어선 기념품점들은 내가 살던 조그만 읍에서는 장날에야 겨우 볼 수 있는 여러 가지 신기하고 갖고 싶은 물건들로 가득 차 있었다. 절 경내를 구경한 뒤, 처음부터 내키지 않은 걸음으로 나섰던 나는, 할머니들께서 안내자로서의 나에게 특별히 권하는 맛있는 과자들도 물리치고 얼른 집으로 돌아가서 엄마에게 왜 따라 가랬느냐고 떼를 쓸 생각으로 가득 찼다.
할머니들도 시원한 숲속의 계곡을 독차지한 젊은 남녀의 질서 없는 웃음소리와 여기저기 가족끼리 모여서 사진을 찍으며 즐기는 모양을 보신 후로는 기분이 상하셨는지 출발할 때의 흥분도 사라지고 빨리 귀가를 서두르셨다.
나오시는 김에 기념품점에 들러 제각기 얼마만큼씩 타 가지고 온 돈으로 손자들 장난감을 산다, 영감 등긁이를 산다하시며 분주하셨다. 같이 온 기념으로 모두 같은 물건을 하나씩 사자는 뒷집 할머니 제안으로 의논하신 끝에 “에구 우리도 이젠 북망산에 갈 날도 멀지 않았으니 지팡이나 하나씩 삽시다. 옛날부터 아들 며느리들이 사주지 않는 것이라니까.” 하며 연방 허릴 꼿꼿이 세우시는 시늉을 하시는 우리 할머니 얘기에 모두 동감을 하셨는지 지팡이를 하나씩 사셨던 것이다. 그때 나는 왜 그럴까하고 그 이유를 생각해 내지를 못했다. 지금 그 지팡이는 시골의 대청마루 위를 가로지르는 기둥에 대롱대롱 혼자 걸려있고 할머니는 지금 서울에 와 계신다. 서울서 학교를 다니는 우리?손자?들을 뒷바라지 해 주시기 위해서다. 지금쯤 그 지팡이는 마루에 올라오는 닭이나 개를 쫓는데 사용되거나, 뒤안에 심은 호박의 넝쿨 받치는 도구로 마른 땅에 꽂혀 있는지도 모르겠다. 낯선 이곳에서 할머님께서는 우리에게 너무나도 고마운 보살핌을 주시고 있다. 누워 계시다가도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 얘기를 하면 마치 오뉴월에 논두렁에 뛰어 다니는 개구리같이 벌떡 일어나셔서 어두운 귀를 바싹 가져오는 모습을 이름 없는 산골 두메의 돌담 사이에서 피었다가는 지고 또 피어나는 무수한 무궁화의 얘기 같았다.
며칠 전의 부처님 오신 날인 음력 4월 초파일은 바로 할머니의 생신이기도 했다. 오전에 반포 작은 아버지 댁에서 아침, 점심을 차려 먹고 나는 바로 여의도로 달려 나갔다. 제등행렬에 참가한 뒤 11시가 넘어서야 집에 오자 옆방 아줌마께서 오늘 할머님에게 국수를 삶아 드리시라고 시골 아버지에게서 전화가 왔더라고 전해 주었다.
“나가 살면 얼마를 살 것다고 국수를 먹겠네, 지팡이 짚고 다니기 전에 죽어야지.” 하시며 그만 두시라는 할머님 말씀을 뒤로 하고 부랴부랴 나가서 겨우 국수를 사 가지고 들어왔다. 옆 방 아줌마에게 수고를 끼쳐서 삶은 국수를 할머니와 나란히 들면서 나는 어떤 길다란 평안을 느꼈다.
나는 이제야 비로소 할머니 스스로 지팡이를 사시며 하신 말씀과 그 지팡이를 시골에 버려두고 그 때 함께 사신 호박 염주만을 가지고 오셨는지 이유를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