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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제 17회 콩쿠르 수상작(최중흥, 안도현, 이순옥, 오승희)

등록일 2015-06-26 작성자 학과관리자 조회 1117
<시부 장원> 풀잎 최중홍(대광고) 우리는 그대를 기다리네 맑은 물소리로 가슴을 열고 빛나는 이슬의 귀에 기대어 그대 앞섶에 자라는 햇빛을 줍네 새들은 설레이는 가지는 찾아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키우고 우리는 그대 눈빛속에 숨겨진 사랑의 음반을 두드리네 그대 가슴 가득히 꽃수를 놓으며 날으는 나비들의 꿈 그들의 꿈을 입 맞추면 눈부시게 맑아오는 그대 눈동자. 풀잎에 착한 이마를 부비며 아침은 은밀히 깨어나고 풀벌레 날개 사이로 건강한 해 그림자 아른거리네 밤새 풀속에 심어놓은 별빛을 닦으며 아이들은 오색 이야기를 날리고 우리들은 수천 수만의 새떼가 되어 그대의 하늘 쪽으로 날아가네 <시부 우수 1석> 풀잎 안도현(대구 대건고)1) 뉘 목소리가 이렇게 허물없이 자라 있느냐. 어두운 새벽들에 홀로 나섰더니 일어서는 모습들이 가득하다. 베어버리지 힘 있는 온갖 사물들 살아서 꾸불대는 들길 목이 긴 수숫대 그 위에 흐르는 안개도 베어버리지. 손가락에 감겨드는 한 웅큼 이슬을 헤치며 아직도 풀잎 사이 숨은 어둠을 헤치며 왼쪽 비탈로 미끄러질 때 세상보다 파랖게 날이서는 조선 낫 뉘 목소리가 이렇게 허물없이 자라있느냐. 어는 땅에 무엇해서 살 찌운 힘이냐, 무릎에 스미는 풀잎의 울음을 깔고 누우면 그 울음 곁으로 밀려오는 이 당당함 하늘은 일제히 햇살을 밝게 흔들고 무엇일까, 내려다보면 풀잎 베어버린 자리 풀 아닌 내 열아홉 새벽 꿈이 자라나 있고 땅의 입김이 손바닥에 풀물 되어 묻어나온다. <수필부 장원> 용돈 이순옥(서문여고) 나는 돈을 헤프게 쓰는 경향이 있다고 남들이 그런다. 아마도 내가 돈에 대해 눈뜨기 시작한 것이 남보다 느렸기 때문에 그것을 보충하려는 마음에서 생긴 버릇 같다. 아무튼 그런 내가 엄마한테서 정기적으로 용돈을 타 쓰기 시작한 것을 중학교 교복을 입고부터다. 처음엔 내 나름대로 가계부도 긁적여 보고 예산상 문제로 심각해 보기도 했다. 그땐 얼마나 알뜰살뜰했던지 돈이 남아 저금통장을 만들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착한 딸이었다. 그러나 날이 가고 달이 가고 해가 바뀌면서 나의 용돈 액수와 더불어 나의 소비 생활의 범위와 규모는 풍선처럼 커져갔다.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후로 마침내는 추가갱정예산안을 작성해야 할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차마 엄마한테 “용돈 떨어졌어요.” 라고 말할 용기와 면목이 없어 쩔쩔 매던 끝에 나에겐 요령이라는 것이 붙었다. 하지만 그 요령도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이어서 드디어 들통이 나고 말았다. 어느 날, 허둥대며 현관을 나서던 나는 문득 무엇이 생각난 양 깡총 뒤로 돌아서서 “참, 엄마 저 참고서 사야 해요.” “무슨 참고서 ” “ 수학 경시대회가 있을 테니 책 좀 봐 둬야죠.” 그럴싸한 표정과 언어를 구사해 가며 입에 침도 안 바르고 시치미를 뚝 떼었다. 빳빳한 천 원짜리 두 장이 엄마의 주머니로부터 내 손으로 전해졌다. 나는 슬그머니 집어넣고 문을 나섰다. 그 순간 “얘, 수학 참고서가 벌써 6권 째다.” 하시며 상긋 웃어 보이시는 엄마, 나는 마치 도둑질을 하다 들킨 기분이었다. 기운이 쭉 빠졌다. 무어라고 말을 해야 할 텐데 목구멍에서 꽉 막히고 말았다. “늦었어, 어서 가 봐. 여학생이 치마 입고 뛰는 것처럼 흉한 에 없어.” 나는 갑자기 눈자위가 저려왔다. 여태까지 알고 계셨으면서도 눈 감아 주신 엄마. 얼마나 세련되고 멋진 엄마인가! 그 날은 덜미를 잡혔다는 씁쓸함과 감사하고 죄송한 마음이 뒤엉켜 하루 종일 뒤숭숭했다. 그 뒤, 나도 양심이 있기에 깊이 느낀 바 있어 절약을 시도해 보았다. 하지만 제 버릇 남 못 준다는 말이 있듯이 다시금 나의 소비 습관을 고개를 들었다. 나는 궁리 끝에 아르바이트를 할 결심을 했다. 굳이 용돈을 충당하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어느 날엔가 우연히 엄마의 가계부를 보게 되었다. 빨강 글씨가 점점 늘어남을 보고 맏딸로서의 일종의 책임감 내지는 죄송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적어도 내 용돈은 내가 벌어 쓴다. 외국 학생들은 어려서부터 그런다는데 고등학생이나 된 내가 못할라구!” 이렇게 장한 결심을 한 끝에 이웃집 초등학교 4학년 남자애를 가르치기로 했다. 기대감과 자신감으로 한 일주일 정도는 무난히 해치웠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귀찮아지고 목이 쉬고 피곤해 져 한 달은 겨우 채우고 나니 그 꼬마 성적은 올라갔으나 내 성적은 미끄럼틀을 타고 말았다. 엄마의 만류를 물리치고 벌였던 사건인지라 나는 한 마디의 변명마저도 잃고 말았기 때문에 나의 첫 아르바이트는 막을 내려야 했다. 한편, 내 일생 처음으로 내가 번 돈을 손에 쥐었을 때 약간의 감격과 흥분이 맴돌았다. 그 목적이야 무엇이었든 간에, 몇 푼 안 되는 돈을 쥐었지마는 마치 금덩이라도 손에 쥔 듯했다. 쓰기가 아까웠다. 그저 기념으로 모셔 두고 싶었다. 그제서야 돈의 귀중함과 엄마 아빠의 노고를 알게 되었다. ‘아빠의 땀의 대가이기에 엄마는 그토록 애지중지하시고 알뜰살뜰 보살피시는구나.’ 난의 가슴엔 마치 진리라도 터득한 것처럼 희열이 솟아올랐다. 나의 두 눈엔 부모님에 대한 감사와 사죄의 이슬이 맺혔다. 그 후 나의 저금통장은 점점 배불러 갔고 조그만 가계부의 빨강 글씨는 꼬리를 감추었다. 그리고 이제 나는 돈 헤프게 쓴다는 말 대신 알뜰한 살림꾼이 될 거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수필부 우수 1석> 만남 오승희(성정여고) 나는 어릴 때부터 길잡이 노릇을 했다. 그 길잡이 노릇을 하면서 난 항상 기대와 흥분으로 가득 찼으며 내가 외할아버지의 길잡이로 선택된 것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졌었다. 외할머니가 일찍 돌아가시고 외할아버지와 함께 살게 되었을 때 엄마는 무척 아빠와 우리에게 미안해 하셨다. 외삼촌들이 할아버지를 모실 형편이 안 되었고 큰딸이었던 엄마는 우리에게 몇 번씩이나 괜찮겠냐고 물어 보신 후에 외할아버지를 모셔왔다. 외할아버지는 이미 앞을 못 보시는 장님이셨다. 백내장이셨던 할아버지께선 수술을 하려고 몇 번이나 도전하셨지만 그 때마다 당뇨 때문에 거절당하시곤 하셨다. 나는 할아버지를 볼 수 있었지만 할아버지는 손녀딸이 어떻게 생긴 것조차 알지 못하였다. 얼굴도 모르는 손녀딸에게 할아버지는 항상 “아이구! 예쁜 우리 손녀딸, 이 세상에서 제일 예쁜 우리 딸” 하시곤 하셨다. 할아버지께선 자주 산보를 나가셨는데 그때마다 다섯이나 되는 손주들 가운데 나를 항상 데리고 나가셨다. 옛날 운동선수였던 할아버지께서는 비록 앞은 못 보셨지만 어림짐작이 대단하셔서 넘어지시거나 부딪히시거나 하는 일은 거의 없으셨다. 할아버지께선 길모퉁이에 새로 놓인 돌까지도 세심히 주의해 두셨다가 다니실 때 불편이 없도록 하셨다. 하지만 항상 어린 나를 데리고 나가 길잡이를 하게 하셨다. 내가 할아버지 손을 잡고 걸어가다가 “할아버지, 웅덩이!” “할아버지! 차 와요.” 하면 할아버지는 흐뭇한 미소를 얼굴에 가득히 지으시곤 “오냐, 오냐.” 하시면서 길잡이인 나의 말을 따르셨다. 나는 할아버지와의 산보를 통해 나이에 비해 아는 것이 많게 되었다. 걸어가시면서 나에게 해 주시는 모든 얘기는 내 상상력과 호기심으로 더욱더 살 쪄 나갔으며 할아버지에게 거리에 늘어선 상점과 자동차들, 또는 나무나 하늘에 대해 모든 설명을 붙였던 나는 그만큼 더 할아버지의 산보가 기다려졌다. 할아버지의 눈은 내 입을 통해 어느 정도 사물을 보실 수 있었고, 내가 그것에 대해 기쁨을 느끼는 모습은 엄마를 흐뭇하게 했다. 우리 식구 모두는 할아버지의 당뇨와 싸웠다. 가장 두드러지게 그 싸움이 나타난 것은 밥상 위에서였다. 보리밥과 설탕이 덜 들어간 시시덥덥한 음식들……. 하지만 우리는 ‘조금이면 돼. 조금이면 된다.’ 하는 마음으로 그 모든 것을 참았다. 이 온 식구의 노력에 할아버지는 감사해하셨고 병을 이기기 위해 몇 십 년 동안이나 지치고 피곤하신 마음을 포기하지 않으셨다. 할아버지의 방에 커다랗게 붙여진 하얀 종이, 거기에는 내가 모르는 글자가 너무 많았다. 그런데 엄마는 그 종이에 뭔가 열심히 적어 넣으셨고 나중에 안 사실이었지만 그 종이는 병원에서 준 할아버지의 건강카드였다. 이러기를 몇 년, 하루는 학교에서 친구들과 놀다가 좀 늦게 집에 돌아왔는데 안방에 온 식구가 모여 있었다. 무슨 일인가 하고 들어가 보니 할아버지가 내일부터 입원을 하신다는 거였다.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어디를 다치셨을까  그러나 내 예상은 빗나갔다. 정기적인 진단이 있었던 오늘, 드디어 병원에서 백내장 수술을 해도 좋다는 허락이 내려진 것이었다. 나는 기뻤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두려웠다. 우리 식구 모두도 나와 같은 심정이었다. 왜냐하면 백내장 수술이 항상 성공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할아버지 방으로 뛰어갔다. 그러고는 할아버지 품에 안기며 “할아버지, 꼭 눈 떠서 오세요!” 하고 말했다. 할아버지께서는 나를 꼭 안으시며, “그래, 꼭 그러마!” 라는 말 한 마디만을 하셨다. 할아버지도 걱정이 되시는 모양이었다. 할아버지가 붕대를 풀던 날 나는 가슴이 너무 떨려서 그냥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수술이 성공적이었다는 말은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엄마와 의사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을 들어보니까 아무리 성공적이었다 하더라도 붕대를 풀어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커튼이 모두 내려지고 간호원이 붕대를 풀기 시작했다. 드디어 마지막 한 겹…… 붕대가 다 풀렸는데도 할아버지는 눈을 뜨지 않으셨다. 몇 번이나 의사 선생님께서는 괜찮다고 하신 후에 겨우 천천히 눈을 뜨셨다. 그러고는 발을 동동 구르며 서 계시던 엄마의 손을 할아버지가 찾아 잡으시며 “어멈아! 고맙다.” 하셨을 때 엄마는 울음을 터뜨리셨다. 20년 만에 본 세상……. 나를 안으셨을 때 할아버지 눈에서 맺어지던 그 눈물방울을……. 나는 그 때 태어나서 처음으로 남자의 눈물을 보았다. 할아버지는 세상의 모든 빛과 다시 만났고 모든 사랑하는 사람들과 다시 만나셨다. 나 역시 할아버지를 항상 만났었지만 그 병원에서의 만남이 최초의 만남이었다. 나는 그 이후 여러 사람들과 만났지만 할아버지와 만났을 때 그런 감격은 한 번도 가져보지 못했다. 진정한 만남은 마음을 통한 만남이 가장 진실 된 것임을 나는 그때의 그 만남으로써 깨닫게 되었다. 요새 사람들은 만나고 또 만난다. 하루에도 전혀 몰랐던 사람들을 몇 명씩이나 만난다. 그 만남은 출세나, 자기의 이익이나 명예, 또는 권력을 위한 만남이 대부분이다. 그런 만남은 만남일 수 없다. 그것은 다만 보는 것에 불과하고, 자기 일과에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 모두 만나야 한다. 우주의 삼라만상이 여기, 이곳에서 모두 만났듯이 진정한 마음으로 모든 것과 만나야 한다. 머리 위의 푸른 하늘, 별빛과 바람소리, 그리고 기쁨과 감사의 마음으로 충만 된 사람들. 이 모든 것이 만남의 대상이며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행복하고 아름다운 과제라고 하겠다. 그 만남을 위해 진정하고 깨끗하고 푸르른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나는 항상 노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