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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제 18회 콩쿠르 수상작(서영길, 박경화, 김정연, 박철규)

등록일 2015-06-26 작성자 학과관리자 조회 976
<시부 장원> 물 서영길(대전고) 물은 참 맑은 살빛을 가지고 있지요. 간혹, 소나기 그친 산하의 오후 한 때나 가까운 산골 마을에서 달려나온 바람이 앞 마당 감나무의 결실을 말해주는 가을 날이면 그대, 그 푸르디 푸른 하늘을 불러 가슴 씻고 저만치 흘러가는 곳은 어디 물은 또한 참 싱그러운 목청을 가지고 있지요. 내 여섯 살 적, 달빛이 무성한 여름 밤이면 개구리 울음 소리 무척이나 시끄럽던 고향마을, 개울 가로 목욕 나가던 누이, 누이의 그 하얗게 젖은 모습을 호기심 가득 찬 눈망울로 억새풀 뒤에 숨어 몰래 훔쳐보고 있을 때, 누이의 풋풋한 초경의 비린내 하나 가득 담고 밤하늘로 부서지던 당신의 목소리, 그것은 그것은 그대 높은 순수의 목청. 그 살빛 혹은 목소리들이 언제 강변으로 몰려가 저 이름모를 작은 꽃으로 피어났을까. 가장 아름다운 무엇으로 태어나기 위해 그것들은 꽃으로 피어나고도 오히려 남아 견고한 이슬방울로도 하나 뭉쳐졌을까 <시조부 장원> 은행잎 박경화(무학여고) 그대의 고운 자대 누 마중 가려는가. 그리운 병이 든 듯 해쓱한 모습으로 하늘을 떠받치고 선 전설같은 나무여. 외진 길 산비탈에 천년토록 뿌리 내려 바람 탄 입술마다 옛얘기 속삭이며, 더러는 손을 흔들고 먼 자리로 떠난다. 잎이여, 푸르름이여 눈 시리던 잎이여. 또다른 모습으로 사붓이 다가와선 설레임 가득한 계절 눈짓으로 불러대고. 허리 끊는 폭풍에도 혀 타는 가뭄에도 둘인 듯 하나인 맘 더 모진 날도 견디려니 천년을 다시 살아도 의의(  )로울 잎이라. 그대는 가을 나비 꿈꾸는 소녀의 몸짓 빈 하늘 내 가슴에 노오란 불 질러 놓고, 무심히 돌아선 옷깃 추스르는 나그네. <소설부 장원> 벙어리 김정연(성종여고) 수야는 두 번째 음모를 계획했다. 그것은 성모상을 부숴 버리는 일이다. 성모 마리아는 하나의 돌덩이일 뿐 수녀원은 누구나가 한 결같이 말하는 전지전능한 분이 아니다. 원장인 베네딕트 수녀는 물론이지만, 총무 수녀인 테레사 수녀는 몇 가지 기적 같은 예까지 들어가면서 마리아의 전능함을 수야에게 확신시켜 왔었다. 수야는 이 싸늘하고 황량한 수녀원에서 유일하게 인간적인 체온을 느낄 수 있는 테레사 수녀의 말이기 때문에 넉넉히 믿어왔다. 또, 테레사 수녀만이 수야와 대화를 할 수 있었다. 전에 어느 구화 학교에서 근무했다는 테레사는 수야 보다는 수화를 더 잘했다. 그러나 다른 수녀와 마찬가지로 근엄하고 냉정하기는 테레사도 별로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수야가 더욱 그리워하는 것은 엄마였다. 세 살 때인가 수야를 이 수녀원 현관에다 세워놓고, 금방 갔다 오겠다던 엄마는 영영 나타나지 않았다고 테레사는 얘기했었다. 수야는 철들면서부터 누구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성모상 앞에서 간절히 무릎을 세웠다. 365일 하고도 또 한 번의 365일이 1주일 앞으로 끝나는 거의 2년간을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가슴 저 깊은 밑바닥에서부터 진심으로 마리아를 신뢰하고 전능을 확신해왔다. 수녀원 어느 구석에서 일하다가도 창틈으로 그 우아하고 거룩한 성모상이 비켜 보이거나, 한밤 중 자다가 우연히 깨어났을 때에도 수야는 자신도 모르게 뛰쳐나가 두 손을 가슴에 모았다. 그것은 즐거운 기대와 확신이었다. 그래서 차갑고 엄격한 베네딕트 수녀가 시키는 어떤 일도 수야는 즐거운 마음으로 할 수 있었다. 은혜 속에서 살 수 있었다. 간절히 소원하면 전능한 성모 마리아가 엄마를 데려다 줄 것이다. 지난겨울은 몹시 추웠다. 얼마나 추웠던지 수녀원의 수도관이 터져나가 아랫마을에 내려가서 샘물을 길어와야만 했다. 한 마장 산비탈을 내려가야 만나는 공동우물에는 동네 아낙네들과 이따금 마주쳤다. 아낙네들은 수야를 보면 손가락질하며 자기들끼리 웃고 떠들었지만 벙어리인 수야는 전혀 그 내용을 알 수 없었다. 수야는 또 알 필요도 없었다. 그냥 그 아줌마들의 자유가 부러울 뿐이었다. 등뼈가 약간 굽은 할아버지가 물지게를 지고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그 할아버지는 테레서 수녀만큼이나 조금은 아늑함을 느끼게 하는 할아버지였다. 부엌 일을 하는 아줌마 두 분과 함께 번갈아 가며 우물을 길어오지만, 대게는 열 네 살 난 수야 혼자서 아침저녁으로 지게 져 와야만 했다. 물지게를 맨 채 얼음판 위로 미끄러지기도 하고, 산비탈 아래로 굴러 떨어지기도 했다. 그 정도는 차라리 재미있기도 하고 우습기도 했지만, 수녀원 정문 앞 계단을 오르기가 가장 어려웠다. 돌층계를 오르다가 굴러 떨어지면 때로 허리나 머리 뒤통수가 며칠 씩 얼얼하곤 했다. 우연히 지나치는 수녀들이 수야를 봐도 일으켜주거나, 받아주는 일은 없다. 그것은 베네딕트 수녀의 엄격한 규율과 교육에 의한 것이다. 그녀의 눈꼬리나 초생달 끝 같은 꾸지람보다는 회초리를 맞거나 독방에 감금되는 것이 차라리 낫다. 수녀원 안의 시간과 공간이란 것은 시계의 톱니바퀴와 같이 정확하고 물리적일 뿐이다. 웃음이나 체온을 전혀 느낄 수 없는 공동묘지와 같은 늪이다. 그러나 얼마 전에 새로 들어온 아줌마는 조금은 물기가 있었다. 아니 어쩌면 눈물이 너무 많은지도 모른다. 잠깐씩 마주치면 수야의 얼굴에 그녀의 은은한 미소와 함께 축축한 눈물을 쏟아주곤 했다. 수야는 일률적이고 형식적인 수녀 복을 입지 않은 것부터가 이 아줌마가 좋았다. 새 아줌마의 눈동자를 보면 갑자기 편안해지고 그 가슴에 안겨 죽 자고 싶다. 새 아줌마는 남몰래 수야를 대신해 물지게를 져 주었다. 한밤 중 일어나 물 항아리 열 개 중 일부를 채워놓기 위해서 서둘러대다가 아줌마도 층계에서 넘어지곤 했다. 잘못 들키는 날에는 아줌마도 원장실로 불려가서 야단을 맞거나 수야처럼 발가벗겨 독방에 감금될지 모른다. 수야는 하얀 달과 함께 층계에 앉아서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새 아줌마의 물지게를 받아 올리곤 했다. 때로 등 굽은 할아버지가 져다주곤 했는데 그 할아버지는 원장 수녀에게 한 번 몹시 혼이 난 뒤로는 수녀원 가까이에 물지게를 내려놓곤 굽은 등을 더욱 굽혀서 아랫마을로 줄행랑을 치곤했다. 수야는 새 아줌마가 들어온 이후, 머리도 옷도 깨끗이 하고, 얼굴을 자주 씻었다. 새 아줌마에게 단정하게 보이고 싶었다. 수야가 새 아줌마를 정말 좋아하게 된 것은 물지게를 대신 져 준다든지, 아무도 없는 데서는 머리를 쓰다듬어 주거나, 어디서 가져왔는지 아랫마을 아이들이 잘 씹는 껌을 손에 쥐어 준다든지 하는 그런 것보다 수화를 조금 할 줄 안다는 것이었다. 새 아줌마의 수화는 서투르지만 정감이 있고, 가슴이 찡한 손동작이었다. 아아, 수야에게도 이런 엄마가 있었으면……. 성모님에게 간절히 기도를 했으니까, 갑자기 사라진 엄마는 또 갑자기 수야 앞에 나타날 것이다. 그러면 새 아줌마도 이런 황량한 수녀원을 나와도 좋을 것이다. 어쩌면 돈을 많이 벌어온 엄마가 새 아줌마를, 수야랑 같이 데리고 나와 아랫마을에서 같이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꼭 그렇게 하고 싶다. 수야가 더욱 열심히 마리아에게 기도하면 테레사의 말대로 성모님은 수야의 소원을 들어줄 것이다. 새 아줌마가 처음 이 수녀원에 들어온 것은 눈이 펑펑 내리던 날이었다. 수야가 테레사와 함께 시장에 가서 소금과 성냥 등을 사 가지고 돌아오는데 수녀원 처마 밑에서 웬 여자가 보퉁이를 하나 들고 서성였다. 그 여자는 테레사를 보더니 달려와서 울먹였다. 테레사는 들고 있던 물건들을 땅에 내려놓고 여인의 손을 마주 잡았다. 전부터 아는 사이일까  수야에겐 너무나 신기했다. 몇 년을 가도 사람 한 번 찾아오기 어려운 이 산골에 더구나 테레사에게 아는 세상 사람이 있다는 게 이상했다. 테레사는 그 아줌마를 원장실로 데려다 주었다. 수야는 얼른 뒤뜰로 돌아가 원장실 창문 밑에 쪼그리고 앉았다. “안 된단 말이에요. 어림도 없어요. 여기가 어딘데 세상 사람이 함부로 들어온단 말입니까 ” 베네딕트 특유의 끊어지고 앙칼진 말 사이사이에 흐느낌과 함께 애절한 하소연이 새어나왔다. “원장님 저는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어요. 어려서부터 못 해본 일이 없이 다 해보았어요. 저는 갈 데가 없답니다.” “아아, 원장 수녀님 시키는 일은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어요. 제발 있게만 해 주세요. 돈도 필요 없고 먹게만 해 주세요. 사회에서 돈 좀 모아보려고 별 일을 다 해보았지만 사기만 당했어요. 여기가 제일 편안한 곳이에요.” “정, 그렇다면 할 수 없군요. 분명히 월급은 없어요. 그것도 여기 규율에 어긋남이 없어야 해요. 그 규칙 때문에 적잖은 사람이 쫓겨 나갔어요.” “아, 정말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절대 성모님과 원장님에게 순종하겠습니다.” “좋아요, 나가 보세요. 테레사 수녀! 이 아줌마에게 맡길 적당한 일을 찾아보세요.” 나이가 훨씬 많은 총무수녀도 베네딕트에게는 끽 소리도 못했다. 일반 수녀들은 더욱 그랬다. 테레사는 이곳의 터줏대감이지만 베네딕트는 몇 년 전에 이태리 수녀의 대통을 받아 외국에서 들어왔다. 수야는 테레사가 새 아줌마를 데리고 식당으로 들어가는 것까지 뒤밟아 확인하고는 안심했다. 수야는 새 아줌마가 자기에게 더욱 관심을 갖게 하도록 하기 위해서 첫 번 째 음모를 몇 달 전에 저질러 버렸다.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하여 수녀들이 식당 입구에서부터 한 줄로 서 있었다. 테이블에 김치, 간장 등을 날라주던 수야는 국이 든 바구니를 들고 식당에서 나오는 새 아줌마를 보자 기회는 이 때다 하고 새 아줌마를 향해 앞으로 돌진하여 간장병을 든 채 일부러 엎어졌다. 바구니는 뒤집어지고, 근처에 있던 수녀들의 비명과 함께 콩나물국은 수녀 복들을 얼룩지게 만들었다. 새 아줌마는 얼른 수야를 일으켜 안았다. 뜨거운 국 국물에 데이지는 않았나 옷을 벗겨 가며 더듬었다. 몇몇 수녀들이 소리없이 현장을 수습했으나 주방 안의 아줌마가 어느새 베네딕트를 앞세우고 들어왔다. “모두들 기도실로 들어가요! 오후 시간은 그대로 평상 시간으로 바꾸겠어요.” 새 아줌마는 수야를 얼른 테이블 위에 내려놓더니, 원장 앞으로 다가갔다. “제가 잘못 했어요. 수야나 수녀님들은 아무 잘못이 없어요. 제발 원장 수녀님, 어젯밤에 한쪽 연탄불이 꺼져서 제가 좀 서두르다 보니 미끄러졌어요. 용서하세요.” 테이블에 누운 채 듣고 있던 수야의 가슴 속에는 국 국물보다 더 뜨거운 애정이 흘렀다. “아니에요, 베네딕트 수녀님, 아줌마는 아무 잘못이 없어요. 내가 일부러 그런 거예요.” 그러나 입 속에서만 중얼거릴 뿐 용기가 없었다. 베네딕트는 몸을 홱 돌려 발뒤꿈치를 울리며 사라졌다. 수야의 음모는 적중했다. 새 아줌마의 가슴은 얼마나 따뜻하던가. 가냘프고 초라했지만 넉넉한 엄마의 가슴이었다. 수야는 떨어지지 않으려고 앙탈을 부렸지만 베네딕트의 처벌이 무서워 얼른 울음을 그쳤다. 며칠 동안 새 아줌마는 밤이면 몰래 수야의 방에 와서 간호를 해 주었다. 그 이후 수야는 더욱 열심히 성모상을 찾았지만 엄마는 크리스마스가 다 되었는데 나타나지 않았다. 수야는 초조해 지기 시작했다.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꼭 새 아줌마랑 엄마랑 아랫마을에 갈 수 있으리라고 확신했었는데……. 테레사가 작년 같이 또 거짓말을 했는지도 모른다. 아니, 성모 마리아가 거짓말을 했는지도. 내년…… 내년이라면 언제란 말인가. 정말, 등 굽은 할아버지가 얘기했듯이 성모상은 하나의 돌덩이에 불과할지 모른다. 결코 전지전능하지 않은 돌메이일 뿐이다. 그래서 수야는 두 번째의 음모를 계획한 것이다. 크리스마스 사흘 전 일이다. 식당의 불이 마지막 꺼지자 수야는 준비한 망치를 들고 살금살금 성모상 앞으로 다가갔다. 황량한 달빛 아래 성모상의 긴 그림자가 살아 꿈틀거렸다. 주위를 흠칫 살폈다. 죽음의 바다다. 의자를 받치고 대에 올라갔다. 하얗게 비치는 성모상의 얼굴 위에 손을 높이 들어 첫 번째 망치를 내려치려는 순간, 누군가 어깨를 가만히 잡았다. 깜짝 뒤돌아보니 새 아줌마였다. 수야는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새 아줌마는 수야를 천천히 부축해 내렸다. 성모상 뒤의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다소곳한 달빛 아래 새 아줌마의 수화는 시작되었다.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쳐가며 조용하고 빠른 새 아줌마의 손놀림은 수야의 가슴을 뒤흔들었다. “성모상을 깨어버릴 이유가 없어. 내가 네 엄마야, 세 살 때 너를 버리고 달아난 네 엄마야.” <수필부 장원> 거울 박철규(경동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