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제 22회 콩쿠르 수상작(박형준, 김은경, 인소영)
등록일 2015-06-26
작성자 학과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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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부 장원>
목소리
박형준(인천 제물포고)
1)
Ⅰ
누님.
내가 아홉 살 때 누님은 스무살이었지요.
그날 뒷울안의 해바라기는 간장목보다 더 큰 키로 흔들거렸어요.
나는 숨어서 손톱보다 윤기있는 하늘을 올려다 보았어요.
누님은 그때 노오랗게 잘 익은 참외 단물고인 목소리로 나를 찾았지요.
나를 부르는 소리가 길게 내 등짝을 지나 휘파람소리처럼 날아가 나를 가려준 해바라기 노오란 얼굴을 물들였을 때 누님.
전 지금도 기억해 낼 수 있어요.
누님은 내 발바닥 밑에서 수런거리는 채송화 꽃잎보다 더 이뻐 보였어요.
그리고 나는 누님의 품 안에 뛰어들어 우리 동네 유일의 대학생,
하리논을 내어주었던 이장댁 막내 아들의 산그늘지는 러브레터를 전해주었지요.
이마 푸른 누님의 목소리가 해바라기 노오란 얼굴에 걸려 넘어지는 것을 보면서.
Ⅱ
햇살에 반짝이는 파도 한자락
잡는 꿈을 꾸다가
풀 깎인 언덕에서 몸버린 들꽃들이
떨어져 모래시계처럼 무너져내리는
시간
밋밋한 자기 몸을 버린 모든 하늘이 숨어있는 시간의 모래톱 속.
뗏목을 타고 오는 노을들이 버려져 있다.
누군가 놀다버린 시대의 뜰이 하나 젖고 있는 저녁.
아울러 우리의 빈꿈이
뼈아픈 목울음 울며 떠나가고 있다.
누님은 어디로 가는가.
누님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빈 방에서 몇잎 형광 불빛이
떠도는 벽돌의 오후.
낡은 서랍 속에서 누님의 편지가 흐느끼고 있다.
서른살 먹은 누이가
스무살 처녀가 되어 몸 버리던 풀 깎인 언덕에서
사내가 꺾은 들꽃으로 피어 있다.
이층집이 그려져 있는 그늘진 목소리로
찢어진 러브레터
가난의 강물위에 뜨고 있다.
Ⅲ
불면의 밤에
깨어 일어나 기침하는
산하(山河).
목마른 자의 밤이
하얀 소금 덩어리로 남아
마르고 있을 때,
더러는 피리 구멍만한 바람이 지나고
누가 빈 목소리 하나 떠도는
누님의 방안을 엿보고 있느냐.
혀 짧은 우리들의 가슴에 아침노을 하나 입혀주고 가느냐.
<소설부 장원>
선물
김은경(경북 봉화여고)
타오르고 있었다. 뜨거운 뙤약볕 아래 열이 오른 블록 담장 옆 태양빛에 흠뻑 취한 해바라기 꽃잎술을. 샛노란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한 움큼씩 더위를 토해내고 있었다.
파르르르 파르르르르.
가득 열기를 삶아 먹은 무수한 꽃잎은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잠자리 날개짓 같기도 했고 물 찬 제비의 날개짓 같기도 했다.
“다다다다 땡그르르” 신들린 무당처럼 조금씩 진동하던 꽃잎들은 난무하기 시작했다. 일순간 움직이던 꽃잎이 멈춰지며 무언가로 변신해 가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손이었다. 아주 쭈글쭈글한 서서히 나를 향해 접근하기 시작한 그 정체불명의 손은 지그시 나의 목을 잡더니만 누르기 시작했다. 점점 세게 나의 목을 조이기 시작했다.
“??”
목을 조이는 그 다섯 손가락을 뿌리치려고 해도 잘 되지 않았다. 오히려 더 꽉 조여 오는 것이었다. 답답했다.
“놔, 이 손 놔. 집어 치우란 말야.”
“야가 새벽부터 무슨 소리를 이렇쿰 지른단가 ”
헉, 꿈이었다.
“냉큼 일어나지 못할껴 ”
“…….”
“댕그렁 댕그렁.”
가래 섞인 숙부의 탑탑한 소리에 연이여 새벽미사를 알리는 성당의 종소리가, 차츰 뚜렷해지는 여명을 앞세우고 나의 방문 앞에서 스러지고 있었다. 얼떨떨했다. 정말이지 무서운 꿈이었다. 어쩌께 염을 한 할머니의 시신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꿈에 본 손가락은 그 할머니의 싸늘했던 손가락과 몹시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 재설아 빨리 나와라.”
“예 나가요.”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었다. 마치 알몸인 일부의 한 부분을 가리기라도 하듯 차례차례로 남방의 단추를 채워 내려갔다.
“쩝쩝, 우직 우직.”
“밥 더 떠다 먹어라, 오늘 새벽에 기차에서 사고가 났다더라, 쫌 있으면 시신이 실려 올께다. 대여섯 명쯤 되는 모양이더라.”
숙부의 말을 듣는 순간 옆에 앉아 밥을 먹던 호정의 얼굴이 흐려지는 것을 보았다.
“아니, 이 자슥아, 왜 내 말에 무슨 가시라도 돋쳤더냐 왜 인상을 찌푸리는 겨 ”
“아님니더, 그냥…….”
호정이 말끝을 흐렸다. 경상도가 고향이라는 호정이, 그러니까 숙부의 가게에서 더부살이를 하는 나와 같이 일을 하는 동료이다. 자식은 언제나 말이 없었고 시간만 나면 바다로 가고 싶다는 등의 엉뚱한 소릴 하곤 했다. 그럴 때의 녀석의 목소리는 언제나 가늘게 떨리고 있었고 눈은 이상한 광채를 발하기도 했었다.
숙부는 염쟁이다. 좀 유식한 말로?자기가 자기를 지칭할 때?는 염사라고도 한다. 그러니까 사람이 죽으면 옷을 입혀 관에 넣어주기 전에 몸을 씻어주는 일을 하며 숙부는 돈을 벌고 있었다. 허가를 얻어 이 장사를 시작한 지도 벌써 10여년.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인 꼬맹이일 적에 숙부의 집에 놀러와 보면 집엔 언제나 나무로 짠 관이 여러 개가 널려있었다. 어린 나이에 그게 왜 그렇게 궁금하고 무서웠던지. 그래서인지 난 숙부에게서 지금도 일종의 공포를 느끼곤 했었다.
“야, 재설아 넌 빨리 밥 안 먹고 뭘 하냐 ”
숙부는 한참 생각에 잠긴 나를 나무라시면서 젓가락으로 신 김치를 집어 우걱우걱 씹으셨다. 씹히는 김치의 소리가 묘했다.
“호정아, 너 오늘 좀 괜찮냐 ”
염려스러운 목소리로 내가 물었다.
“괜찮은 것 같아.”
목소리엔 왠지 힘이 없었다. 하지만 차분했다.
“나도 처음에 일할 땐 몹시 께름칙하고 또 일만 할라카면 아 밴 여자처럼 헛구역질이 났었는데 이젠 만성이 돼 나서 그런지 괜찮은 것 같다. 너도 시간이 지나가면 괜찮을 꺼야.”
나의 음성은 좁은 방안을 맴도는 담배 연기처럼 어설픈 몸짓으로 호정의 귀에 가서 닿은 모양이다.
“자식아, 넌 어째 이런 델 굴러 들어왔노. 몸도 좋지 않은 것 같은데.”
“여기 저기 가다 보니까 그렇게 됐어.”
녀석은 잘 말해 주질 않았다. 왠지 자꾸만 정이 가는 놈이었다.
“야 이놈들아 빨리 안 나오고 뭘 하노.”
어느새 시신을 실은 차가 밖에서 빵빵거리고 있었다. 유족들처럼 보이는 아주머니 몇 명이 숙부님과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영차, 영차”
죽은 사람의 몸이 몹시 무거운 것 같다고 새삼스레 생각하며 오늘 일당은 꽤 되겠구나 하고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재설아, 너 빨리 가서 물이나 준비해라.”
“야.”
난 얼른 물을 준비했다. 큰 아주 큰 고무 대야에다가.
“쓱쓱”
숙부는 얼굴 표정 하나 흩트리지 않고 씻겨 내려갔다.
“봐라, 시체라고 생각할 건 없는 기라. 껍질 벗겨 논 동태라고 생각하고 씻으면 된다. 돈만 벌면 안 되나.”
두터운 숙부의 입이 탐욕스러워 보인다고 생각되는 순간이었다.
“웩”
호정이가 입을 틀어막으며 급히 뛰어나가고 있었다.
“아니, 저 녀석이 ”
숙부가 계속 소리 쳤다.
“내일부터 저 녀석 못 나오게 해.”
단호했다. 나는 듣는 둥 마는 둥 녀석을 뒤따라 쫓아갔다. 쓰레기통 한쪽 구석에서 녀석은 왝왝거리며 아침 먹은 걸 다 토해내고 있었다. 난 급히 뛰어가서 바가지에 물을 떠와 녀석에게 주면서,
“자, 빨리 일어나 입이나 헹궈라.”
일을 끝내고 돌아서는 녀석의 얼굴이 희었다. 비틀거리며 일어서는 그의 몸집이 유난히 왜소해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 내 방에 가서 누워있어라. 오늘 일은 내가 끝낼 테니까.”
“아니 내가 할게.”
“그러다간 또 쓰러지면 어떡해 ”
다음에 내 일을 네가 하라고 일러놓고 녀석을 타일러 방으로 보냈다.
“아니 아프다는 녀석을 왜 끌고 들어오는 게벼 ”
숙부님은 이렇게 말씀하시곤 더 이상 아무 말도 않으셨다. 월급을 그렇게 적게 주고 고용하기가 그리 쉽지 않음을 계산하신 겔까
“숙부님, 야가 많이 아픈가 봐요. 내가 야 일까지 할 테니깐 가만 두슈.”
“누군 이 장사 하고 싶어 한다냐. 팔자야 팔자. 아 사람이 지 팔자대로 안 살고 어떻게 살껴 ”
숙부는 묵묵히 시신을 씻어 내려가셨다. 숙부는 호정이가 할 7호 시신까지 다 씻겨놓으시고, 8호를 막 시작하는 나를 향해 말씀하셨다.
“얼른 끝내고 들어가라.”
“야.”
미끈했다. 조금의 온기도 없이 싸늘하게 식어버린 죽은 시체, 난 갑자기 섬뜩했다. 아니야 그렇게 그렇게 무서워 할 필요는 없어, 극락가라고 잘 씻겨 베옷까지 입혀 관에 넣어 줬는데 누가 싫단 말인가. 일을 다 끝내자 점심 무렵이 훨씬 지났다. 씻고 방으로 가 보니 호정이는 잠들어 있었다. 미동도 없이 자고 있는 호정이는 죽어있는 시체를 방불케 했다. 마치 수밀도의 얇은 껍질을 벗긴 달디 단 흰 살결의 복숭아 알몸처럼 너무도 창백하게 그의 얼굴은 굳어져 있었다.
“으음…….”
녀석은 얕은 신음소리를 내며 깨어나고 있었다.
“야 이제 좀 괜찮니 ”
“응.”
이제 좀 안색이 괜찮을 때도 되었지만 여전히 창백했다.
“나가자. 내가 한 잔 살게.”
녀석은 아무 말 없이 츄리닝을 걸치고는 따라 나왔다. 골목을 돌아 허름한 선술집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아주머니, 여기 소주하고 안주 좀 주이소.”
“예예.”
인심 좋아 보이는 아주머니가 얼른 소주잔을 가져왔다. 연이어 술, 안주…….
“짜르르르륵.”
“자, 마셔라.”
투명한 소주를 녀석의 잔에 가득 부어 주었다.
“꿀꺽 꿀꺽”
우리는 말없이 서 너잔을 거푸 마셨다.
“아주머니, 한병 더 가져오이소.”
“예예.”
똑같은 동작 똑같은 억양으로 아주머니는 대답하고 술을 가져왔다.
“마시자.”
술이 몇 잔 들어가니 녀석은 말을 하기 시작했다.
“난 가야겠다.”
“어딜 간단 말야.”
내가 내뱉듯이 반문했다.
“싫은기라, 나는 마 죽고 싶은 기라. 산에서 농사나 짓고 살라니 그렇고 그래서 서울로 왔는데 취직자리는 없고, 만날 죽은 시체만 만질려니 미치겠는 기라.”
녀석은 울고 있었다.
“너 숙부도 그렇게 사람들한테 돈만 받아 가지고 죽은 사람들을 아무렇게나 씻어 보낼 수 있나, 그게 사람이 할 짓인가.”
“시끄럽다. 임마.”
“나는 갈매기가 좋아. 줄을 넘을 끼야. 줄을 넘어서 바다로 갈끼야.”
녀석은 술이 들어가서인지 자꾸 엉뚱한 소릴 하며 떠들고 있었다.
그날도 몹시 바쁜 날이었다. 저녁 무렵 손님이 몇 명 들어왔다. 내일 아침까지 관에 넣을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거였다. 숙부는 우리들에게 내일 하루를 쉬게 하는 대신 밤샘을 해 달라고 했다. 주룩주룩 비가 오고 있었다. 우리는 승낙을 하고 일을 하기 시작했다. 이제 두 명만 끝내면 오늘 일은 그만이었다.
“호정아 3호 손님 관에 넣어라.”
“뭘 옮겨 ”
녀석의 억양이 묘하게 비틀어지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야, 몰라서 묻니 ”
내가 비꼬듯 말했다.
흑.
그런데 녀석의 눈빛이 이상했다. 동공이 멀었다. 눈동자가 풀려가고 있었다. 난 얼른 3호 시체를 운반해 놓고 나머지 일을 후딱 해치웠다. 녀석을 앉히고 이것저것 물어 보았다.
“호정아 너 어디 아프니 ”
“응 누가 아퍼. 내가 야, 내가 아파서 죽으면 좋겠다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