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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제 28회 콩쿠르 수상작(김길련, 오윤정, 채송화, 성연경)

등록일 2015-06-26 작성자 학과관리자 조회 1182
<시부 장원> 아침 김길련(대구 대전고) 밤새 비가 내리던 날. 내가 본 것은 흰 이를 갈며 달려드는 바람소리 그아래 사랑과 슬픔이 분류된 나약한 이 땅에 깔린 자갈의 울음 우는 소리였다. 슬픔의 종말이 더 이상의 희망일 수 없음을 외쳐대는 가난한 몸짓이었다. 나는 때 아닌 봄비를 맞으며 어금니로 입술을 꼭꼭 깨물었다. 뒤척일수록 아파오는 우리들의 꿈 생각하면 할수록 배고픈 내 의식 생각하면 삶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머리위로 더욱 더 맹렬히 달려드는 바람 물러설 자리조차 보이지 않는 그들 가난보다 더 깊이 주름진 삶의 싱싱한 꿈조차 매운 눈물로 추락하고마는 창밖의 광경. 진정 소리없이 타오르는 모닥불처럼 향기로운 그들 삶의 무게는 어떠했을까 지금, 고통의 담즙을 뿜어대는 서편 하늘 나는 내가 본 이 땅의 애절함과 마른 찔레꽃잎처럼 서럽게 부서져간 그들을 사랑해야한다.칠흙의 어둠을 뚫고 눈부신 햇살 가슴 가득 채울 수 있는 아침이 올 때까지. <시조부 장원> 산사에서 오윤정(구포여상) 햇살이 꿈에 젖은 오월의 한 켠에는 이끼 낀 돌기둥이 산허리를 감고있네. 결 고운 청자빛 하늘 물무늬로 일렁이고. 푸른 닢 잎새마다 묻어 오는 흐느낌은 인고의 설운 세월 핏줄 여윈 범종 소리 한 하늘 부서지도록 사무치는 통곡인가. 깃털처럼 쌓여가는 돌 층계 얽힌 내력 연당의 빛을 모아 천 년으로 엮어 내곤 빈 가슴 속살 푸르게 여며가는 저 바람. 연월에 깊이 잠긴 정한의 뜨락에는 끊임 없는 풍경 소리 충혈된 가슴 있어 해묵은 석등의 시름 빛살 속에 포말 진다. 세월 익은 석탑 가 단층 빛 물든 정적 부연 끝 몸을 가믄 목탁 소리 더욱 깊어 허한맘, 고른 숨결 위에 또아리를 틀었네. <소설부 장원> 편지 채송화(안양예고) 눈을 떴다. 힘없이 늘어진 커텐 사이 아침햇살이 스물거리며 파고든다. 머리가 아프다. 나는 돌아누우며 이불을 뒤집어 썼다. 모두가 오빠 탓 이었다. 그동안 우리는 충분히 괴로워 했고,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평온한 상태였었다. 더 이상 어떻게 하라는 건가……. 목이 탄다. 속이 괴로웠다. 어제 마신 위스키 탓 이리라. 나는 비척비척 일어나 부엌으로 갔다. 그리고 이런 일에 이골이 난 사람처럼 냉수를 쭉 들이켰다. 응접실에서는 아버지가, 언젠가 역전에서 봤던 술주정뱅이처럼 초라하게 웅크린 모습으로 잠들어 있다. 금방이라도 눈을 부비며 엄마를 찼을 것 같은 아버지의 약간 비뚝어진 입매가 애처롭다. 탁하게 가라않은 공기 때문인지, 갑자기 숨이 막힐 듯 답답했다. 창문을 열었다. 화사하게 내려않은 5월의 햇살이, 목련꽃잎이 다 떨어져 버린 나뭇가지에 앙상함을 더 해 주고 있다. 꼭 작년 이맘때 였나 보다. “엄마는 올 여름에 미국에 가신단다.” 아버지는 기쁨과 설레임에 일그러진 얼굴로 가족들에게 이 놀라운 소식을 알렸다. 가족 이라고는, 엄마, 아빠를 제외 하고는 오빠와 나, 겨우 둘 뿐이었지만 말이다. “우리 모두가 이민 신청을 하는 것보단 엄마가 먼저 가서 시민권을 따놓고 초청장을 보내는 것이 더 빠르고 현명한 방법 이란다.” 내 불안한 얼굴을 아버지는 장난스럽게 툭, 툭 치시며 말했다. “현주 너도 학과 공부도 중요하지만 이제부턴 영어회화에도 신경을 쓰거라.” 자신감있게 들려야 할 아버지의 말이 나에게는 단순한 들뜸과 흥분으로 받아들여 졌던 것이, 이토록 길고 긴 불안의 예감이였을까. “학원 안가니 ” 언제 일어났는지, 아버지가 고장난 곰인형 마냥 엉성한 폼으로 앉아 계셨다. “오늘은…… 그냥 쉴래요.” 사실 어디로든지 가고 싶었다. 이 집에 배여있는 진득한 기다림과 시간의 늪 속에서 헤어나고 싶었다. 그것이 단 몇분이 될 지라도 그러나……. “라면이라도 끓여 드릴까요  아빠 속 안 좋으시죠.” 나는 애써 명랑하게 말했다. “음” 아버지는 신음도 대답도 아닌 아리송한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드러누웠다. “현주야” 아버지의 목소리는 비굴할 만큼 풀이죽어 있었다. “너도 이 아빠를 원망하고 있지  느이 오빠처럼.” “아빠 잘못이 아니잖아요.” 서글펐다. 가스레인지 켜고 불을 올렸다. 이 모두가 어머니가 해야할 일들이었다. 그리고 그 어머니를 떠나 보낸 사람은 저 아버지였다. “금방 오시는 거죠 ” 공항에서, 어머니를 배웅하고 돌아오는 길에 나는 몇 번이나 아버지에게 다짐을 받아 냈었다. “그럼, 그럼.” 아버지는 처음으로 어머니와 헤어져 있게 된 것에 상심해 있었지만 자신있게 내 손을 쥐어 주셨다. 그 해, 나는 대입고사에서 낙방했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낙오자의 비참은 견딜 수 없을 만큼 힘든 것이었다. 아버지는, 오히려 회화공부 하기에, 더 잘 되었다고 웃으시며 위로해 주셨었다. 오빠의 말대로 아버지는 나약하고 무능력했지만, 그 때만큼은 가장의 권위를 되찾아 집안의 분위기를 되살리고는 했다. 어쩌면 그때가 아버지에게는 가장 행복한 한 때가 아니었는가 싶다. “드세요.” 라면에 보잘 것 없는 묵은 김치 하나, 달랑 내놓기가 새삼 죄송스러웠다. 지금까지와 별 다를 것 없는 밥상인데도 말이다. 아버지는 아무말 없이 젓가락을 드셨다. 상당히 허기가 지셨었는지 뜨거운 라면 김에 눈을 끔벅이셨지만 곧, 라면국물을 훌훌 둘이 마셨다. 내 목이 매일 지경이다. “현석이는 아직 안 왔니 ” “네” 한숨을 쉬는 아버지의 얼굴이 무척이나 늙어 보인다. 그렇다. 아버지는 어느순간부터 갑자기 나이를 먹고 있었다. 아직도 어머니에게서는 연락 한 장 없다. 우리 모두가 기다림 속에 더욱 늘어진 시계의 초침을 따라가고 있었다. 마냥 싱그러워야 할 봄의 여유는 우리 가족에게 고요한 체벌로 다가오고 있었다. “물 드려요 ” “아니다.” 아버지는 한참 담배를 찾더니 폐인처럼 한 쪽 구석에 쭈그려 앉았다. “아버지의 실패한 인생의 끄트머리에 들러리가 되는 것은 참을 수 없어요.” 오빠는 무서울 정도로 냉정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었다. 그러나 나는 아[바른말 고운말을 사용합시다.] 술에 취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일어섰다. 아버지의 담배 연기로 다시 탁해지는 실내, 아 이제는 정말 벗어나고 싶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집을 나왔다. 그러나 불안에 막힌 답답함을 끝나지 않았다. 조금도……. 오빠의 말처럼 나도 아버지처럼 무능력한 현실 도피가 되고 싶지 않은 까닭일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문득 아버지가 걱정된다. 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기다림이라는 틀 속에 어느덧 하나로 묶어져 버린 아버지, 나, 그리고 오빠. 이제 집에 들어가야겠다. 나는 배시시 웃었다. 그것은 무겁게 등에 메어져있는 긴장감이 떨어지는 허망감을 맞이하는 웃음이다. 나는 집에 들어가는 길목에서 문방구점을 찾았다. 편지지와 펜을 샀다. 펴??熾〈?이렇게 쓰리라. “더 이상의 기다림에 모두가 지쳐 버렸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마지막 결정을 했습니다. 이제는 기다리는 것에게로 우리가 가기를 원한다고.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힘들고 괴롭겠지만, 하나 하나 밝히며 우리의 힘으로 찾아 가겠다.“고 나는 누구에게 인지 모르는 그러나 희망에 찬 힘찬 필치로 하얀 백지 위에 편지를 써 나갈 것이다. 나는 집앞에 한참이나 서성거리고 있었던 것 같은 오빠의 발자국을 보았다. 이제는, 아무런 두려움도 없을 것같은 행복한 기운이 집앞을 감싸고 도는 듯 했다. <수필부 장원> 일장기 성연경(경동고) 흰 백지 위의 붉은 태양을 접는 연습을 한다. 사람의 심리가 어떤 모형이나 그림의 형태에 의해 좌우된다면 그 또한 우스운 일이겠지만, 이 땅을 딛고 선 사람이라면 저 이웃나라 붉은 원 모양의 국기를 아무런 동요 없이 바라볼 수 없으리라. 그리 이상할 것도, 거북할 것도 없는, 일본이라는 일국(一國)의 국기에 지나지 않지만 그 가운데 36년이라는 시간이 녹아있는 까닭이다. 사실 나에게 있어서 일장기라는 개념이 사무치게 가슴에 드리운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 역시 한국의 따스한 봄볕을 호흡하고 있기에 여기의 풀 한 포기, 둘 하나를 낮선 깃발 아래 그늘지게 했던 이들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질 수 없는 것만은 사실이다. 나의 코흘리개 시절, 별로 명석한 두뇌를 가지지 못한 나는 일본이라는 나라에 무척 고전했던 것 같다. 도대체 6 25를 일으킨 나라가 북한인지 일본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막연히 둘 다 나쁜 나라라는 생각만 가진 탓에 형에게 핀잔 듣기 일쑤였다. 혹 아버지께 여쭈다가도 복잡한 설명이 어려워 결국 어느 나라가 더 나쁘냐는 식이었다. 내 생각 자체가 이러해서, 일본에 대한 어른들의 생각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언젠가 일본을 방문한 우리나라 원로 정치가가, 여유를 보이며 악수를 청하는 일본 관리의 손을 거절하는 것을 보고는 몹시 의아해 했다. 주워 들은 지식으로는 세계의 경제를 쥐고 있다는 그 손을 기꺼이 잡을 수 없었던 그 분의 가슴에는 얼마나 커다란 응어리가 져있었는지. 그 장면을 지켜보는 모든 사람들이 크게 공감하는 것 또한, 당시 어렸던 내게는 너무나 힘든 문제였다. 다만, 내가 체험치 못한 역사의 한 구석이 궁금했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이제, 직접 일장기 앞에 머리 숙여 보지 못한 우리 세대도 그 나라에 대한 우리 할아버지들의 생각과 동일한 감정을 가지게 된 듯 하다. 한국 선수가 일본 선수의 유도복 허리띠를 쥘 때, 모두가 함께 열광하며 마침내 태극기 밑에 오르는 일장기를 보며 하나의 감격을 느끼는건 무슨 이유일까  일장기의 붉은 원 속이 윤동주님의 시와 한용운 스님의 비분강개한 목소리가 터질 것만 같다. 그네들의 피가 어우러져 있음으로 인해, 일장기 밑에 고개 숙이지 않아도 되는 나와 네가 있다는 생각을 해 본다. 아직도 우리 가슴에 멍든 상처가 남아 있지만, 어엿히 한국의 생활 속에 나부끼는 일장기를 보며, 이제 나는 무엇을 말할까 하는 의구심을 품는다. 언론에서 말하는, 허황된 망언과 무책임한 오도로 썩는다고 까지 할 수는 없더라도 분명히 그들은 일장기의 속성을 버리지 못한 듯 싶다. 사죄하는 말로써 모든 것들의 허물을 씻어도, 일장기 마크를 잊지 못하는 우리들의 할아버지들의 한이 씻어질 수 없으리라. 며칠 전, 종로에 나가는 길에 작은 공원에 들른 적이 있다. 선열들이 일본의 칼 앞에서 만세를 불렀다는 공원에서, 그 시대에 사셨던 분들만 자리하고 있었다. 얼굴에 가득 주름을 새긴 한 노인의 호소하는 목소리는 많은 것들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토록 보기 싫은 일장기가, 태극기와 함께 거리에 나부끼는 것을 보는 구시대의 잊혀진 마음이 어떠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다 그만 용서하자는 일각의 소리가 결코 그리 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며칠 전 저녁, 막내가 그리는 반공 포스터의 전차에 엉뚱하게도 붉은 원무늬가 있는 걸 보고는 한참을 웃었다. 그 일장기를 지워주며, 이게 아니라고 말해 주었지만 여전히 이상하다는 표정이다. 서서히 잊혀지는 아픈 시대의 사람들, 그들 앞에 조금도 나설 바가 없는 나는, 일장기의 붉은 색 밑을 파란 물감 붓을 들어 덮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