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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제 36회 콩쿠르 수상작(김믿음, 이신애, 임여빈)

등록일 2015-06-26 작성자 학과관리자 조회 1236
<시부 장원> 강물이 흐르듯이 김믿음(양천여고) 투명한 아침 햇살 위로 출발하던 사람들의 건강한 노동, 줄줄이 퇴근 승강장마다 들어차더니 고척시장에서 본 햇살잉어처럼 순금빛 해가 지고 있다. 노오랗게 아문 달이 어두운 창문을 수놓는 동안 일을 마친 아빠는 간단한 품삯을 받아와 등등 코를 고신다. 깊은 어둠이 희끄무레 신작로를 트면 엄마는 땟구정물 씽크대를 설거지하시네. 한 삯씩 쌓이는 일과마다 잔잔한 기쁨 슬픔, 그 위로 식기와 수저가 달그락, 호미날처럼 은은히 빛난다. 저녁 노을이 마음껏 날개를 편 채 어둠으로 향할 때, 하루 외출의끝에서 목말라 쪼옥 마시는 생숫물 나무들은 한밤내 몰래 물을 먹는다. 날이 밝으면 앞길 솔나무에 묻은 새벽빛을 되찾아야지, 한참 늦잠에 빠진 동생 머리맡에 기쁨 한 포기 따놔야지. 우린 새벽길을 재촉할 아빠의 신발을 털고 닦는다. 땀에 전 작은 일터에서 나와 동생이 눈에 찬찬히 ‘작신작신’ 밟힌다‘는 아빠…… 뒤에서 방싯 웃는 잔소리꾼 우리 엄마 화다닥, 보름이와 나는 도시락과 신발주머닐 챙긴다. 맑은 아침빗물로 씻겨지는 유리창의 햇빛 몇 줄기 여름 빗소리가 강물에 시원히 흰 거품을 일게 하면 하루하루 달라지는 물빛으로 그 강은 쉬임없이 흐른다. <소설부 장원> 벽 이신애(안양예고) 무능력자들 투성이지. 아무도 인정하려 들지 않을 뿐, 그러므로 우리는 무능력하고 무식한 족속.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진리이며 사실이다. 나는 모험을 하고 싶다. 아무도 눈치챌 수 없게, 나 혼자서 음모를 꾸민다는 것은 정말이지 스릴 넘치는 일이다. 이를 닦으면서, 거울 속에 비쳐지는 거품을 잔뜩 문 네 얼굴을 보면서 그 계획을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은 더욱 긴장되고 오래전에 퇴화한 내꼬리뼈가 불쑥 일어설 것만 같은 기분이 들게 만든다. 하지만 비밀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비밀리에 떠나는 모험 여행을 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흠뻑 젖은 채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13md을 누른 후 벽에 붙은 사각 거울에 얼굴을 밀착시켜본다. 비를 한참 맞고 온터라 눈 주위에는 시퍼런 그림자가 깔려 있었다. “왔니  대청소를 했더니 피곤해서 잠깐 누워있는 다는게 그게 말야…….” 내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언니는 쩔쩔매며 말했다. 아마도 나의 젖은 모습 때문일 것이다. “화낫니  내가 잘못한 거지  우산을 챙겨서 마중 나갔어야 하는데.” “됐어, 나 샤워할거니까 더 자.” 나도 모르게 쌀쌀맞게 튀어나왔다. 나는 내가 던진 말에 후회하고 있었지만 다시 정정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미안한 마음은 언니 앞에서 나를 머뭇거리게 만들었다. “우산 가지고 다닐게. 장마철에 우산 안 가지고간 내가 멍청한 거지.” 요실 문 앞에서 젖은 옷을 벗으며 언니의 표정을 살피려 했지만, 언니는 거실 바닥에 납작 엎드려 내가 흘리고 들어온 빗물을 훔칠 뿐이었다. 항상 저렇게 주눅들어 있는 언니의 모습은 정말이지 내 숨통을 조여온다. 나는 수도꼭지를 잇는 힘껏 비틀었다. 따뜻한 물이 몸이 밀려날 정도로 세차게 쏟아져 나왔다. 전신을 안마기가 훑고 간 것처럼 기분 좋은 떨림이 느껴졌다. 거실에 나왔을 때는 언니가 끓이는 토란국 냄새가 구석구석을 파고 들고 있었다. 언니와 나는 한집에 살지만 얼굴 보는 시간은 세시간을 채 넘기지 못한다. 이른 아침에 나가 해가 떨어져서야 들어오면 나는 밥을 먹고는 곧 내방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언니의 유일한 대화상대는 저기 베란다에 놓여진 말못하는 선인장과 오직 나뿐이다. 선인장은 엄마가 키우던 것인데 엄마는 유독히 저 투박한 선인장을 아꼈다. 그런 생각을 하자, 나는 무슨 심보인지 그렇게 고소하고 입에 붙던 토란국이 갑자기 토란이 여물기 전 특유의 아린 맛만 느껴지는 것 같았다. 언니는 대인 공포증으로 중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했다. 언니가 그렇게 된 것은 내가 열한 살 되던해 엄마가 아파트에서 투신자살을 했기 때문이다. 이유야 아빠와 맞지 않기도 하고 뭐 이것저것 복잡한 일들이 있었지만 나는 관심없다. 단지 내가 불쾌한 것은 내 하나 남은 혈육을 저런 바보로 만들어 놓은 것과 내 열한 살 나이를 난지도 같은 고약한 곳으로 몰아놓은 것이다. 그후로, 언니는 모든 사람들을 믿지 못하고 겁내했다. 하긴 자신을 낳아준 엄마도 자신을 버린 판에 누굴 믿겠는가. 이제 언니가 할 줄 아는 거라고는 집안일과 자신의 문화생활인 라디오 방송듣기 뿐이다. 따지고 보면 언니는 엄마의 생활을 그대로 물려받은 셈이다. 이런 걸 유전이라고 하는 걸까  어쨌든 간에 엉ㄴ니와 쌍둥이인 나에게 이런 성격이 유전되지 않은 것을 감사한다. 엄마가 세상을 등지고 떠난 날은 우리의 생일이었다. 언니와 내 친구들이 집으로 초대되어 왔고 여느 아이들처럼 즐거운 생일잔치를 벌였다. 엄마는 알뜰한 주부답게 꼼꼼히 생일상을 차려놓고 아이들이 놀다 떠나는 걸 배웅까지 해주셨다. 그것뿐인가. 엄마는 평소 때처럼 우리를 깨끗이 씻긴 후 텔레비전을 틀어주시고 청소를 하셨다. 그리고는 뛰어내리신 것이다. 청소를 마친 주부가 장이라도 보러가는 것처럼 그렇게 말이다. “ 토란국 더 끓여줄까 ” 언니의 목소리에 나는 정신을 차렸다. 생각에 잠겨서도 밥은 먹고 있었는지 토란국과 밥이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릇을 설거지통에 담가 놓고는 방으로 들어왔다. 언니는 엄마가 돌아가신 후로 어린아이처럼 입에 손가락을 넣고 빨기 시작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한쪽엄지손가락이 약간씩 짧았는데 언니는 오른손이 나는 왼손이 그랬다. 어릴 때는 모두들 쌍둥이라 그런 것까지 닮았냐며 웃어댔다. 하지만 정작 우스운 것은 언니가 오른쪽 손가락을 빨면 빨수록 내 왼쪽 엄지손가락이 뻐근한 아픔을 느꼈다. 정확히 말하자면 젖먹이가 엄마 젖을 빨아댈 때 엄마들이 느끼는 가슴앓이처럼 내 손가락에도 그런 것이 느껴졌다. 그럴때면 나는 본능적으로 내 왼쪽 엄지 손가락을 꼭 감싸쥐었다. 마치 언니의 혀에서 내 손가락을 보호라도 하듯이 말이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날씨는 뭐라도 뱉어낼 것처럼 잔뜩 흐려있었고 언니는 화장 솜에 물을 묻혀서 선인장 가시를 닦아주고 있었다. 선인장은 아기 머리통 만한 크기에 녹색의 표피를 가지고 있었다. 가시는 손가락 두마디는 족히 됐고 진한 노란색을 띠었다. 언니는 그것을 하나씩 잡고는 어린아이 목욕시키듯이 하고 있는 것이다. “날씨도 심란한데 뭐하는 거야 ” “선인장도 몸이 끈적거릴 것 같아서. 사막식물이란 습기랑은 친하지 않잖아. 깨끗이 닦아서 해 뜨면 베란다에 내 놓을 거야.” 언니는 평소답지 않게 신이 나서 말하고는 주방으로 들어와 며칠전 사다놓은 과자를 먹기 시작햇다. 정말 어린아이처럼 한 봉지 뜯어 맛을 본 후에 그것에 흥미를 잃으면 다른 봉지를 뜯어 맛을 보았다. 그렇게 조금 지나자 식탁 위에는 과자판이 벌어졌다. “하나를 다 먹던지. 이게 뭐야. 지저분하게. 언니가 애야  그렇게 뜯어 놓으면 눅눅해진단 말야.” 내가 짜증스럽게 따져묻자 언니는 주섬주섬 과자를 비닐팩에 담기 시작했다. “제발 그렇게 주눅들어 하지좀 마. 그 모습이 나를 얼마나 숨막히게 하는지 알아  언니만 보면 사방이 벽으로 막힌 곳에 갇힌 기분이야. 숨막혀.” 나는 드디어 터뜨리고 말았다. 11년간 참아왔던 말이었다. 하지만 언니는 묵묵히 과자만 담을 뿐이었다. 어떻게보면 나를 무시한다는 생각이 들정 도로 언니는 대답이 없었다. “말좀 해봐, 사람이 말을 했으면 대꾸가 있엉 할 것 아냐.” 내가 다시 한 번 소리 지르자 언니는 그 까맣고 깊은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 눈은 정말이지 엄마의 눈과 흡사했다. “내일 우리 생일이야. 지금 장보러 갈건데 같이 갈래 ” 언니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 것일까  나는 짜증을 참느라 머리를 양손으로 감싸고 방으로 들어갔다. 침대에 누워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당기자 투두둑 거리는 빗소리가 정신을 몽롱하게 만들었다. 나는 꿈을 꾼다. 엄마와 언니가 선인장을 안은 채 나와, 나를 어딘가에 가둬 버렸다. 벗어날 수 없는 어두운 곳. 엄마는 꿈속에서조차 나를 버렸다. 하루사이 비는 말끔이 개었다. 한참동안 비가 온터라 공기까지 깨끗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언니는 베란다에서 햇빛을 받으며 음식재료를 다듬고 있었다. “식구도 둘 뿐인데, 생일상은 무슨…….” 음식을 차려놓아도 먹을 사람이 없다는 걸 언니는 알고 있다. 그런데도 웃음까지 머금으며 아이들 소꿉장난하듯 요리를 하는 것이다. “빨리 올거지  네가 좋아하는 새우튀김도 할거야.” 언니는 내가 학교 가는 걸 배웅하면서도 연신 웃음을 지었다. “늦을지도 몰라. 그리고 베란다 창좀 열어놔 환기좀 되게.” 언니는 내가 엘리베이터에 오르는 것을 보고서야 안으로 들어갔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엘리베이터를 타면 갑갑하고 막막한게 언니와 함께 있는 기분이 들었다. 강의가 끝나고도 나는 집에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고 캠퍼스를 돌아다녔다. 궁상맞게 앉아 나를 기다릴 언니를 생각하니 더더욱 들어가기가 싫었다. 이곳저곳을 배회하다가 집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을 때였다. 내 엄지 손가락이 깊숙이 아주 깊숙이 무언가에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굉장한 통증이었다. 나는 늘 그랬던 것처럼 손가락을 꾹꾹 눌러가며 집으로 향했다. 하지만 통증은 좀처럼 가시지 않는다. 아파트에 도착해서 13층까지 올라가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는다. 하지만 왜 그렇게 불안하고 길게 느껴지는 걸까  이 엘리베이터 속에 영원히 갇혀버릴 것처럼 말이다. 나는 벽을 더듬어 전등을 켰다. 거실에는 생일상이 차려진 채였고 나는 갑자기 시간이 거꾸로 흐른 듯한 느낌이었다. 이 분위기는, 이 공간의 흐름은 11년전 그날과 너무 같았다. 베란다 문도 열린 채였다. 문을 닫으려고 베란다 쪽으로 걸어가는데, 그곳에는 언니가 엄지손가락을 꼭 문 채 웅크리고 있었다. “언니 고개좀 들어봐. 내가 항상 말했잖아. 손가락 좀 물고 있지 말라고.” 나는 내 엄지손가락을 주무르며 조심스럽게 언니를 일으키려다가 손을 놓고 말았다. 언니의 얼굴은 찢기고 부분부분은 무언가에 타격을 받은 듯 짓눌려져 있었다. “언니, 얼굴이…… 얼굴이…….” 나는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언니의 얼굴도 얼굴이지만 품에는 그 굵고 투박한 가시의 선인장이 본래의 모습을 잃은 채 안겨 있었다. 화분도 없었고 선인장의 윗부분만 언니의 품에 가시를 박으며 안겨 있었다. 이미 언니의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언니는 멍하니 고개를 들어 입을 열기 시작했다. “ 과일을 사러 나갔는데…… 나갔다가 드러오는데 말이야 베란다 난간에 엄마가 서 있다가 뛰어내렸어. 그래서 받으려고 뛰어갔어. 잘했지  난 이렇게 엄마를 받아냈어.” 언니는 거실 바닥에 해가 들때까지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나중에는 앰뷸런스를 불러 병원으로 보냈지만 언니는 병원에 도착하는 내내 허공에다 헛손질을 해댔다. 무언가를 받아내기라도 하듯이. 병원에 도착해서 언니는 여러 가지 검사를 받았다. 하지만 하나같이 결과가 좋지 않아 장기간 입원하라는 의사의 지시가 내려왔을 뿐이었다. 언니는 오랜 정신질환과 얼굴에 큰 상처까지 입어 여러 가지 문제가 겹쳐진 상태였다. 나는 안정제를 맞고 잠들어 있는 언니를 한참이나 들여다 보았다. 얼굴의 상처는 언니의 마음 속 상처만큼이나 큰 흉터로 남을 것이다. 나는 언니의 소지품과 속옷을 챙길 겸 아파트로 들어가는데 화분 장사가 트럭에 식물을 가득 싣고 와 팔고 있었다. 나는 언니가 정신이 들면 선인장을 찾을 것 같아 저번 것 보다 작고 붉은, 꽃가지 피어있는 예쁜 것으로 하나 샀다. 엘리베이터에 들어서려하는데 경비 아저씨가 나를 빤히 쳐다 본더니 말을 건넸다. “아가씨, 쌍둥이였어  난 까맣게 몰랐네 그려. 어제, 해가 좋다보니 선인장을 베란다 난간에 놓았었나봐. 그런데 그게 떨어지더라구. 주변에 있는 사람은 모두 피했는데 멀리 있던 그 아가씨는 이상하게도 들고 있던 과일까지 팽개친 채 뛰어오더니 글쎄 그 선인장을 받으려 하지 뭐야.” 나는 저번 비오는 날 언니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해가 뜨면 내놓겠다고 선인장을 깨끗이 닦았던 그 상황이 이렇게 연관되자 선인장을 들고 있는 손이 후들거림을 느꼈다. 거실에는 어제의 생일상이 그대로 차려져 있었다. 나는 선인장을 내려놓고 언니의 소지품을 챙기기 시작했다. 언니의 속옷과 책 몇 권을 챙기다가 언니의 일기장이 눈에 들어왔다. - 나에게는 비밀이 있다. 나만의 비밀. 11년 전 엄마가 뛰어내리던 날부터 엄마는 선인장 속으로 들어와 종일토록 내 이야기를 들어준다. 엄마는 속은 여리지만 겉은 가시로 무장한 선인장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다. 언제간 나도 선인장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엄마가 선인장 속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정말 언니는 그렇게 생각하는 걸까 > 언니가 미쳤던가 아니면 내가 미쳐가고 있는 중일 것이다. 나는 거실로 나가 베란다 앞에 웅크리고 앉는다. 해가지고 서늘한 바람이 앞에 웅크리고 앉는다. 해가지고 서늘한 바람이 앞에 웅크리고 앉는다. 해가 지고 서늘한 바람이 얇은 블라우스를 파고들었지만 나는 개의치 않는다. 오히려 머리가 맑아지고 낮까지 욱신거렸던 엄지손가락이 아프지 않은 게 기분이 좋았다. 엄지손가락이 아프지 않다는 건 내가 언니에게서 해방되었다는 걸까  아니면 나도 언니처럼 되어 가는 것일까. 나는 내 앞에 있는 선인장을 내려다 보았다. 무엇에게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저리도 굵은 가시를 둘렀을까. 오랜 세월 살아오면서 자기 보호 방법을 터득한 것일까  그렇다면 난 왜 시간이 흘러도 터득은커녕 점점 더 벗어날 수 없는 곳으로 갇히게 되는 건가. 베란다 창에 달빛이 비춰지기 시작했다. 나는 선인장에서 눈을 거두고 달빛을 보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사방이 막힌 어두운 곳에서 한줄기 빛을 잡는 것처럼. 하지만 내 눈 속으로 파고 든 것은 달빛이 아니라 베란다 창에 비춰지는 낯익은 모습이었다. 선인장 앞에 웅크리고 앉아 하루종일 엄지손가락을 빨고 있는 주눅 든 아이 하나! 그것은 벗어날 수 없는 벽에 갇혀버린 또다른 나였다. <수필부 장원> 장애인 임여빈(석관고) 내가 하기 싫어하는 일 중에 하나는 거울을 들여다 보는 것이다. 거울을 들여다 본다. 그 중에서 내 마음에 안드는 곳을 찾아낸다. 비스듬히 서서 양옆으로 눈알을 굴린다. 왼쪽 눈동자가 거울을 쳐다보지 않은 채 천장으로 향해 있다. 오른쪽 눈을 가린다. 그제서야 제자리를 찾는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매일 아침 거울을 볼 때 마다 난 다시금 내가 사시라는 사실을 이런 식으로 인식하게 된다. 어렸을 때부터 난 ‘사팔뜨기’라는 별명을 달고 살았다. 그것 때문에 내 자신에 대해 언제나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 어머니가, “눈이 아예 보이지 않는 사람도 있다더라. 너는 얼마나 행복하냐 ” 하시며 위로하려 하시지만 그 말을 듣고 나면 왠지 모르게 더 서러워 지곤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내 모습을 받아들이고 있었고 어머니의 그 말을 어느틈엔가 수긍하고 있었다. 시작ㄱ장애인의 고통이 나에게만은 위로가 되는 사실이 나를 죄책감에 빠져들게 했다. 하지만 이것은 내가 글을 끄적일 때나 거울 속의 나를 보며 위로할 때나 느껴지는 감정이었다. 학교갈 차비를 하면서 큰 창문 앞을 서성거린다. 나의 가장 친한 소꼽친구에 집을 내려다 본다. 혹시 나오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찰캉. 대문소리가 난다. 문을 열고 누군가가 나온다. 한쪽 발이 보인다. 검은 구두를 신었다. 이쯤되면 나는 실망을 한다. 친구의 아버지인 것이다. 그냥 얼굴을 돌리고 싶다. 하지만 쉽게 돌아가지 않는다. 손이 나오고 몸과 얼굴이 등장한다. 가방을 든 채, 한쪽 발을 떼인다. 다른 발을 옮기는 동안 몸이 균형을 잃고 뒤뚱거린다. 가방을 들지 않은 팔이 덜렁거린다. 아저씨는 소아마비다. 그게어떤 병인지 난 자세히 알지 못한다. 그 문을 나오시는 아저씨를 보면서 나는 잠시나마 침묵을 지키면서 그 만성이 된 고통을 헤아려 보는 것이다. 그러면서 내 자신에게 나와 아저씨의 모습을 비교하도록 고문을 하는 것이다. 거울을 보면서 자신에 대해 푸념만하는 나와 다리를 절면서도 당당하게 걸어가는 아저씨를…… 비교될 만한 장애가 아니라는 걸  잘 알기에 창문을 내려다 보며 아저씨가 출근하시는 모습을 보면 내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동정심 때문에 슬퍼진다. 그러나 친구네 집에 가서 아저씨를 볼 때나 길에서 인사를 하면 항상 웃으시며, “오냐” 하고 응수해 주시는 것을 볼 때 나는 아저씨에게 장애라는 단어를 떠올릴 수는 없었다. 이렇게 창문으로 아저씨를 보고 나서 학교에 가면 괜히 우울한 척을 하곤했다. 그러면서 혼자 이 세상에는 참 많은 사람이 살고 있고 저마다 고통을 가지고 있는 거란 말을 되뇌었다. 그러나 이런 나의 생각에는 언제나 한계가 있다. 그걸 알기에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언젠가 아이들의 놀림을 받고 와서 “엄마는 날 절대로 이해 못해!” 하며 울음섞인 소리를 내뱉었다. 지금 생각하니 나도 마찬가지다. 나 이외에 다른 사람의 고통에 대해 관심을 기울인다고 해도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문제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나자신이 나를 인정하지 못했을 때 나는 장애인이엇다. 나만의 세계를 만들어 놓고 이 세상을 원망했고 나 혼자만 불행한 듯 행동했었다. 어떤 위로의 소리도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차츰 나를 받아들이게 되었고 마음이 편해진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나 아닌 다른 사람에 대해 생각해 보는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