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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제46회 수상작

등록일 2015-06-26 작성자 학과관리자 조회 1998

<시부-장원> 빛의 종점 고양예술고등학교 3학년 노기민 언제부턴가 어머니의 무릎 관절에서 전구 스위치 켜는 소리 들려온다 무릎 굽힐 때마다 딸깍거리는 마찰음, 발광된 듯 붉게 멍이 든 다리에서 걸음이 흔들리고 있다 퇴근 길, 일산 행 버스에서 제 닳아가는 필라멘트 들여다보는 어머니, 평생 자식만 비추던 걸음의 명도 점점 낮아져 간다 아파트 단지 앞 폐 전구 수거함에는 다 닳아버린 전구들이 널브러져 있다 너무 많은 걸음이 멈춰져 있다 딸깍- 걸음을 켜는 소리 깨어진 필라멘트를 비추는 달빛에 미소가 아른거린다 <시부-차상> 종점 홍익대부속여자고등학교 3학년 송민정 황량한 원고지의 사막 속에서 붉은 벽돌들은 전동칸 처럼 꼬리를 잇고 있다 회전컵처럼 머리 속을 맴돌던 싯구를 꺼내어 전동칸 한칸에 탑승시켰다 회전컵은 곧 멈춰서고, 다음역을 향할 싯구는 떠오르지 않았다 행을 가르고 전동칸은 쉼표 하나를 찍어 간이역에 정차했다 전동칸을 지나치느라 잉크가 번진 내 손등에도 ?버튼 같은 철로가 박혀 있다 종점까지 얼마 남지 않았어 전동칸 하나가 계란껍질을 까며 말했다 다시 ?버튼이 묻어난 볼펜을 움켜쥐고 전동칸 하나를 더 탑승시켰다 때때로 전동칸 안을 비집고 나온 글자의 파편에는 수정 테이프를 붕대처럼 감아 주었다 싯구가 들어 찰 때마다 붉은 벽돌들은 비석처럼 견고해져 원고지 위로 담벼락을 쌓아 올렸다 지난 달, 어느 작가는 원고지에 종점을 찍고는 ‘토지’ 속으로 되돌아 갔다지 기름칠을 하던 전동칸 하나가 속삭엿다 원고지를 되돌아 봐 내가 걸오온 지네발같던 철로를 내려다 본다 언젠가는 나도 납골함같은 원고지속에 당기길 기다리며 천천히 종점에 다다른 원고지 속에 반점처럼 마침표 하나를 찍는다 <시부-차하> 내마음의 종점 충남여자고등학교 2학년 유보리 해 떨어지는 어둑어둑한 저녁녘에 남 몰래 숨어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는다 지금은 비록 내 마음의 밭에 사과나무를 심지만 언젠가 내가 더 빨리 자라 만약 마당이 넓은 소박한 집 한 채 갖게된다면 마음밭의 사과나무 수척한 얼굴로 푸석푸석한 열매 맺기 전 마당에 옮겨 심으리라 수도꼭지에 긴 호스를 연결하고 사과나무를 향하여 듬뿍듬뿍 물을 뿌려 주리라 그러면 사과나무는 이파리 이내 촉촉이 젖어들고 윤기넘치는 행복한 표정으로 속삭이겠지 지금 막 눈물이 나오려 해! 사과나무를 심고 돌아서는 쓸쓸한 하교길 입술이 마르고 목이 탄다 언제부터인가 눈물도 말라버렸다 시내버스 차창 밖으로 비치는 내 모습이 조금전에 내가 심은 사과나무 그 ?P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사과 같아서 공연히 눈물이 난다 <시부-차하> 종점 양명고등학교 3학년 황형선 1. 산소로 가는 길, 모퉁이에 리어카 한 대가 있다 나는 어린 아이처럼 그 위에 잠시 올라타본다 낡은 열차를 타고 유년으로 덜컹덜컹… 2. 햇살이 레일처럼 거리에 길게 깔리면 할미는 리어카에 시동을 걸었다 나는 첫 승객으로 올라탔다 낡은 열차는 언덕을 오르며 승객들을 태워갔다 골목 전봇대 앞에서 어딘가로 자꾸만 울음을 수신하던 고양이를 무임으로 승차시켜 주었다 고양이가 야옹거리면 나도 따라 흥얼 거렸고 열차도 리듬에 맞춰 느릿느릿, 간간히 역에 멈추면 할미의 기침이 연기처럼 날렸다 구멍가게 역 앞에 웅크리고 있던 상자도 어기적어기적 탑승했다 더는 무엇도 담을 수 없는 해진 상자를 나는 가만히 쓰다듬기도 했다 날이 저물어 갈수록 할미의 둥글게 굽은 등이 바퀴처럼 동네를 굽이굽이 돌았다 검게 얼룩진 폐지들은 힘없는 날갯짓을 하며 날아와 열차에 둥지를 틀었다 마침내 동네를 다 돌고 종점인 집에 왔을 때, 할미는 구멍뚫린 바퀴마냥 숨을 쌕쌕거리며 방 안으로 굴러갔다 집 앞 열차엔 가난하고 버려진 삶들이 모두 모여 저들끼리 포개고 누워 잠을 잤다 방안에선 모기향의 불빛이 그 둥근 레일을 따라 타들어가며 내려갔다 그 밑에 까만 재들이 할미의 기침처럼 쌓여갔다 집 앞에서 고양이가 야옹야옹 울어대던 밤이었다 3. 어느덧 유년의 여행을 마친 나는 리어카에서 내려 비척비척 산소로 올라왔다 할미의무덤이 굽은 등처럼 땅 위에 볼록 튀어나와 있다 긴 여행을 마치고 종점에 잠들어 있는 둥근 바퀴를 쓰다듬어본다 <수필-장원> 종점 무학여자고등학교 3학년 한영은 수증기처럼, 콧잔등 위로 몽글몽글 비어져 흐르는 땀줄기들을 닦아내며 나는 은회색의 철제 문고리를 집어든다. 동사무소 안은 시원했다. 싸한 냉기가 훅 하고 등허리를 훑자 몸 위를 기어오르던 개미떼처럼 땀줄기들이 금새 식어버린 느낌이었다. “주민등록증 발급 받으러 왔는데요.” 나의 말에, 서류를 뒤적이던 문 앞의 여자가 잠시 고개를 돌려 은회색의 캐비닛을 열었다. 몇장의 플라스틱 카드 사이로 엉성히 지문이 찍힌 카드 하나가 보이고 여자는 내게 그것을 건네준다. 받아들곤 문 밖을 나선다. 플라스틱 카드 위로는 내 열아홉 해의 표면만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사진 속, 깡충한 단발에 입을 앙다문채 나를 바라보고 있는 내가 어쩐지 익숙치 않게 느껴져 나는 고개를 가로젖는다. ‘주민등록증.’ 생경하게만 느껴지던 것이 어느새 손 끝에 들어와 버렸다. 반년 후면 이제 곧 어른이 되어야 하는 내 열아홉 해의 무게는 이토록 가벼웠었나  플라스틱 카드를 서둘러 주머니 속으로 집어넣는다. 가슴 한켠에 체증처럼 무언가 얹혀든 탓에 몸이 무겁다. 듬성듬성 칠이 벗겨진 청남색 철제 현관문을 나서며, 나는 짐가방을 확인했다. 내 방문을 나설 때, 서랍 위를 그득채운 참고서와 교과서들을 밀어두고 단 한권을, 기형도의 ‘입 속의 검은 잎’만을 집어들었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쓴다고 하였던, 그리하여 일생에 단 한권의 시집만을 남겨둔, 요절한 시인과 함께 나는 지금 여행길에 오른다. 엄마는 윤영이와 놀지 말라고 했다. “척 보기에도 근본이 없는 아이야. 질나쁜 아이와 같이 다니지 마라. 부모없는 애가 뭘 배우고 자라겠니.” 물론 겉으로 비추어지는 한 그 애는 어딘지 삐딱해 보이기는 했다. 교복과는 어울리지도 않게 노랗게 물들인 머리와 무표정한 얼굴. 또래보다 큰 몸집까지. 그러나 나는 알고있다. 사람들이 말하는 그 모습이 그 애의 전부가 아니라는 걸. 고1 자습시간, 2학기가 되어 처음 짝을 바꾸던 날. 나는 그 애가 내 짝꿍이 되었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애는 언제나 수업시간에 늦기 일쑤였고, 교실에 들어온 후엔 책상위로 머리를 포갠 채 잠을 자곤 했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 몇 달이 지나지 않아 나는 그 애의 책상 위로 올려진 한 권의 책을 발견했다. 푸른색 표지 겉면으로는 굵은 궁서체로 ‘소’라 제목이 적혀 있었고 그 아래 ‘김기택’이라 시인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나는 서랍안에서 서둘러 시집 한권을 꺼내어 펼쳤다. ‘위험한 가계, 1969’ 잠시 사물함 뒤편 교실문틈을 지나오던 우리반 아이 하나가 나를 스쳐가며 설핏 웃음을 지어냈다. “한심해. 저런 책따위나 잡고.” “교과서에서만 얻을 수 있는 배움도 있는거야. 모두 다 사라져도 문학은, 시는 사라지지 않아.” 순간 무표정하게만 보이던 그애의 입에서 한마디가 터져나왔다. 실소를 머금던 반아이는 상기된 표정이 되어 잠시 교실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순간, 그애와 나의 표정이 교차되며 우리는 조금 웃었다. “너도 혹시 꿈이 작가니 ” 윤영이는 일찍 엄마, 아빠를 여의었다고 했다. 나이가 드신 할머니와 함께 산다고, 그리하여 학교가 끝난 후엔 커피숍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던 윤영이는 노랗게 물들인 머리카락을 가리키며 말했다. “미성년자라는게 알려지면 짤려. 할머니는 아파서 이제 더 이상 생선 좌판엔 나가실 수가 없고. 머리를 노랗게 물들인 것은 어른처럼 보이기 위해서야. 나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 그렇게 말하던 윤영이는 그러나 몇일 전부터 학교에 나오지 않는다. 전화도 받지 않고, 집도 알 수 없었기에 연락이 닿지 않는다. S시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타며 나는 들창 밖으로, 누군가 불어놓은 입김처럼 쌓여있는 먼지입자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베이지 색 커튼을 들추어 내고 옆자리에 짐을 놓아둔 채 나는 이것이 곧 반년후면 어른이 될, 10대인 내가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일탈이라 생각했다. 이제 곧 2분후면 열차가 출발한다. 묵직한 갱지면의 습작노트 위로 끊어놓은 표를 올려두고 눈을 감았다. 순간, 주머니 속에서 드르륵, 하는 진동이 느껴졌다. 폴더를 열고 통화버튼을 눌렀다. 순간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나는 믿을 수 없었다. 윤영이었다. “할머니가 쓰러졌어. 나, 무서워. 어떡해야해.” 서둘러 짐을 챙겨들고 버스 문을 나섰다. 버스 밖은 너무도 소란스러워 윤영이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 수술실 앞으로 놓여진 간이의자위로 등을 맞대어 앉아 윤영이는 울고 있었다. 이미 어른이라 생각했던 윤영이의 얼굴은 색조화장을 지우자 여느 아이들과 같이 어려보였다. 윤영이의 등을 토닥이며, 내 어깨 위로 얼굴을 기댄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어딘지, 내가 조금 더 자랄 수 있을듯한 기분이었다. 오늘 낮, 내가 버스에 놓아두고 온 주민등록증이 집으로 배달되어졌다. 홀로 그것은 역의 종점을 지나 다시 이곳으로, 내 손으로 들어온 것일 것이다. 문득, 그것은 조금 더 무거워진 것만 같았다. 가슴 안에서 이제 막 지나쳐온 기적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이제 다시, 출발이다. <수필부-차상> 종점 광성고등학교 3학년 김민제 여름이라 하기에는 아직 덜 익은 해의 그림자가 우리 집 거실에 그림자를 던져 놓았다. 민제야. 거실에서부터 들려오는 할머니의 목소리에 나는 하던 숙제를 멈추고 거실로 향했다. 할머니는 거실 이곳저곳을 다니며 뭔가를 애타게 찾고 있었다. “할머니 뭐 찾고 있어 ” “이상하네, 분명 여기다 넣어 두었는데 이 놈이 발이 달렸나 없어져 버렸다. 좀 찾아 봐 라.” 나는 할머니가 애타게 찾고 있는 것이 시침통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시침통을 찾았다. 그러던 중 텔레비전 위에 놓여 있는 시침통을 발견했다. 조그마한 통 안에는 작은 침부터 시작해서 내가 무릎을 다쳤을 때 꽂혀 있던 왕침까지 들어 있었다. 할머니는 30년 전부터 동네 사람들에게 무료로 침을 놓아주고 있었다. 병원 갈 돈이 없어 쩔쩔메는 사람들에게 할머니는 천사나 다름이 없었다. “할머니는 여기다 놔 두고선.” “거기 있었냐  어유. 나도 나이가 먹으니 정신이 없어.” 시들시들한 할머니의 목소리가 거실안으로 퍼져 나갔다. 오늘따라 할머니의 윗입술이 더 찢어져 있었다. 그렇게 오래도록 사람들의 병을 치료해 주었지만 정작 본인의 입술은 고치지 못했다. “오늘도 사람들 침 놔 주러 가  그러다가 잘못 놔 주면 큰일이잖아.” “걱정 마. 이래봐도 침과 함께 한 인생이 30년이야.” 할머니가 침과 함께 한 인생이 30년은 맞지만 정식 허가증도 없는, 그러니까 돌팔이었다. 그렇지만 할머니는 늘 당당했다. 할머니는 시침통을 한 손에 끼고 현관문을 천천히 나섰다. 오늘따라 할머니가 많이 늦는다. 보통 저 노을이 산등성이에 떨어질 듯 말 듯 걸려 있을 때 ‘할미 왔다’라고 말하며 들어오는데. 오늘은 할머니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들이 많나  아니면…….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나는 천천히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그래 민제냐  일났다. 니 할매가 지금 거리 한 복판에서 현규 아줌마랑 대판 싸우고 있다. 퍼뜩 온나. 요 앞집에 사는 대덕이 아저씨의 걸걸한 목소리였다. 나는 알았다고 한 뒤 전화를 끊었다. 나는 부랴부랴 옷을 입었다. 자꾸만 불길한 예감이 내 마음 한쪽 구석에서 싹 트기 시작했다.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거실에 심어 놓은 라벤더의 잎사귀가 힘없이 떨어졌다. 20분 정도 걸었을까  앞에서 시끌시끌한 소리들이 연기처럼 피어 올랐다. 나는 사람들 속을 헤집고 들어갔다. 그러자 씩씩거리는 현규 아줌마와 눈을 부릅 뜬 할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이봐, 당신 때문에 우리 엄마 입이 더 돌아갔어. 어떻게 책임 질 거야  분명 일주일 뒤엔 원래대로 돌아 온다며! 우리 엄마 입 돌려내!” 아줌마는 있는 힘을 다해 소리를 질렀다. 입술을 돌려 내라고  그럼 그 할머니도 우리 할머니와 똑같이 언청이가 된 걸까 “니는 위아래도 없나  이게 무슨 행패고  그리고 내가 침 놓아준 사람들은 다 괜찮았다. 니 애미가 이상한기라.” 할머니의 입에서 고여있던 침이 조금씩 흘러내렸다. “오, 그래  내가 이런 말까지는 안하려고 했는데 당신 대학도 안 나온 돌팔이라며 ” 순간 사람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 말을 들은 할머니는 경직된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할머니의 윗입술이 파르르 떨기 시작했다. 아줌마는 당황한 할머니를 향해 침을 튀기며 막말을 계속 해댔다. 그러자 더 이상 못 참겠는지 할머니가 울먹거리며 말하기 시작했다. “그…그래. 내 돌팔이다. 대학도 못 나왔고 누구한테 정식으로 배운 적도 없다. 다만 어렸 을 때 우리 아버지에게 배운 침술이 다이다. 니는 내가 왜 침을 놓는지 아나  사람들이 또 나같이 될까 무서워서 그런기다. 그래서 놔 준 것 뿐이다. 됐나 ” 할머니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람들 속을 헤집고 집을 향해 걸었다. 다시는 침 같은 거 놓지 마라! 이 돌팔이야! 아줌마는 할머니가 가는 동안에도 욕을 한 바가지 뿌렸다. 나는 두 손을 조물락거리며 할머니의 그림자를 밟았다. “니도 내가 돌팔이라고 생각하나 ” “아니. 30년 동안 한 번 밖에 실수 안 했으면 무지 잘 한 거지.” 할머니에게 용기를 주고 ?었다. 이만한 일로 상처받지 말라고. 숙제를 하다보니 벌써 새벽 한 시가 넘어 버렸다. 나는 옆에 쌓아 두었던 쓰레기를 집고 거실로 향했다. 그리고 쓰레기통을 열었다. 그 속엔 시침통이 뒹굴고 있었다. 순간 나는 충격에 휩싸였다. 시침통이 버려져서가 아니라 할머니의 30년 인생이 버려졌기 때문이다. 검은 머리가 찰랑거릴 때 시작했던 할머니의 침 인생이 흰 머리카락으로 변해서야 종점에 다다랐다. 안방에선 할머니의 코 고는 소리가 종점을 알리는 기차소리같이 들려왔다. <수필부-차하> 종점 고양예술고등학교 3학년 정현용 “퍼뜩 나온나! 학교 늦?L다.” 서둘러야 할 나는 느긋한데, 아빠만 바쁘다. 학생주임 선생님이 귀를 잡아당기기까지 이십 분도 채 남지 않았지만 나는 아직도 여유롭다. 우리는 아침마다 같은 버스를 탄다. 저멀리 육십일 번 버스가 오고 있는게 보인다. 오늘 아침도 어김없이 그리움이 다가온다. 엄마가 그리워진다. 아빠의 시선은 버스를 애써 외면하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버스에 올라 타게 될 것을……. “아빠, 자지 마리. 알았제  또 종점까지 가뿌면 우짜노.” 아빠 회사보다 내 학교가 집에서 더 가까운 곳에 있어서 내가 먼저 내린다. 좋다가 또 종점까지 갈 아빠 생각에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아빠는 또 그리움에 취해 잠들 것만 같다. 집안일 하랴 밖에서 돈 벌어 오랴, 몸이 열 개 라도 부족한 아빠에게 잠을 자는 일이란, 천국에 가는 것보다 어렵다. 그래서 버스를 타고 있는 시간만큼이나 단잠에 빠지고 싶어한다. 아빠는 그리움에 취한 상태여서 그 옛날, 버스 안내양을 찾고 있는 지도 모른다. 부모님은 내가 중학교 2학년일 때 헤어졌다. 요즘은 다들 밥 먹듯이 한다는 이혼을 했다. 협의이혼이라는 걸 했는데, 그때도 우리 엄마아빠 같은 사람들이 수두룩했다. 나는 그때 난생 처음으로 법원이라는 곳을 가봤는데, 나를 놀라게 한 건 그게 아니었다. 단 몇 분만에 도장 하나와 싸인 하나로 엄마 아[바른말 고운말을 사용합시다.] 남이 되어버린 거였다. 왜 이곳에 왔는지, 왜 갈라서는지는 하나도 몰랐다. 하지만 십 년을 넘게 살을 맞대어 온 엄마아[바른말 고운말을 사용합시다.] 단 몇 분만에 남이 되어버리는 게 어이가 없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았다. 엄마는 아빠랑 같이 오라며 먼저 가버렸다. 이미 눈물을 머금고 있었다. 내가 ‘엄마!’하고 부르면 금방이라도 터져나올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알겠다고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는 점점 멀어져가는 엄마의 뒷모습을 눈동자에 담았다. 아빠와 함께 버스정류장으로 갔다. 오십구 다시 일 번 버스를 탔다. 나는 엄마가 처녀였을 적에 버스 안내양을 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느그 엄마 옛날에 그거 할 때 얼마나 이뻤는 줄 아나 ” “그기 뭐가 이쁘노  목소리도 남자같이 굵고 커야되고, 힘도 쎄야 되는거 아이가 ” “그래 그기 맞는데, 이 아빠 눈에는 그기 을마나 이뻤는지 모린다. 사람들 다 타면 오라이 하는데 그때 내가 마 한 방에 늠으간 거 아이가.” 아빠는 버스 뒷문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혹시나 그 옛날, 아리따운 버스 안내양이 있나 하고. 하지만 지금 그런 사람은 없다. 아빠의 추억 속 버스 안내양이 사라졌듯, 엄마도 사라졌다. 그때 그 버스 안내양이 아빠의 부인이 되었지만, 다시 남이 되어버린 것이다. 아빠는 오늘도 종점까지 가고 말았다. 내가 분명히 자지 말라고 했는데 또 잠들어버린 거였다. 아빠는 종점에 내려서 나에게 전화를 했다. “또 종점까지 와삐?다. 요새 계속 이래 갖고 클났다. 우짜노 이걸. 회사도 늦었고.” “아 진짜 언제까지 그랄 낀데  그라다가 회사 짤리뿌무 우짤라고.”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고 화를 냈지만 정말 미안했다. 아빠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지만, 현실이라는 게 있기 때문에 어찌할 수 없었다. 나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엄마를 만난다. 엄마는 만날 때마다 미안하다는 말만 연신 해댔다. 그리고 다시 헤어질 때는 눈물을 흘렸다. 그때 법원에서는 내가 너무 어려서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때는 차갑게 돌아섰던 거라는 걸 이제는 잘 안다. 엄마도 이제는 내 앞에서 눈물을 보인다. 엄마는 그대로인데 내가 금방 자라버려서 엄마가 작게 보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한가족으로 살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엄마의 슬픈 눈물을 안경 닦는 천으로나마 닦아줄 수 있는 사람은 나 하나뿐이었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왔다. 저녁 무렵이 되어 아빠도 왔다. 아빠는 오자마자 한숨을 쉬며 말했다. “옛날에는 느그 엄마가 깨워줘서 종점까지 갈 일도 ?었는데.” “아빠 사는 데를 우째 알고 깨워줬노 ” “맨날 느그 엄마 있는 버스만 타고 댕겼으니까. 느그 엄마도 내한테 마음 있었을 끼다.” 아빠는 깨워주던 버스 안내양, 엄마를 그리워했다. 지금은 곁에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옛날 그 버스 안내양이 나타나서 깨워주길 바라고 있다. 나는 아빠에게 엄마의 눈치를 일러줬다. 다시 예전처럼 함께하고 싶다는 것을 말이다. 표정은 밝아지지 않아 보였지만, 구부정하던 어깨와 허리가 펴진 것만은 확실히 보였다. 종점이란, 버스 노선에서는 끝이 나버린 것이지만, 아빠와 나, 그리고 엄마에게만큼은 얼마든지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것이다. 종점까지 가서 끝이 나버렸으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면 되는 거다. 그리움은 종점에서 끝났다. 이제 아빠는 엄마를 데리고, 같이 버스를 타고 돌아오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얼마의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할 것 이다. 그래서 아빠는 아직도 종종 종점에 갔다 온다. 아빠는 매일같이 그리움을 타고 내린다. 오늘도 아빠는 종점까지 가고 말았다. 언젠가는 엄마가 기다리고 있을 종점에……. <수필부-차하> 종점 안양예술고등학교 3학년 최현지 깜빡 졸았던 모양이다. 눈을 떠 주위를 때는 이미 내가 내려야 할 곳을 지나 있었다. 전철 안에 있던 몇 안되는 사람들이 짐을 챙겼다 천장에 달린 스피커에서 종점이니 잊으신 물건 없이 안녕히 가시라는 방송이 흘러 나왔다. 나는 가방을 짊어지고 전철에서 내렸다. 사람들은 모두 출구를 향해 걸어갔다. 나는 반대편으로 가는 전철을 기다리기 위해 의자에 앉았다. 핸드폰으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다섯 번 울린 후에야 엄마가 전화를 받았다. “어, 엄마. 나 잘 못 내렸어. 여기 종점역이야. 금방 갈게.” 엄마는 목을 여러 번 가다듬었다. 알았어, 라는 말에는 물기가 베어 있었다. 아직도 우는 모양이었다. 우리 엄마는. 엄마는 옷을 갈아 입는 내내 눈 한 번 감았다 뜨지 않았다. 나는 가만히 거울에 비치는 엄마 얼굴을 드려다 보았다. 엄마는 입술에 립스틱을 발랐다. 그러다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나도 엄마를 따라 울었다. 삼촌은 잘 생겼다. 누나인 우리 엄마보다 피부가 하?고, 키도 컸다. 삼촌은 선생님이 되기 위해 공부를 하던 스물 여덟살 총각이었다. 엄마는 외할머니 댁에 가면 제일 먼저 삼촌을 찾았다. 그리고 결혼은 언제 할 거냐고 잔소리를 했다. 그럴 때마다 삼촌은 갈 때 되면, 가겠지, 하고 웃었다. 열심히 말을 늘어놓던 엄마만 한숨을 쉬었다. 나도 얼른 삼촌이 결혼하길 바랐다. 내가 숙모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어서 생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약간 코맹맹이 소리가 나는 그 호칭을 불러보고 싶었다. 삼촌은 선생님이 되고,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기면 결혼 하겠다고 했다. 후에 엄마는 내게 그 말을 들려주면서 아마 외로워서 아팠던 것 같아, 하고 말했다. 삼촌은 어느 순간부터 다리를 절었다. 찾아 간 병원에서는 별 일 아니라고 약을 처방해 주었다. 우리는 의사가 한 말을 믿었다. 삼촌이 방석 세 개를 겹쳐 놓지 않으면 자리에 앉지 못 하세 됐을 때도 믿었다. 그러다 삼촌이 목발에 의지해 건데 되자 엄마는 삼촌을 데리고 큰 병원을 찾았다. 별 게 아니었던 것이 어떻게 암이 됐는지는 잘 모르겠다. 엄마가 의사 선생님 말을 듣고 주저 않아 있을 때도, 목발을 짚으며 검사실을 나온 삼촌이 왜 아픈거래  물었을 때도 삼촌의 젊음이 온 몸으로 암세포를 퍼뜨리고 있었다는 사실만 알았다. 엄마는 삼촌에게 별 거 아니라고 말했다. 삼촌 입원을 하게 됐을 때도 금방 나을테니 걱정말라고 했다. 진통제를 맞고 천장에 현지가 앉아있다는 말을 할 때도 엄마는 눈물을 삼키고 말했다. 괜찮다고, 괜찮다고. 앵무새처럼 말을 반복했다. 반대편으로 가는 전철이 도착했다, 나는 텅 비어있는 전철 안으로 들어갔다. 에어컨 냉기가 머리 위로 쏟아졌다, 나는 팔걸이가 있는 끝자리에 앉았다. 사람들이 하나 둘씩 자리를 메꿨다. 스피커에서 곧 출발한다고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반대편 창 밖을 바라보았다. 엄마가 말했었다. 만약 삼촌이 아직 살아있던 때로 돌아간다면 삼촌이 왜 아픈거냐고 물었던 그 때로 돌아간다면 진실을 말해주고 싶다고, 죽음을 준비하지 못하고 떠나게 한 거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다고 했다. 전철이 움직였다. 종점에 있을 삼촌에게도 돌아갈 수 있는 열차가 있다면, 도착할 역을 알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잠깐 그런 생각을 했다. <소설부- 장원> 아내는 종점에 있습니다 고양시 세원 고등학교 3학년 이남경 아내의 아침은 늘 분주하다. 나는 오늘도 정겨운 도마소리며 고소한 기름 냄새에 깨어 번쩍, 눈을 뜬다. 5초, 4초, 3초,……. 내가 습관적으로 숫자 다섯을 세는데, 일을 세는 순간 아내가 때맞춰 나를 부른다. “여보, 어른 일어나요. 오늘 지은이 오는 날이잖아.” 나는 침대에서 더 몸을 뒤척거리다 거실로 나온다. 부엌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면, 어김 없이 같은 재료에 같은 음식을 만들고 있는 아내가 보인다. 아이가 좋아하던 홍시빛 스웨터, 아이가 가정시간에 만들어다 준 앞치마, 아이가……. 아내는 비디오 테이프를 재생한 듯 늘 똑같은 모습이다. 나는 오늘도 그런 아내에게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으며 가만히 식탁에 앉는다. “당신은 지은이 오는 게 기쁘지도 않아요  무슨 아[바른말 고운말을 사용합시다.] 그래요  지은이가 알면 섭섭해 하겠네.” “수학여행으로 딱 2박 3일이야 뭘 그렇게 호들갑이야…….” 내 말에 아내가 입을 삐쭉거리며 따뜻하게 데운 국을 가져다준다. ㅏ는 그 국이 무슨 국인지 보지 않고도, 냄새를 맡지 않고도, 알 수 있다. 미역국이다. 나는 내 바로 앞에 놓여 김을 폴폴 피워올리고 있는 미역국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순간적으로 입을 꾹 막는다. 갑작스레 욕지기가 밀려온다. 화장실로 뛰어 들어가, 변기에 머리를 박고 속을 깨끗하게 게워 낸다. 눈물이 찔끔찔끔 나면서, 문득 서러워 진다. 아내는 알까. 하루하루 견디기 힘든 사람은 당신뿐이 아니라는 것을……. 그날을 깨끗하게 지워버리고 싶은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단기 기억상실증. 의사는 아내의 이상증세를 이 간단한 단어 하나로 형용해 버렸다. 그날에 사고가 아내에게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도 않을 만큼 큰 충격이었던 모양이라는 것, 안정을 취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는 것, 남편의 적극적인 도움이 절실하다는 것……. 나는 의사의 당부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이 암울한 상황이 믿기지 않아 한참을 혼란스러워 했다. 매일 똑같은 하루를 반복하며 살아가는 아내를 바라보는 일은 나에게도 곤욕이었다. 그렇게 살아가기를 2년, 이젠 나도 아이를 기다리며 행복해하는 아내의 모습에 점점 적응이 되어간다. 아내가 그날 아이가 타고 있던 버스의 끔찍했던 사고를 영원히 잊어만 준다면……, 이 방법도 그리 나쁘진 않은 것 같았다. 오후 6시, 나는 퇴근 시간이 되자마자 부장의 눈치를 살필 새도 없이 부랴부랴 회사를 나온다. 3년 전부터 회사보다 더 열심히 출근도장을 찍고 있는 그곳으로 가기 위해, 나는 서둘러 마을버스에 몸을 싣는다. 매일 이 산간에 퇴근하시네요  저녁마다 마주치곤 하는 버스기사가 새삼스레 말을 걸어온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다시 창문으로 눈을 붙박는다. 버스가 기어가는 듯 느리다. 마을버스는 한 시간 가량이 지난 뒤에야 종점에 도착한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일까. 종점에 아내가 없다. 이상하네, 지은이를 마중하러 늘 이곳에 오는데…… 2년 동안 늘 그래왔는데……. 순간 마음이 덜컥 내려앉으며 눈앞이 캄캄해 진다. 다리에 힘이 ㅉ구 풀린다. 아내는 대체 어디로 갔을까. 아이의 학교  학원  또 다른 종점  나는 멍해진 채로 아내가 없는 종점에서 오랫동안 서성인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비척거리는 몸을 겨우 이끌며 집으로 돌아오는데, 뜻 밖에도 집에 불이 환하게 켜져 있다. 안방에 앉아있는 아내의 등을 보고는 울컥 화가 치밀어 오른다. 당신 언제부터 여기 있었던 거야! 내가 얼마나 찾아다녔는 줄 알아  나도 모르게 찢어질 듯한 고함을 내지르고 만다. 그런데 이건 또 무슨 일일까. 내 고함에 놀란 듯 고개를 돌리는 아내의 얼굴이 눈물범벅으로 젖어 있다. 문득 모든 것이 정지된 듯 멍해진다. 아내의 손을 내려다보면, 분홍색 보자기에 넣어 장롱 깊숙이 넣어 두었던 딸 아이의 교복이 보인다. 핏자국이 아직 다 지워지지 못하고 얼룩져 있다. 나는 힘없이 제자리에 쓰러지듯 주저앉는다. “이게…… 도대체 뭐에요  밖이 너무 추워서, 우리 지은이 입혀 줄 잠바 좀 찾느라고 장롱을 뒤졌는데 이 요상한 게 들어있었어요. 분명 우리 지은이 교복인데…… 이 얼룩이 다 뭐에요 ” 나는 아무 변명도 떠오르지 않아 어리벙벙해져 있다. 아내가 이런 나를 다그친다. “정말 이상하다고요. 냉장고엔 무슨 명절처럼 부침개들이 가득 차 있고, 우리 지은이 방은 바로 어제 치워놓은 것처럼 깨끗해요.” 아내가 불안한 듯 울음을 터뜨린다. 당신이 말해 봐요. 무슨 일이에요  왜 우리 지은이는 안 오는 거죠  내가 얼빠진 사람처럼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데, 아내의 등 뒤로 작은 시계가 보인다. 11시 58분. 나는 문득 반가워져 온다. 아내 몰래 초를 시작하기 시작한다. 30초, 29초, 28초……. 초침과 분침이 12시에 가까워질수록 내 마음은 편안해 진다. 아내의 종점이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다. 괜찮아, 하고 아내를 다독이며 나는 계속 마음속으로 숫자를 세 본다. 12시가 지나고 나면 아내의 기억은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올 것이고, 우리는 다시금 딸아이를 기다리며 행복해 질 수 있는 것이다. 3초, 2초, 1초…… 땡. “여보, 오늘 우리 지은이 오는 날인 거 알죠 ” 종점에서 이제 막 돌아 나온 아내가, 나를 향해 방긋 미소 짓고 있다. <소설부 - 차상> 종점 대원여자 고등학교 3학년 최 지 선 나무 모형이 자꾸 옆으로 기우뚱 쓰려졌다. 몇 번이고 쓰러지는 모형을 일으켜 다시 꽂는 탓에 모형이 꽂히는 스티로폼의 땅은 곰보처럼 잔뜩 구멍이 나 있었다. 빨래를 개다가, 역 모형을 건들지 않게 손을 뻗어 다시 나무 모형을 세웠다. 기차는 ‘유치원역’ 앞에 오롯이 놓여 있다. 아이가 출발하기 전에 놓아둔 모양이었다. 아이의 역 이름이 새삼 웃겼다. 기차를 만져보았다. 서늘한 플라스틱의 감촉이 손 끝에 와 닿는다. “엄마, 우리 나중에 꼭 이거 타고 놀러가자.” 처음 기파 만들기 모형 세트를 샀을 때 아이가 한 말이었다. 아직 완성되지 못한 역들을 바라보았다. 그런 말을 했으면서 아이는 먼저 유치원의 기차여행에 갔다. 이제 곧 아이가 올 시간이 되었다. 개던 빨래를 두고 일어났다. 유치원 선생님들은 고개를 숙인 채 죄송하다는 말만 연신 되풀이하고 있었다. 머리가 멍해졌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아이가, 없다고 한다. 그 많은 아이들 중에 우리 아이만이 없다고 한다. 나는 선생님들 사이를 지나 옹기종기 모인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체크무늬 티에 연갈색 반바지를 입은 아이를 필사적으로 찾았다.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경찰의 목소리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물고기가 뻐끔대는 것처럼, 경찰의 입 속에서 공기방울만 번져 나갈 것 같았다.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분명, 기차역에서 아이들을 세 볼 땐 딱 맞았어요.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기차가 먼저 떠나 버릴까봐 뛰어서, 타기 직전엔 미처 확인 못했거든요. 아마도 그 때…….” 등받이에 기댄 등이 미끄러지면서 몸이 늘어진다. 아이네 반 선생님은 힐금 내 눈치를 본다. 해바라기반 선생님이라고 했다. 해바라기처럼 밝게 웃던 아이가 자꾸 떠올랐다. 아이의 반 친구가 아장아장 걸어왔다. 경찰의 어딘가로 전화를 하고 있었다. 아이의 친구가 나를 빤히 보더니 말했다. “걔 어떤 아저씨 따라 갔어요.” 경찰도, 나도 순간 시선을 돌렸다. 유괴범은 남편을 닮았다. 경찰이 아이의 친구와 선생님들에게 혹시 이런 사람이 역 근처에서 알짱거렸습니까, 하고 보여준 몽타주는 놀랍도록 남편을 닮았다. 하지만 남편일 리가 없었다. 남편의 장례식을 치룬지 1년이 되어간다. 아이는 그 때 아직 어렸다. 남편은 완행열차의 차장이었다. 느리게 굴러가는 기차를 타고 간이역들을 지나며 차창 밖을 보는 것이 즐겁다고 했다. 죽을 때도 기차에서 죽고 싶다던 남편은 결국 기차가 아니라 교통사고로 내 곁을 떠났다. “맞아요, 저 사람이에요. 자꾸 애들 근처에 얼쩡거려서 수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아이의 선생님이 손바닥을 딱 치며 소리쳤다, 경찰이 고개를 숙였다. “이 놈, 상습범입니다. 요새 애들 납치 사건 많이 나오죠  조심하세요. 돈을 요구하는 녀석이 점잖은 편이지 가끔은…….” 말을 잇던 경찰이 나를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경찰과 함께 간 역은 어디선가 많이 본 것 같았다. 바로 앞의 산은 안개가 걸려 희미하게 보였다. 역 안 슈퍼에서는 훈제계란을 팔고 있었다. 빨간 그물망 속에 밀어 넣어진 훈제 계란들이 부딪힐 때마다 덜그럭 소리를 냈다. 아이와 꼭 지차여행 갈 때 계란 몇 개를 까먹으며 두런두런 얘기를 하고 싶었는데…….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경찰이 역무원을 붙잡고 무언가를 묻고 있었다. 시골답게 역은 조용했다. 집에 돌아왔을 때는 너무 피곤했다. 아이의 방 문을 열어보니 아이의 방 책상에 무언가가 놓여 있었다.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자그마한 역이 ‘우리집 역’ 이라는 이름을 달고 아이의 낮은 책상 위를 뒹굴고 있었다. 아이의 키에 맞게 산 낮은 책상 위로 몸을 숙였다. 역의 풍경들이 사진 속에 박혀있다. 내가 뽑아 준 사진이었다. 이런 게 역이한다, 하고 아이가 모형을 잘 만들 수 있도록 뽑아 준 사진이었다. 천천히 사진을 넘기는 데, 아이가 사라진 역의 모습도 보였다. 문득 그 역의 풍경들이 어딘가 낯익었던 것이 생각났다. 경찰의 전화에 세수도 하지 않고 뛰어 갔다. 용의자가 잡혔다고 한다. 거칠게 경찰서 문을 열자 몽타주 그림과 닮은 남자가 앉아 있었다. 경찰이 나를 바라보았다. 이상하게도 그 눈빛이 꼭 동정하는 것 같았다. “저 놈이 데려 간 아이들을 다 조사해 봤는데 체크무늬 티에 연갈색 바지를 입은 아이는 없었습니다.” 경찰이 말했다. “또, 저 놈 스스로도 그 역엔 가지 않았고 그런 아이는 모른다더군요.” 손이 자꾸 떨렸다. 주먹을 꽉 쥐자 손톱이 손바닥을 꾹 누르는 것 같았다. “거짓말 아닌가요 ” 자꾸 멍해지는 정신을 잡고 물었다. “난 정말 아니라니까! 잃을 것도 없는 판에 뭘 숨기겠어. 내가 당신에게 돈을 요구하는 전화라도 했냐고!” 날카로운 남자의 목소리가 귓 속에 흘러들어온다. 그런 전화는 물론, 없었다. 그 남자는 아이를 납치하면 무조건 돈부터 요구하는 걸로 유명하가고 했다. 집으로 돌아왔을 땐 벌써 오후 6시였다. 아이를 다시 한 번 찾아보겠다고 경찰은 말했다. 경찰서에서 본 남자는 역시나 남편과 닮았다. 분위기만 달랐을 뿐이었다. 그가 아이를 데려가지 않았다면 도대체 누가 아이를 데려간 것일까. 집으로 가는 기차와 반대쪽 기차로 왜 아이를 데려갔을까. 어쨌든 남편과 닮은 또 다른 사람일지도 모른다. 아이가 제 아빠인줄 알고 냉큼 따라간 걸지도 모른다. 아이는 남편의 얼굴을 모르겠지만 식탁 위에 올려 둔 아이가 막 태어났을 때의 사진을 보고 알았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이의 방으로 들어갔다. 책상위의 ‘우리집 역’을 가지고 기차 모형이 있는 곳으로 갔다. 종점하나만 끼우면 되는 역의 나무는 또 다시 계속 뽑힌다. 이걸 보고 아이는 태풍이 부는 것 같다며 좋아했다. 나는 천천히 ‘우리집 역’을 종점 부근에 끼웠다. 자꾸 아이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엄마, 우리 기차여행 가는데 꼭 우리집에 있는 기차역들이랑 닮았어!” 기차여행 가기 하루 전 날 짐을 싸던 아이가 그렇게 말했었다. 아이는 모르겠지만 그 기차 모형은 남편이 완행열차의 차장을 맡았던 시절, 남편이 돌던 역을 따라 만든 것이었다. 얼마 없는 완행열차를 몰고 몇 번이고 돌던 그 길들. 나는 천천히 플라스틱 기차를 움직였다. 선로에 따라 몸을 굽히는 기차가 유치원역에서 기차여행을 지나 우리집역으로 오고 있다, 아이는, 그저 남편과 기차여행을 간 것일지 모른다고. 아이가 보고 싶어 잠시 온 남편은 생전처럼 기차를 몰아 아이를 종착역에 내ㄹ다 줄 것이다. 나는 조용히 지차 모형에 속삭였다. 아이가 타고 나고 있을 것 같은 기차 모형은 천천히 선로를 다시 돌고 있었다. 아이야, 네가 올 곳은 여기란다. 종점에서 ㅣ다릴테니까 꼭 돌아와줘. 아이의 대답이 멀리서 들린 것 같았다. <소설 - 차하> 종점 밀양여자고등학교 3학년 김수진 난 눈을 깜빡인다. 수많은 풍경들이 눈앞을 스쳐 지나가고 있다. 아주 오래된 영화 필름처럼 빛이 바랜 풍경들이다. 난 점점 희미해지는 기억들을, 그 소멸의 속도를 멈춰 보려고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린다. 순간, 어느 기억의 단면 속으로 한 아이의 모습이 보인다. 난 눈꺼풀을 바르르 떤다. 제제. 아이는 날 그렇게 불렀다.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책인 ‘나의 라임올렌지 나무’의 주인공 이름이라고 했다. 난 그 책을 읽어본 적이 없었고 그 애가 날 ‘제제’라고 부르면 가르릉 거리는 숨소리를 내며 불쾌해 했다. 어른거리는 기억 속에서 아이는 여전히 나를 그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그리고 울먹인다 제제, 가지 마… 기억의 풍경이 실타래처럼 뒤엉킨다. 어느새 그 애는 사라지고 낯익은 마당이 나타났다. 시큼한 풀 냄새가 나는 마당에 뒹굴고 있는 내가 보인다. 나와 비슷한 생김새를 지닌 형제들이 나에게 장난을 치고 난 작은 혓바닥을 입밖으로 내민 채 웃고 있다. 아, 그토록 오래 그리워 한 엄마도 내 곁에 있다. 내가 영원히 가슴에 품고 있던 그 풍경을, 햇빛이 따스한 마당과 가족들을 난 헐떡이면서 바라본다. 다시 뒤엉킨 기억은 가장 끔찍했던 순간을 내게 보여준다. 구석으로 몸을 웅크리고 숨으려는 나의 모습이 보인다. 그러나 난 쉽게 숨을 수 있던 어린 시절처럼 작지 않다. 난 금방 검은 옷을 입은 남자에게 발각되었다. 남자는 날 때리고 발로 걷어찬다, 남자가 가라는 데로 가지 않거나 하나는 행동을 하지 않으면 난 늘 저 기억 속 모습처럼 맞아야 했다. 저것엔 자유가 없었다. 그 두려운 기억의 정거장에 멈춰선 나는 그 때처럼 몸을 떤다. 제제. 제제, 떨지 마. 불현듯 아이의 목소리가 들린다. 떨고 있는 내 얼굴을 제 품에 파묻어 주는 아이. 이제 기억난다. 그 애의 이름은 예은이었다. 그 애의 집에 갔던 날, 난 낯선 풀경과 사람들이 무서워 온몸을 떨었다. 그때 예은이가 나타났고 날 끌어안았다. 예은이의 체온은 엄마를 떠올리게 했다. 나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던 그 애. 초점을 잃고 흔들리던 그 애의 까만 눈동자. 예은이는 앞을 보지 못하는 아이였다. 그리고 난 그 애의 눈이 되기 위해 그 집에 보내진 안내견이었다. “종점은…어딜까 ” 나와 나란히 아파트 앞 버스 정류장에 서있는 예은이의 모습이 보인다. 흐려지는 누에 그 애의 모습을 담으로 난 안간힘을 쓴다. 간신히 또렷해진 예은이가 내게 말한다. “버스를 타고 종점에 가보고 싶어. 난 버스를 타본 적이 없어서 종점이 어떤 곳인지 모르거든. 여기 이렇게 서서 부웅, 하고 떠나는 버스 소리를 들을때면…아, 내가 들어갈 수 없는 세상 하나가 또 떠나는 구나, 나는 가지지 못한 자유를 싣고 떠나는 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 그리고 미소를 지으며 그 애는 묻는다. “내가 갈 수 있는 종점은 어딜까 ” 난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지는 걸 느낀다. 내가 눈이 되었다면, 그 랜 버스 종점이던 기차 종점이던 갈 수 있었을 것이다. 힘겹게, 눈썹이 걸려있던 눈물방울을 떨어뜨린다. 그 애에게서 벗어난 후 내가 들렀던 자유의 정거장들이 눈앞을 스쳐간다. 자유가 있는 세상은 생각보다 더럽고, 위험하고, 허기진 곳이었다. 그럼에도 좋았다. 누군가의 눈이 될 필요가 없었으니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자유롭게 떠돌거나 거리를 헤매다 발을 멈추면, 그 애 목소리가 떠올랐다. 가지 마, 제제…. 호흡이 가쁘다. 흥건한 피에 적셔진 몸이 차가워진다. 난 마지막 핌을 짜내어 그 애와 헤어지던 순간을 떠올린다. 나와 단둘이 거리에 나왔던 그날, 그 앤 내 목줄을 느슨하게 잡고 있었다. 막 횡단보도에 섰을 때 난 꺼져가는 푸른 신호등을 보았다. 난 육감처럼, 내가 그 애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순간이 왔음을 느꼈다. 난 재빨리 뛰었다. 제제… 그 기억 속에서 예은이가 나를 부른다. 난 길 건너편에 그 애를 남겨두고 길을 건넌다. 어느 새 신호등은 붉게 물들어 있다. “제제!제제, 가지 마.”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그 애가 울먹이며 맞은편의 나를 부른다. 난 다리를 떤다. 그리고 그 애가, 길을 건너기 시작한다. 타는 듯 붉은 신호등을 보지 못하고. 쾅…. 아주 신 순간이었다. 난 달리기 시작했다. 점점 어두워지는 기억의 화면에 미친 듯 달려가고 있는 내가 보인다. 난 그저 하염없이 달리고만 있다. 예은아, 넌 너의 종점이 어딜지 궁금해 했었지. 나도, 나도 몰랐어.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어디에 도착해야 하는지. 그런데, 바ㅗ같이, 이 순간에서야… 난 네가 내 종점이었다는 생각이 들어 마침내 눈앞이 어둠으로 가득 찬다. 차에 치인 순간의 고통도, 비를 맞으며 누워있던 도로의 모습도 까맣게 사라진다. 난 어둠 속에서 희미한 누군가의 실루엣을 본다. 팡을 벌리고 날 기다리는, 너무나 그리운 사람의 모습. 난 내가 도달해야 할 그곳으로, 그 마지막 장소로 달리기 시작한다. 아주 힘찬 발걸음으로 <소설-차하> 종점 안양예술고등학교 3학년 주진영 꽃잎이 휘날린다. 봄이다. 가족 나들이가 많은 봄은 사람들의 버스 이용이 증가하는 아주 좋은 계절이다. 사람들로 꽉 찬 버스로 인해 승객들은 짜증을 낼 지 몰라도 운전사의 얼굴에선 미소가 떠나지 않는 것이다. 벚꽃 축제에서 탄 사람들은 아직 반도 내리지 않았다. 난 백미러로 승객들 안전을 살핀다는 이유로 연신 승진이를 힐끗 거린다. 승진이는 내 뒷자리에서 창문을 열어 놓고 바람을 쐬고 있다. 녀석이 안쓰럽다. 아내가 죽은 후 맡아주는 이가 없어 매일같이 버스를 태우고 다닌 게 어엿 이 년이다. 유치원에 보내려고 했지만 눈 먼 아이를 받아주는 곳을 찾기란 그리 쉽지 않았다. 저마다 여러 가지 이유를 대며 승진이를 거부하기 일쑤였다. 난 하는 수 없이 아이를 버스에 태우고 도시 곳곳을 달리기 시작했다. 한 가지 다행인 것은 승진이가 버스 타는 것을 좋아한다는 점이었다. 승진이는 버스를 타면 여행을 하는 기부이 든다고 했다. 항상 다행인 점만 있으면 좋으련만…….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승진이를 태우고 다니면서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사람들의 시선이었다. 겉은 정상으로 보일지라도 눈이 안 보이는 것 마저 정상으로 보일 수는 없었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승진이를 빤히 보는 사람들을 볼 때면, 승진이가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오히려 다행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녀석도 사람이었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까지 못 느낄 리가 없었다. 동정하는 눈빛들과 말들이 쏟아낼 때마다 녀석을 입술을 꽉 깨물었다.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지만 내가 보고 있다는 사실 때문일까. 녀석은 잘도 참아냈다. 역에 도착하자 사람들이 내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내리는 사람만큼이나 타는 사람들도 많다. 텅텅 비어있던 좌석들은 다시 사람들로 가득 찼다. 문을 닫고 출발하려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헐레벌떡 뛰어오는 것이 보인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다. “아이고, 기사양반, 고마워요.” 할머니가 양 손에 들고 있던 짐을 내려놓고 잠시 숨을 고른다. 그런데 하필이면 할머니가 서있는 곳이 승진이 앞이다. 불안하다. 할머니는 승지이가 앞을 볼 수 없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연신 헛기침을 했다. 자리를 비켜줬으면 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자신 앞에 누가 서 있는지도 모르는 승진이는 콧노래까지 부르며 창 밖을 보고 있었다. 전에도 한 번 이런 일이 있었던 터라 나의 불안감은 심해져만 갔다. 전에는 다른 사람이 자리를 비켜주는 것으로 끝났지만 이번은 달랐다. 상황을 파악한 사람들이 자리를 비켜줘도 할머니는 움직이지 않았다. 아이의 버릇을 고쳐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 때, 드디어 일이 터지고 말았다. “야, 이놈아! 노인 공경도 몰라 ” 꿀밤을 맞은 승진이가 초점없는 눈으로 고개를 돌린다. 이쯤되면 아이가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알만도 한데, 잔뜩 흥분한 할머니 눈에는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부모님이 이렇게 가르치든  이만큼 눈치를 줬으면 일어나야지!” 이 순간 내가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건 무엇일까. 달려가서 설명이라도 해야하나.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리를 헤집을 때쯤, 승진이가 일어났다. 가슴이 철렁하다. 저러다가 넘어져 다치기라도 한다면 어쩌란 말인가. 더듬거리며 걸음을 옮기는 승진 모습에 할머니도 그제야 눈치를 챈 듯했다. 승진이를 다시 자리에 앉히려 했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승진이가 넘어지고 만 것이었다. 난 급히 버스를 멈추고 승진이에게 다가갔다. 승진이의 입은 피로 흥건했다. 미안혀라, 난 장님인 줄 몰랐지. 할머니가 혀를 찬다. 서둘러 손수건을 꺼내 지혈을 시킨다. 사람들의 동정어린 눈빛들이 쏟아진다. 버스를 도로 옆에 잠시 세워두고 아이의 상태를 살핀다. 치아 두 개가 나가 있다. 놀랐을 아이에게 물을 먹인다. 승진이의 숨소리가 거칠다. “미안해, 아빠 때문이야.” “아니에요 아빠. 하나도 안 아파요.” 아이가 웃는다. 아이를 꼭 끌어 안았다. 다시는 이런 일 겪게하지 않으마. “아까 할머니는 모르고 그런 거잖아요. 난 괜찮아요.” 아이의 말에 울컥 눈물이 쏟아진다. “아빠, 난 내가 보는 세상이 아름다웠으면 좋겠어요. 아까 그 할머니 못된 사람 아니잖아요.” 아이가 내 눈물을 닦아준다. 난 아이의 손을 꼭 잡았다. “나 버스타고 싶어요. 빨리 운전해줘요, 아빠.” 아이가 신이 나서 소리친다. 난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를 운전석 뒤에 앉힌다. 아이가 큰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정말로 아이가 보는 세상은 아름다울까. 온통 흑백이지는 않을까. 여러 가지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간다. 시동을 걸자 버스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아이의 목소리가 더 커진다. 아이에게 아름답고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주고 싶다. 아이가 평생 눈을 볼 수 없을 지라도 세상만은 따뜻하게 느끼게 해주고 싶다. 버스가 종점을 향해 달리기 시작한다. 흑백 세상의 끝, 아름다운 세상이 시작되는 그 곳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