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0회 전국 고교생 문학 콩쿠르 수상작
등록일 2015-06-26
작성자 학과관리자
조회 2832
시 장원
목소리
산본고 2학년 최유정
아버지 목젖아래 뚫려있는 구멍,
오래 전 그 속으로 아버지는 목소리를
집어 삼키셨다
병실 안 헐렁한 환자복의 아버지가 누워있다
끈적한 혓바닥 대신
맨홀처럼 뚫린 목위의 구멍
그 주위를, 의사의 목소리, 어머니 울음소리가
파리떼처럼 들끓어
컥컥, 아버지의 목소리가 된다
오십년, 묵었던 소리들
벌름거리는 말이 병실 안을 메워간다
목에 걸쳐진 보호대위로,
구멍옆으로 목소리들이 줄줄 흘러나온다
망연하게 뻐끔거리던 입술이
멍하게 벌어진다
틀어진 가습기처럼 목에서, 입에서
뱉어낸 소리들이 뭉텅뭉텅 아버지의
가슴께로 떨어진다
병원안으로도 밤이 찾아온다
어두운 병실을 드러내는 문틈 사이로
아버지가 침대에 누워있다
나는 아버지 옆에서
조심스럽게 한 마디 꺼내
목젖아래로 끼워넣는다.
소설 장원
목소리
안양예술고등학교
3-7 윤소희
나는 오늘도 당신의 목소리를 훔친다. 숨을 최대한 주기고, 녹음기를 벽으로 바짝 가져다 댄 채. 봄볕처럼 포근한 당신의 목소리가 낡은 원룸 벽 너머로 흘러 들어온다. 나는 두 눈을 꾹 감는다. 문득 당신이 까르르, 웃는다. 당신의 ‘오빠’도 당신의 목소리를 사랑하겠지. 응, 오빠. 끊어. 당신의 애교섞인 목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당신의 인사말과 함께 녹음기를 정지시킨다. 당신의 목소리는 녹음기 속 들어있는 작은 칩에 박제되었다. 나는 상자 하나를 꺼낸다. 1년 동안 훔친 당신의 목소리가 이곳에 들어있다. 나는 녹음기에 들어있는 작은 칩을 뺀다. 2012.5.26. 오늘의 날짜를 적는다. 그리고는 상자 안에 당신의 목소리를 담는다. 나는 오늘도, 당신의 목소리를 갖게 되었다.
옷장을 연다. 옷장 안에 들어있는 물방울무늬 원피스를 입는다. 당신의 목소리와 어울릴 법한, 봄날의 꽃비를 닮은 원피스다. 나는 한참동안이나 거울을 들여다 본다. 곧게 쭉 뻗은 다리와 커다란 눈망울. 모든 여자들이 부러워 할 만한 모습이 거울 안에 있다. 나는 싱긋, 미소를 짓는다. 초승달 모양의 눈웃음과 움푹 패인 보조개가 아름답다. 하지만 나는 아름다울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
내가 다신의 목소리를 처음 듣게 된 날은, 유난히 비가 후두둑, 쏟아졌다. 나는 그 날 짧은미니스커트를 입고 아찔한 높이의 하이힐을 신은 채 거리를 걸었따. 남자들은 한 번씩 나를 훔쳐 보았다. 잠실에 있는 백화점을 지나칠 즈음이었다. 누군가 불쑥, 내 우산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멀뚱멀뚱 남자를 쳐다 보았다. 훤칠한 키의 남자는 환하게 미소지었다.
“전화번호 좀, 알 수 있을가요?”
남자는 부드럽게 말했다.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느껴졌다. 그래서일까. 나는 얼떨결에 입을 열었다.
“아…… 공일공에…….”
내 목소리를 들은 남자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졌다.
“더러운 새끼.”
남자는 땅 바닥에 침을 뱉으며 말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남자를 바라보았다.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 같았다. 남자는 점ㅈ머 시야에서 멀어져갔다. 나는 우두커니 선 채, 남자의 뒷모습을 지켜 보았다. 후두둑, 떨어지는 빗소리가 마음을 쿡, 쿡, 찔렀다.
여자의 목소리를 갖지 못한 트랜스젠더를 사랑해줄 남자는, 없었다.
그날 밤 나는 한참을 뒤척였다. 잠에 쉽사리 들지 못했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따뜻하고 온화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소리의 근원을 찾아 벽에 귀를 가져다 댔다. 통화를 하고 있는 듯한 당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은 내가 가질 수 없는 아름다운 목소리를 갖고 있었다. 나는 당신의 목소리를 들으며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며칠 째, 당신의 목소리가 들리지 ?는다. 나는 몇 시간이고 벽에 귀를 가져다 대지만, 당신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당신이 어딘가로 외출을 한 걸까. 아니면, 아주 멀리 떠나버린 걸까. 불안하다. 나는 녹음된 당신의 목소리를 하나씩 들어본다. 나에게는 당신의 목소리가 필요하다.
당신의 현관문 앞을 서성인다. 당신은 통 집밖을 나오지 않는 사람이었다. 당신은 늘 집에 틀어박힌 채 ‘오빠’라는 사람과 통화를 했다. 택배직원이나 음식배달원만이 당신을 찾을 뿐, 그 누구도 당신의 집을 찾지 않았다. 나는 주위를 둘러본다. 배달된 음식그릇도 보이지 않는다.
사실 당신과 딱 한 번 마주친 적이 있었다. 외출을 하기 위해 현관문을 잠글 때였다. 짜장면 그릇을 내놓는 당신의 손과 마주쳤다. 내가 본 당신 모습의 전부였다. 나는 당신이 분명 아름다울 거라고, 생각했다.
현관문에 귀를 가져다 댄다. 당신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나는 손톱을 깨문다. 그때, 조그마한 창문 하나가 보인다. 부엌의 환풍구로 쓰이는 창문이다. 나는 손을 뻗어 창문을 열어본다. 고약한 악취가 훅, 끼친다. 나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다. 그리고는 까치발을 들어 당신의 집을 훔쳐본다. 전등줄에 매달린 당신이, 보인다.
몸이 딱딱하게 굳는다. 나는 우두커니 선 채, 당신의 얼굴을 바라본다. 머리카락이 잔뜩 흘러내린 당신의 얼굴은, 화상으로 함몰되어 있다.
당신에게도 가질 수 없던 무언가가 있었던 것일까.
나는 녹음기 안에 들어있는 칩을 뺀다. 그것을 한참이나 바라본다. 그리고는 꿀꺽, 삼킨다. 나는 당신의 목소리를 가질 수 없다.
수필 장원
목소리
대전 둔원 고등학교 3학년
길예원
나는 내 목소리 때문에 많은 놀림을 받는다. 떽떽거리고 앵앵거리는 목소리 덕에 이런저런 오해를 달고 다닌다. 오해를 풀어서 날려보낸 경우도 있고 아직도 풀지 못해 달랑거리는 오해도 있다. 이 곳에 오는 동안에도 나는 많은 목소리를 흘리며 왔다. 귀에 담긴 목소리, 가슴에 맺힌 목소리, 허공을 떠도는 목소리들이 될거다. 글을 쓰고 있는 강당에도 많은 목소리가 부유하고 있다.
목소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소리의 진동만이 아니다. 육체에서 나오는 공기, 가슴이 싸매고 있던 감정 보따리, 말에 실린 힘들이 있다. 눈을 뜨면 보이는 것이 있고 눈을 감아서 보이는 것이 있다. 눈을 뜨면 보이는 것이 보이지만 눈을 감으면 보이지 않는 것도 보인다. 마음을 쏟아야 보이는 것이 있고 마음을 비워야 보이는 것이 있다. 목소리는 눈을 감아야 보인다. 마음을 쏟으면 목소리의 뜻이 보이고 마음을 비우면 목소리의 삶이 보인다. 듣는 이에게 목소리는 귀를 때리는 찰나의 소리지만 담는 이에게 목소리는 삶을 더하는 겁의 음성이다. 겁의 음성은 귀가 아닌 가슴으로 온다. 가슴으로 온 음성은 받는 이의 온도에 따라 숙성 정도가 결정된다. 양념이 고루 배인 목소리가 어떤 용도로 쓰일 지는 담는 이의 그릇 차이다. 내 목소리가 어떻게 쓰일 지는 목소리가 나를 떠난 후에 관여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가슴을 차고 목을 긁어 나온 씨앗을 기르는 건 심는 이의 몫이다. 다만, 내 목소리가 그에게 닿아 꽃이 된다면 나는 기쁠거다. 소리의 씨앗 외에 나의 마음을 읽어 꽃을 피워낸다면 나는 아낌없이 내 양분과 물을 줄 거다.
목소리에서 오는 오해는 눈을 뜬 귀에서 온다. 눈을 감고 가슴을 통하는 귀는 목소리의 뿌리를 본다. 애정이 없는 씨앗은 나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애정이 있는 씨앗이 나를 아프고 성장하게 만든다. 사랑하는 이들의 목소리가 나를 더 힘들게 만드는 까닭이 이 때문일거다.
글을 읽으면 작가의 목소리가 울린다. 구절마다 다르게 들릴 때가 있고 균일하게 들릴 때도 있다. 은은하게 흐를 때도 있고 박힐 때도 있다. 내 글에서는 어떤 목소리가 들릴까? 다른 이가 내 글을 읽었을 때 어떤 목소리가 울릴 지 궁금하다. 바라는 점이 있다면 눈과 귀가 아닌 가슴에 닿았으면 한다. 가슴에 닿아 싹 틔울 수 있는, 찰나의 시간이 아닌 영겁의 시간이 될 수 있는 목소리를 쓸 수 있도록 다듬고 깎아야겠다. 나의 글이 마음에 울릴 수 있도록.
시 차상
시 차상
목소리
-언니의 인생 가이드를 찾습니다
동아여자고등학교 3학년 백희원
언니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벚꽃처럼 활짝 핀 지금은
한국 관광 성수기 오월이에요
언니는 중국인 전문 가이드에요
물론, 여행사 정식 직원은 아니에요
없는 집 자식이지만 언니는
삼 개 국어를 구사해요
잘 살아보고 싶은 언니가
목소리 데시벨을 높이는 건
필수 관광지 같은 거에요
경복궁은 조선 시대 궁궐 중
가장 중심이 되는 법궁입니다,
중국인 특징은 왁자지껄
감탄사가 플래쉬처럼 터져요
한국 역사를 소개하는 언니의 목소리에
애국심은 추가 상품이 아니에요
언니의 목소리는 누군가를 안내하는데
언니의 인생은 누구의 목소리가 들리는가
아무리 관광 안내판을 짚어봐도
언니가 깃발을 꽂을 목적지는 없어요
엄마 아빠는 각자 살기 바빠요
언니는 하고 싶은 말 대신
칭 껀 워 라이
연못에서 물고기가 유유자적,
언니를 약올려요
창경궁으로 향하는 언니의 목소리가
조선 시대 중전들처럼 우아할 수는 없을까
언니의 목소리가 너무 커서,
슬퍼요
오월 햇빛이 이정표를 잃고
바람에 떠밀려가는 봄날입니다
소설 차상
소설-차상
목소리
조선대학교 여자고등학교 3학년
구세희
집으로 돌아왔을 때, 현관문 앞에 노란 포스트잇 한 장이 떨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포스트잇에는 짧은 한마디 말이 적혀 있었다. ‘남의 물건에 손대지 맙시다.’ 순간 얼굴이 홧홧해졌다. 어제 세면대에 누군가 두고 간 치약을 잠깐 썼는데, 치약 주인이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날려 적은 글씨체에서 불만스러움이 그대로 느껴졌다. 포스트잇을 남긴 사람은 분명 강한 억양과 신경질적인 목소리를 가진 여자일 것 같았다. 101호에서 106호 사람들 중 가장 비슷한 말투를 가진 사람이 누구일지를 가늠하며 현관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이 고시원에 들어온 후 포스트잇으로 이야기하는 일은 빈번히 있는 일이니 애써 무시했다.
어느 날, 공용세탁기에 포스트잇 한 장이 붙어져 있었다. ‘다음 사람을 배려해서 빨리 자신의 세탁물을 빼갑시다.’ 같은 층에 사는 사람들끼리는 세탁기를 공용으로 썼기 때문에 이런 배려가 무척 필요하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나는 그 포스트잇을 보며, 괜찮은 방법이라고 생각하다가, 포스트잇을 붙인 사람이 누구일까, 생각했다. 그 후로 고시원 안에서 포스트잇을 사용하는 일이 빈번해졌고, 서서히 공간과 시간을 불문하고 아무렇게나 번져갔다. 하지만 누가 포스트잇을 붙인 건가는 알 수 없었다. 음성 변조보다 더 익명성이 짙은 목소리들이었다.
엄마는 내말은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어떤 사물에게 말해도 이보다 더 무미건조할 수 없을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추석에는 내려오지 말아라. 무슨 꼴이냐, 간신히 얻은 직장을 말 한마디 잘못해서 짤렸으니.”
나는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입술을 꿀 깨물었다. 그것이 가장 내게 있어 현명한 선택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든 엄마와 나 사이에 침묵이 오갔다. 그리고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게 전화가 끊겨 있었다. 나는 방안에 널려있는 빨래거리들을 가지고 나갔다. 세탁이 앞에 102호 여자가 허리를 굽히고 서서 비키지 않았다. 내가 온 것을 안 건지 모르는 건지 계속 세탁기 버튼만 누르고 있을 뿐이었다. 점점 짜증이 났다. 나는 일부러 말은 하지 않고 헛기침을 했다. 102호 여자가 나를 힐끗 쳐다보더니 몸을 돌려 세탁기실을 빠져나가면서 말했다.
“세탁기가 고장이 난 것 같네요.”
귀여운 이목구비와 어울리지 않는 점잖은 목소리였다. 나는 주인아주머니께 알려야 하지 않을까요, 말하려다가 또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내일 포스트잇을 붙여볼까, 하고 바로 생각을 고쳐먹었다. 나는 품 안에 가득 품은 빨래거리를 들고 복도를 천천히 걸었다. 102호실 문이 보였다. 문득 고시원에 들어와서 누군가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본 것이 무척 오랜만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화장실 바닥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마치 예기치 못한 일에 마주치거나 무척 화가 난 사람처럼 심장이 벌렁거렸다. 내가 어젯밤에 세면대 거울에 붙여 놓은 포스트잇이 갈기갈기 찢어진 채 바닥에 버려져 있었다. 사람들이 무참히 밟고 간 흔적도 보였다. 세면대에 두고 간 칫솔을 106호에서 찾아가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그것이 도대체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없엇다. 자신의 물건을 손대서 기분이 나쁘다는 건지, 너무 사소한 일로 화장실을 어지럽힌다는 건지, 둘 다 아니면 어떤 방식으로도 목소리를 내지 말라는 것인지, 어쨌든 나의 목소리가 무참히 무시 당했다는 것은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다.
나는 더 이상 포스트잇을 사용하지 않았지만, 고시원 사람들은 여전히 포스트잇으로 말했다. 나는 여기저기, 화장실, 방문, 세탁실, 어떤 곳을 불문하고 붙여져 있는 포스트잇을 바라보았다. 여기저기서 악악거리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시끄럼게 들려오는 것 같았다.
바깥에서 시끄러운 사이렌 소리가 소란스럽게 들려왔다. 나는 눈을 감은 채로 무슨 일인지 생각하다 결국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상하게도 자꾸만 기침이 나고 숨이 막혔다. 문을 열자 뜨거운 열기와 함께 검은 매연이 얼굴에 확 끼쳤다. 거의 숨도 쉴 수 없었다. 옷섶으로 코와 입을 막고 복도로 나가보았다. 사람들이 뛰쳐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나는 정신이 혼미해져 거의 걸을 수도 없게 되었다. 점점 불길이 보였다. 걸음을 뗄 수 없었다. 구조대 한 명이 계단으로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나는 여기 사람 있어요, 소리를 쳤다. 그런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아무리 목을 부여잡고 소리 질러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복도 끝에 103호 남자가 보였다. 몸이 반쯤 쓰러져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살려달라고 소리 지르는 사람이 아니라, 목소리를 돌려달라고 절규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복도 바닥에는 떨어진 포스트잇들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수필 차상
목소리
고양 예술 고등학교
정유진
드르륵 드르륵, 휴대폰 진동음이 방안 가득 울린다. 잠결에 더듬더듬 휴대폰을 찾아 켜보지만 내게 온 전화가 아니다. 옆방 여자가 또 책상 위에 휴대폰을 올려둔 채 잠든 것이다. 책상과 휴대폰이 맞닿아 진동하는 소리는 벽을 타고 들어오며 어마어마하게 증폭된다. 나는 주먹으로 벽을 쾅 친다. 그제서야 끝날 것 같지 않던 진동음이 서서히 멎는다.
나는 또래 아이들과 달리 고시원에서 혼자 생활하고 있다. 글공부를 하기 위해 이민 간 가족 곁을 떠나 홀로 한국에 왔기 때문이다. 일찍부터 자립을 시작하는 것이 쉽게 느껴지진 않았지만 중국에서는 우리나라의 소설책 한 권을 구하는 것도 힘이 들었다. 집안일과 학업을 병행하며 바쁜 나날을 보낸 것도 어언 2년. 내내 비어있던 옆방에 불청객이 찾아온 것은 지난 달의 일이다.
722호는 창문이 없고 복도 끝에 위치한 방이라 사람들이 선호하지 않았다. 덕분에 나는 오랫동안 소음 걱정 없이 편안히 살 수 있었던 것이다. 722호에 누군가 들어오고 나서부터 내 하루는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고시원의 방음은 형편없는 편이었다. 옆방에서 틀어놓은 예능 프로그램이나 통화소리는 물론, 컴퓨터 마우스가 딸깍이는 소리까지 벽을 타고 흘러들어왔다. 무엇보다 참을 수 없는 것은 옆방여자의 목소리였다. 그녀는 가래가 낀 듯 심하게 갈라지는 목소리로 하루 종일 나를 괴롭혔다. 두 방을 구분짓는 얇은 벽은 있으나마나한 것이었다. 눈을 감고 있으면 옆방여자가 바로 내 앞에서 이야기를 하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옆방여자는 어떤 사람일까. 나는 그녀의 얼굴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외출도 하지 않았고 생활 패턴도 나와 정반대였다. 간간이 부엌이나 화장실에 가기 위해 복도로 나왔지만 마주친 적은 없었다.
나는 나름대로 그녀의 생김새를 상상해보았다. 학교를 다니지 않으니 학생은 아닐테고, 목소리나 좋아하는 TV프로그램으로 미루어 볼 때 나이가 꽤나 든 여자인 듯했다. 부엌을 자주 가는 편이 아니니 보통 혹은 마른 체격을 갖고 있을 확률이 높고, 널어놓은 빨래는 그녀가 꾸미는 것에 관심이 없음을 말해주었다.
나는 탐정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사소한 것 하나하나에서 그녀의 겉모습을 알아내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었다. 나는 그녀를 유심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들려오는 말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움직임을 예측해보기도 했다. 그녀는 골칫덩어리에서 내 관심사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때쯤 나는 글쓰기에 슬럼프를 맞고 있었다. 고등학교 삼학년이 되어 입시를 생각해야 하는 탓에 방학에도 집에 가지 못하고 고시원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휴식을 취하지 않고 무작정 글을 쓰려고 하니 자꾸만 몸이 축축 처졌다. 글쓰기가 창작이 아닌 노동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나는 무엇보다도 외로움을 견디기 힘들었다. 캄캄한 방에 혼자 우두커니 앉아있을 때면 모든 것에 회의감이 들었다. 말을 할 사람도, 말을 거는 사람도 없는 방. 나는 마치 홀로 다른 세계에 동떨어진 사람처럼 무력해졌다. 나는 누군가의 목소리, 그 떨림이 담긴 따뜻한 온기를 간절히 원했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기계음이 아닌, 진짜 목소리를 말이다.
도무지 쓰여지지 않는 소설 도입부의 한 문장 때문에 나는 완전한 패닉에 빠져버렸다. 혹시 글쓰기가 내 적성에 맞지 않는 것은 아닐까. 다른 곳에 재능이 있는 건 아닐까. 갖가지 의문만 머릿속 가득 떠올랐다. 견뎌온 2년이란 시간이 허무하게 느껴졌다. 나는 결국 반 년 만에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국제전화라는 큰 부담을 안고도 용기를 내어 건 전화였는데, 엄마는 외출 중인지 받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결국 나는 울음을 터뜨렸다. 기나긴 신호음만 지루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여보세요, 그때 누군가 전화를 받는 소리가 들렸다. 옆방여자였다. 나는 혹시라도 내 울음소리가 그녀에게 들릴까봐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아니, 힘들어. 평소와 달리 축 가라앉은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못 견디겠어. 언제까지 이렇게 있게 될까.
“앞으로 무엇이 되고 어떻게 살아갈지 모르겠어, 너무 막막해.”
나는 문득 이 세상에 나 홀로 남겨진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계라는 벽에 부딪혀 주저앉은 이가 나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은 큰 위로가 되었다. 옆방여자도. 아니, 고시원에 빼곡이 들어찬 방방마다 수많은 아픔이 웅크리고 있었던 것이다. 옆방여자가 한 말은 내게 건넨 말이 아니었지만 나는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거슬리던 그녀의 목소리가 내게 힘이 되어준 것이다.
문득 전혀 다른 세계의 일을 꾸며내려 하지말고, 겪은 일.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풀어내보라던 선생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나는 여태 너무 먼 곳만을 보고 달려온 건 아닐까. 가장 가까이에 사람을 두고도 홀로 남겨졌다고 포기해버린 것처럼 말이다. 나는 내가 살고 있는 고시원을 배경으로 소설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소외된 목소리들에 대한 소설을.
눈물을 닦고 부엌에 가려 문을 여는데, 옆방여자가 복도를 지나는 것이 보였다. 내가 상상해보곤 했던 모습과는 많이 달라보였다. 그녀는 오회려 나와 닮아있었다. 나는 둥근 어깨를 가진 그녀의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오늘도 어김없이 찰박이는 물소리가 들려온다. 수압이 약해지기 때문에 시간차를 두고 샤워를 해야 한다. 음음음. 옆방여자가 콧노래를 부르며 씻고 있다. 방금 전 내가 벽을 두드렸던 것은 까맣게 잊은 모양이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생생히 들려오는 것처럼 내 목소리도 그녀에게 온전히 전해질 수 있을까. 그녀가 내게 그랬던 것처럼. 누군가 힘이 들 때 혼자가 아니라고 말해줄 수 있는 목소리를 갖고싶다.
유명한 작가가 되겠다던 내 꿈은, 힘든 사람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줄 수 있는 소설을 쓰는 것으로 바뀌었다. 내 소설이 완성되어서, 누군가에게 읽혀지고 동감을 줄 수 있을 거라는 상상만으로도 행복해지는 것 같다. 나는 물소리가 잦아든 옆방 쪽으로 돌아앉아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해본다. 고마워요,라고.
시 차하
시 차하
목소리
안양예술고등학교 3학년 성지혜
수컷 앵무새가 죽고
새장은 고요한 무덤이 되었다
아버지가 검은봉지에 감싸 치워버린
시신을 한번 더 보고싶은지
암컷은 빠져나올 수 없는 새장틀에 바짝 붙어섰다
야야 소리지르며 같이 싸우던 메아리를 잃은 새
자신의 목소리를 잊어버렸구나
만가로 우는 법을 몰라
물기 어린 까만 눈만 꿈벅인다
횃대에 올라 푸드득 낼개짓도 해보지만
절대 입은 열지 않는 앵무새
먹는 양이 줄었다고 엄마는 모이통을 갈아주며 말했다
너흰 잉꼬새도 아니었는데 모이로
다투고 꽥꽥 소리 내지르며 질투했었잖아
새장 벽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진다
인간이 아닌 것에게 의미없는 말을 시킨 것, 잘한 일일까
새로써 울지 못하는 앵무새가
빳빳하게 몸을 뒤튼다
사랑해
처음 구사했던 단어가 찰나에
흐느낌으로 공중에 번진다
엄마가 새장문을 열어
붉게 타오른 암컷의 늘어진 몸을
천천히 꺼낸다
다시 무덤은 목소리 없는
빈 새장이 되었다
시 차하
목소리
평택여자고등학고 3학년
한경은
정제된 모래알을 알약처럼 집어삼킨 파도가
저녁상의 간을 보 듯 소금을 털어 넣고
목울대를 가래마냥 끓어올린다
병실의 산세베리아처럼 몇 년째
수평선으로 펼쳐진 당신의 몸
석양에 빗겨져 내리는 붉은 머리칼이
번식하듯 물결에 일렁인다
그 품에 안기려 달려가면 갈수록
몰아치는 어머니의 목소리
배웅처럼 멀어져가는 파도를
붙잡지 못하고 가만히,
떠나간 발소리에 밀려나다
문득, 당신을 바라본다
위로 날아드는 갈매기떼의 향연
어머니에게로 드리운 그림자가
수화처럼 돌아가라 재촉하고
멈칫, 거리는 바짓자락에 묻어난 어머니
물기없이 마른 조개마냥
입을 열지 못하고 제 등만 떠민다.
흰 장갑에 고운 뼛가루
바다로 물든 어머니의 목소리가
암석에 부딪치는 파도처럼
제 흉부에 울려퍼진다.
소설 차하
목소리
살레시오여자고등학교
최은선
내 기지국은 오늘도 에러상태다. 이 넓은 학교에 내 신호를 수신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기주국 사이의 간격이 멀 때 나타나는 끊김현상처럼 나는 언제나 끊김상태이다. 내 말은 잡음처럼 무시된다.
불이 꺼진 교실 문손잡이를 돌려본다. 덜컹하고 돌아가던 도중 멈춘다. 잠겨있는 것이다. 까치발을 들어 교실 안을 살핀다. 교실은 비어있다. 내 가방만 외딴 섬처럼 교실 구석지에 웅크리고 있다. 나는 수위실로 향한다. 열쇠는 수위실에 있다. 수위실에선 어렴풋이 텔레비전 소리가 들린다. 토크쇼가 진행 중인 듯 와르르 웃음소리가 쏟아져 나온다. 웃음이 멎을 때 즈음 노크를 한다. 똑똑. 반응이 없다. 나는 손에 조금 힘을 싣는다. 똑똑똑. 이내 신경질적으로 문이 벌컥 열린다. 수위아저씨의 얼굴이 야차처럼 일그러져 있다. 나와 눈이 마주친 수위아저씨의 눈빛이 한층 험악해진다.
“열쇠요.”
내 입술 사이로 가느다란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뭐? 수위아저씨가 되묻는다. 짜증이 난 표정이다. 열쇠 주세요. 그제야 알아들은 건지 퉁명스럽게 묻는다. 몇 반이야. 이학년 사반이요. 수위아저씨가 열쇠를 던진다. 미처 받아들지 못한 열쇠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닫히는 문틈으로 혀를 차는 소리가 들린다. 기집애 얼굴 꼴이 저게 뭐야, 쯔쯔. 나는 열쇠를 주으려 몸을 굽힌 채 멈춘다. 굳게 닫힌 문 너머로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린다. 나는 열쇠를 주워 교실로 향한다. 화상을 입은 것처럼 얼굴이 화끈거리고 따갑다. 나는 교실까지 달린다.
교실 문을 연다. 교실바닥에 함부로 내팽개쳐진 가방을 멘다. 그리곤 빈 교실을 주욱 훑어본다. 교실엔 아무도 없는데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가 환청처럼 들린다. 고함치는 소리, 발표하는 소리, 노래 부르는 소리... 욕을 퍼붓는 소리까지. 그 소리를 가만히 듣다가 조심히 말을 건넨다. 다음 교시 무슨 수업이야? 그러자 약속이나 한 듯 모든 소리들이 뚝 멈춘다. 교실은 쥐죽은 듯 조용해진다. 나는 적막한 교실에 한마디 더 내뱉는다. 왜 문을 잠그고 갔어. 나 미술실 다녀온다고 했는데... 교실은 대답이 없다. 나는 가방을 고쳐메고 뒷문으로 향한다. 무심결에 고개를 돌리니 거울에 비친 내가 보인다. 심한 화상자국으로 꺼매진 얼굴이다. 두 눈은 문둥병에 걸린 것마냥 함몰되어 있다. 현무암처럼 우둘투둘한 피부는 손길이 닿으면 가루로 바스라질 것만 같다. 나는 알고 있다. 이 흉측한 모습 때문에 다들 내게서 안테나를 접는 것을. 접힌 안테나는 전파를 수신할 수 없다. 설령 그 전파가 아주 강하다고 해도, 불가능한 것이다.
화상자국이 생긴 것은 일곱 살 때였다. 낮잠에 깊이 빠져있던 나는 애타게 나를 부르는 엄마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나는 내 얼굴을 덮친 불길에 잠에서 깼다. 불길이 얼굴을 쓸어내렸을 대의 감각은 잊을 수 없다. 너무 뜨거운 것은 오히려 차갑게 느껴진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중환자실에 입원한 내 옆에서 엄마는 섦게 울었다. 엄마의 울음소리는 메아리처럼 울려퍼졌다. 의식은 흐렸지만, 박쥐가 초음파를 감지하듯 엄마의 울음소리를 여는 소리보다 또렷하게 감지할 수 있었다.
교실 문을 잠근다. 열쇠는 수위실 문 앞에 둔다. 교문 밖으로 나와 택시를 탄다. 행복 재활 센터 가주세요. 택시가 출발한다.
택시는 재활원 정문에서 멈춘다. 정문에는 노란 플래카드가 걸려있다. 자원봉사자를 모집합니다. 입안으로 중얼거려 본다. 나는 익숙한 걸음으로 재활센터 안에 들어간다. 그러고나서 곧장 5층 504호로 향한다.
똑똑. 가볍게 노크한다. 들어와. 그런 대답이 들린다. 문을 연다. 침대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있는 네가 보인다. 너는 이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왔어? 네 눈이 이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응. 내 대답에 네가 웃는다. 기다렸어. 어제 해주던 얘기 어서 계속 듣고 싶어서. 들뜬 목소리다. 나는 네 침대 옆에 놓인 의자에 앉는다. 네 손을 잡다 저는 흐린 동공으로 나를 본다. 아니, 너는 어둠을 본다.
시각 장애인인 너를 만난 것은 작년이다. 외면당하는 아픔을 견디다 못해 나는 이 재활원에 왔다. 그리고 너를 만났다. 너는 누구보다도 또렷하게 내 신호를 수신했다. 네가 듣는 내 말에는 잡음이 없었다. 나는 네가 시각 장애인이라는 게 다행스러웠다. 너는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내 억양이나 말의 세기로 나를 알아갔다. 네 옆에서 나는 하나의 라디오가 되었다. 아니, 비로소 사람이 되었다.
“얘기 시작 안 할거야?”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재촉한다. 알았어, 시작 할게. 너는 히히 웃는다.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너에게 주파수를 마춘다.
36.5 메가헤르츠. 내가 알고 있는 가장 따뜻한 채널이다. 이 신호를 송신한다. 내 기지국은 지금 송수신이 원활하다.
소설 차하
목소리
고양 예술 고등학교
신혜정
화면에 환자의 붉은 목젖이 나왔다. 목이 많이 부어있었다. 여자가 타자를 치며 외운 듯이 말했다. 목감기네요. 밀가루 피하시고 따뜻한 물 많이 드세요. 일단 삼일치 처방해 드릴게요. 몸이 피곤한건지 여자의 목상태도 말이 아니었다. 치료가 끝났는데도 환자는 나갈 생각을 하지 않고 쭈뼛거렸다. 그런데요, 선생님. 이게 단순한 목감기가 아닌 것 같아요. 환자의 목소리는 끊길 듯 말 듯 작게 이어져 귀를 기울여 들어야했다. 여자는 환자를 쳐다보지도 않고 신경질적으로 밖을 향해 소리쳤다. 다음 분!
그렇잖아도 여자는 이제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는 식의 장난이 지긋지긋했다. 최근들어 그런 장난을 치는 환자들이 늘어났다. 그때마다 여자는 환자에게 냉정하게 얘기했다. 그게 진짜라면 정신과전문의를 찾아가는게 좋겠네요. 여자가 유난히 이 일에 대해 날카롭게 구는 것은 모두 남자때문이었다.
집에서 남자의 목소리는 공중을 부유했다. 유난히 작고 얇은 그의 목소리는 여자의 강하고 우렁찬 목소리에 밀려나갔다. 이제 초등학교 고학년이 된 아이도 남자의 말을 무시했다. 그의 존재는 목소리만큼이나 빈약했다.
남자의 목소리에 이상이 생긴 것은 그가 승진한 이후의 일이었다. 여보, 이번에 나 승진했어. 여느날과 같은 어느날, 퇴근을 한 남자가 넥타이를 풀며 말했다. 푸석한 얼굴이 피곤해 보였지만, 승진에 돼서 그런지 입꼬리가 슬쩍 올라가 있었다. 집에 오는 내내 여자의 반응을 기대한터라 남자는 한껏 희망에 부풀어있었다. 하지만 여자의 반응은 예상을 빗나가도 한참 빗나갔다. 세상에, 벌써 승진하면 어떻게 해? 희준이 아직 초등학생이잖아. 걔는 외고 갈 애라고. 계속 그렇게 승진하다간 희준이 대학도 입학하기 전에 퇴직하겠다. 신문을 뒤적이고 있던 남자는 여자의 말에 덜컥 겁이 났다. 여태껏 모아둔 돈의 액수를 계산해보니 아이의 유학은 꿈도 못 꿀 금액이었다. 승진을 하면 당장은 좋겠지만, 그만큼 올라갈 자리가 없어지고 버틸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다. 남자의 얼굴에 드리운 그늘이 한층 더 짙어졌다.
그 뒤로 여자는 틈만나면 돈 얘기를 꺼냈다. 지금처럼 여유로운 생활이 끝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에 더 조급해졌다. 여자의 목소리가 사납게 울려 퍼질수록 남자는 어깨를 웅크렸다. 여자 앞에만 서면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고 목소리는 더욱 가늘어졌다. 나중에는 퇴근길에서부터 목이 메어왔다. 남자가 말을 잘 이어나가지 못할 때면 여자는 인상을 확 찌푸렸다. 여자의 인상이 구겨지자 남자의 목소리가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어디에도 그의 말을 들어 줄 사람이 없었다. 마침내 남자는 목소리를 잃게 되었다.
여자는 남자의 태도에 화가 났다. 그가 분명히 일부러 말을 하지 않는 것이리라. 같이 살 방도를 찾으며 돈을 끌어모아도 모자랄 판에 그 안이한 태도가 눈에 거슬렸다. 그러다가도 남자의 힘없는 모기같은 목소리를 듣느니 그가 입을 꾹 다물고 침묵하는게 차라리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생각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남편은 집에 오면 서재에 틀어박혔고, 아이는 공부하라고 사준 PMP로 밥을 먹을 때도 이어폰을 귀에 끼고 고개를 까딱였다. 대답을 하는 이가 없으니 이번엔 여자의 목소리가 공중을 떠다녔다.
그러던 며칠전부터 여자의 목에 적색 신호가 떴다. 목이 부어오른 것 같고 목소리도 잠겨서 잘 나오지 않았다. 억지로 소리를 크게 내려고 하면 목구멍에서 무언가를 긁어내는듯한 소리가 났다. 오늘도 그랬다 .목이 아프다던 환자를 보내고 나서는 증상이 심해졌다. 진료를 해야 하는데 목소리가 속삭이듯이 나왔다.
간호사들과 점심을 먹고나자 목소리가 아예 나오지 않았다. 여자는 당황스러웠다. 목소리를 내려고하면 목구멍을 손톱으로 할퀴듯이 아플뿐, 소리는 절대 나오지 않았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며 종이에 적어 보여줘도 간호사들은 이런 장난도 할 줄 아냐며 웃어 넘겼다. 여자의 얘기를 진지하게 들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여자가 홀로 진찰실에 앉아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입 속에 카메라를 넣었다. 화면에 보이는 목젖이 아까왔던 환자보다도 더 붉었다. 여자는 아,하고 입을 벌렸다. 텅 빈 공기만이 몸통을 울렸다. 목소리가 혀끝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밖을 향해 삐꺽삐꺽 걸어나갔다.
수필 차하
목소리
고양예술고등학교 2학년 1반 김은선
아빠는 양파였다. 아빠에 대해 알아갈 때마다 눈이 맵고, 코가 시큰거렸다. 17년을 아빠 없이 살아오면서 뒷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없는 아빠로 싸움질을 했다. 얼굴에 상처를 달고 온 날, 엄마는 내 손을 끌고 근처 공원으로 갔다. 그리고 벤치에 앉아 아빠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빠는 엄마가 나를 가진 걸 알자 소리 소문 없이 사라져 버렸다. 엄마는 이웃집 흉을 보는 것같은 표정을 지었다.
느이 아빠, 말을 얼마나 더듬었는지. 고백 하는데 도대체 뭐라 말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는 거야. 그 양반은 군대에서 말 더듬는 걸로 많이 맞았을 걸. 그 점은 느이 아빠 닮았나 보다. 너도 발표 시키면 잘 못하잖아. 엄마는 뭐가 그리 웃긴지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내가 엄마의 손을 잡았다.
“징그럽게 뭐 하는 거야.”
내 손을 끌고 올 때와는 다르게 엄마는 손을 빼냈다. 나는 엄마의 손을 잡으려고 기를 썼다. 결국 지쳤는지 엄마는 가만히 손을 내줬다. 앞 뒤로 손을 흔들었다. 뭉툭한 엄마의 손을 잡고 있자 기분이 좋아졌다.
그날 이후, 나는 가끔 아빠의 목소리를 들었다. 잠이 오지 않아 천장을 볼 때나 홀로 집에 있을 때였다. 엄마 말대로 말을 어찌나 더듬는지 알아 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양파를 깐 것처럼 눈이 맵고, 코가 시큰거렸다. 그 뿐이었다. 아빠의 목소리는 내게 영향을 주지 못했다. 얼굴에 상처가 생긴 날, 없는 아빠는 그냥 없는이 되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 아빠와 닮은 진우를 만났다. 모든게 새로울 때 진우는 전혀 새롭지 않았다. 소심해서 말을 더듬는 버릇이 있다는 진우의 목소리는 익숙했다. 고등학생이 되었지만 아이들은 여전히 유치했다. 진우는 아이들에게 병신이라고 불렸다. 병신이라는 단어가 나를 쫓아 다니는 것 같았다. 늦은 하교 길에 진우는 아이들에게 둘러쌓여 맞고 있었다. 생각할 틈도 없이 나는 그 속에 섞여 들었다.
엄마는 전화기를 귀에 바싹 붙이고 연신 죄송하다는 말을 했다. 내게 맞은 아이의 코 뼈가 내려 앉았다니 할 말이 없었다. 전화기 너머 아줌마의 목소리가 얼마나 우렁찬지 내게까지 들렸다. 애비 없는 자식이라 그렇게 버릇이 없나, 라는 말에 엄마는 멈칫 했다. 손에 힘이 들어갔다. 엄마는 보이지도 않는 상대에게 허리 숙여 죄송하다 했다. 전화는 한참 더 있다 끊어졌다. 엄마가 한숨을 내쉬었다.
“엄마 방금 나를 아[바른말 고운말을 사용합시다.] 없어서 버릇 없는 자식으로 만든 거 알아?”
엄마에게 아빠는 아무것도 아니었고 당당하지 못할 이유가 아니었다. 한 때 연애했던 사이. 이게 엄마가 말하는 아빠였다. 그런데 지금, 엄마는 전혀 당당하지 못했다. 전화기 너머의 아줌마가 말한 ‘애비 없는 자식’은 양파 매운 내보다 못했다. 엄마는 손에 들린 구형 핸드폰을 세게 쥐었는지 뼈마디가 튀어 나와 있었다. 아무 말없이 집을 나서는 엄마의 어깨가 떨렸다.
밤이 늦도록 엄마는 돌아오지 않았다. 휴대폰은 꺼져 있지 않았으나 전화를 받는 것도 아니었다. 아빠의 목소리인지 진우의 목소리인지 모를 것이 나를 괴롭혔다. 나는 카디건을 집어 들었다. 집근처 공원은 한산했다. 공원의 제일 구석진 곳, 주황빛 가로등 아래 엄마가 앉아 있었다. 엄마에게 다가가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 음……. 자, 자요오?”
핸드폰이 들려주는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묻는다면, 그건 너무 쉬운 문제였다. 나는 엄마를 불렀다. 다행히 엄마는 울고 있지 않았다. 나는 핸드폰을 뺏어 들었다. 별 것도 아닌 음성메시지를 아직도 가지고 있는 엄마가 한심했다.
“열 받아서 연애할 때 주고 받은 거 다 버리니까 그것 밖에 없더라. 배 속에 있는 너한테 아빠 목소리는 들려줘야지 싶어서…….”
나는 엄마의 말을 더 이상 듣지 않고 삭제 버튼을 눌렀다. ‘삭제 하시겠습니까?’라고 묻는 건 시간 낭비였다. 확인 버튼을 눌렀다.
“필요 없거든요.”
나는 엄마 옆에 앉았다. 엄마의 어깨에 카디건을 걸쳐 주었다. 핸드폰을 바꿔. 내 말에 엄마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의 손이 내 손을 붙들었다. 뭉툭한 손은 여전히 기분 좋게 했다.
주황빛 가로등 아래에서 삭제된 아빠에게. 한 번만 더 그 목소리를 들려주면 양파 껍질을 날려 보낼 거야. 좀 매워 보라지.
수필 차하
목소리
고양예술고등학교 3학년 이예린
엄마는 오늘도 트럭 위에 올라선 채 한 손에 확성기를 들고 있다. 팬티를 한가득 들고 요란하게 호객 행위를 하는 모습은 언제나 그대로다.
“빤스가 세 장에 오천 원!”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온 동네로 퍼져 나간다. 나는 책가방을 든 채 트럭 가까이로 다가간다. 엄마가 나를 알아보고 손을 크게 흔든다. 나도 엄마를 향해 손을 흔들어댄다.
우리 집은 대대로 목소리가 아주 크다. 할머니, 엄마, 그리고 나에 이르기까지. 할머니는 시골 동네에서 큰 목소리로 노동요를 곧잘 부르셨고, 엄마는 교내 합창단에서 꾸준히 활동을 했다. 나 역시 큰 목소리 덕에 반장 일을 자주 하기도 했었다. 모두 다른 나이대였지만 우리 셋의 목소리는 꽤 비슷했다. 쩌렁쩌렁하고 울림있는 목소리. 전화 통화를 할 때면 아빠조차도 엄마와 나의 목소리를 헷갈려했고, 할머니는 다른 것은 몰라도 목소리 하나로 내 새끼 알아볼 수 있겠다며 호물호물 웃으시곤 했다.
아[바른말 고운말을 사용합시다.] 정년퇴임을 한 뒤 엄마는 트럭 장사를 시작했다. 시장 골목 어귀에서 속옷을 파는 일이었다. 엄마의 목소리 덕분에 장사는 꽤 잘되는 것 같았다. 스타킹이나 팬티, 양말과 브래지어들은 며칠 사이에 금방 사라졌고 엄마는 더욱 신이 나서 호객행위를 했다. 속옷더미 위에 올라서서 목소리를 쩌렁쩌렁하게 울려대는 엄마는 꼭 무대 위의 가수처럼 보이기도 했다.
엄마의 원래 꿈은 가수였다. 합창 단원이기도 했던 엄마는 어릴 적부터 주변에서 가수하라는 소리를 많이 듣기도 했다. 엄마는 심수봉 같은 가수가 되고 싶었다고 했다. 지금도 엄마는 장사를 하다가 흥이 날 때면 트로트를 구성지게 부르곤 한다. 트럭을 무대 삼아, 그리고 확성기를 마이크 삼아서 말이다. 손님들은 어느새 관객이 되고, 열심히 박수를 치기도 한다. 나 역시 지금까지도 포기하지 않고 진행 중인 엄마의 꿈을 응원한다.
처음에 나는 그런 일을 하는 엄마를 창피해했다. 동네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속옷장사를 한다니,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친구들과 함께 하교를 하다가 마주칠 때면 일부러 먼 길로 돌아가기도 했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나와 엄마의 목소리가 닮았다는 것이 거북하게 느껴졌다. 엄마의 높고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듣기 싫었고, 내 목소리 역시 엄마와 닮았다는 사실은 더 끔찍하게 여겨졌다. 나는 그 후로 장사를 하고 있는 엄마를 보아도 인사하지 않았고,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와도 말 한마디 건네지 않은 채 모른 척 하기 일쑤였다.
그런데 요즘, 집에 돌아온 엄마의 모습은 평소보다 훨씬 피곤해 보였다. 제대로 옷도 갈아입지 않고 잠에 들기도 했고, 코 고는 소리도 훨씬 커졌다. 말을 할 때면 목 안에 녹이 잔뜩 슨 것처럼 탁한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평소같지 않은 엄마의 모습에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요즘 무슨 일 있어?”
나의 물음에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잠시 뜸을 들이던 엄마는 피곤한 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으응. 요즘 우리 동네에 대형마트 하나 들어왔잖아. 그게 들어선 이후로 장사가 예전만큼 안 되네.”
나는 문득 숨이 멎었다. 나는 이제까지 엄마가 속옷장사를 하며 즐거워만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엄마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은 고민거리를 안고, 더 많이 힘들어했던 것이다.
“우리 딸, 너무 걱정하지마. 이 엄마가 더 큰 목리로 장사 더 열심히 해서 돈 많이 벌어올게.”
엄마는 다 순 목소리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나는 그 이후로 먼 길을 돌아서 집에 가지 않는다. 매일매일 딸의 모습을 보고 엄마가 힘을 냈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다. 엄마는 집에 가는 나를 발견할 때면 언제나 활짝 웃음을 짓는다. 모든 피로가 다 날아가버릴 듯한 그 웃음에,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다. 나는 엄마를 향해 힘차게 손을 흔들고, 호객행위를 하는 엄마의 목소리는 더욱 더 커져간다. 기분 좋은 음성이 온 동네로 멀리멀리 퍼져나간다.
나와 꼭 닮은, 엄마의 목소리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