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1회 전국 고교생 문학 콩쿠르 수상작
등록일 2015-06-26
작성자 학과관리자
조회 3901
시 장원
문자메세지
영생고 3학년 양수현
초원을 바라보는 몽골인에게도
때론 보이지 않는 메시지가 있다
먼 곳을 당겨오지 못하는 여자
몽골의 초원에 양떼를 풀어 놓고
아직도 아버지는 마두금을 켜고 있을까
나오지 않는 낯선 말처럼
손아귀에 잡힌 핸드폰이 고요하다
까만 밤하늘 아래 누워 있으면
가끔씩 은하수가 떨어지기도 했다고
고향 얘기로 베갯잇이 젖는 줄도 모르는 여자
강보에 싸인 아기는 아직 엄마의 메시지를 알지 못한다
먼 곳을 보기 위해선 때론 뒤로 물러나야 한단다
몽골의 밤하늘처럼 까만 핸드폰 액정 속 수 많은 문자메세지
등을 토닥여주던 아버지의 손길을 따라
여자는 졸린 눈을 깜박인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 사이
얼만큼 물러나야 선명한 메시지를 볼 수 있을까
닿을 수 없는 거리 속
핸드폰을 쥐고 시간을 되감아 보는 여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고향을 가슴에 품고
보이지 않는 문자메세지 하나,
기다리고 있다
시 차상
문자메세지
안양예고 3학년 최은진
쇠똥구리는 풀의 언어를 굴릴 줄 안다
축축히 젖은 쇠똥을 굴린다 한낮의 태양마저 굴린다
날개에 묻은 바람의 모음과 자음을 잘게 부순다
소똥의 내부가 둥글게 파이고,
쇠똥구리의 그림자도 하나의 글자로 굴러간다
나는 쇠똥구리를 닮은 사내를 본 적이 있다
대형마트, 간이 수선집에 앉아있는
저 남자는 하루종일 실밥을 굴리며
옷들의 닳아버린 문자를 읽는다
유행을 입다가 버려진 바지와 자켓들은
사내의 재봉틀 앞에서 새로운 이모티콘으로 굴려진다
줄 곧 땅의 언어를 수신하듯
일사분란하게 따움표를 받아대던 재봉틀 바늘 속에
초침과 분침의 날카로움마저 둥글게 기워넣는다
쇠똥구리는 목때 묻은 더러움을 좋아한다고 했다
벤젠으로 찌든 얼룩을 씻어내지만
수선집에 갇힌 쇠똥구리의 하루는 씻어내지 못했다
세탁기 속에서 물 긷는 소리가 날 때
풀섶에서 똥을 굴리던 기억으로
남들이 벗어놓은 허물마저 사랑하는 쇠똥구리
나는 조용히,
그가 매만지는 초록의 문자 메시지를 받아 적고 있었던 거다
시 차하
문자메세지
서울무학여고 3학년 김세인
말매미의 울음은 가속페달을 밟고 있다
들녘이 말라간다 웅덩이도 말라간다
웅덩이 속에 사는 우렁이와 달팽이도 말라간다
말매미의 기원은 굼벵이로부터 쓰여진다
지평선 이쪽과 저쪽으로부터의 촉촉함을
몸 안에 켜켜이 채우고 꽃잠을 자는 굼벵이들
곡을 남기기 위해
묘지 위로 부풀어 오르는 잔디밭을 걷는 것이다
바람이 칼칼하게 어두워지는 초가을
느티나무 그늘 밑에는
울음을 뱉지 못한 말매미들이 다시 반짝일 날개로 물결을 이룬다
단풍이 번지는 시간 속에는 말매미의 울음이 스며있다
가을은 가장 빠르게 공중을 비워나가는 것이다
나무에 붙어 말라 죽은 말매미들은 울음의 흔적을 지닌 문자이다
왕거미들도 더 이상 그물을 치지 않는다
말매미는 자신의 몸으로 느티나무에게 문자메세지를 새기는 것이다
그러니까 말매미의 울음으로 느티나무의 외로움을 읽지 말자
시 차하
문자메세지
광영여고 3학년 류지연
입에서 입으로 부패한 쓰레기를 주고 받았어요
딸의 머리위를 빙빙도는 파리를 응원했죠
학교에 가는 내낸 검은가래를 뱉으면서 가겠대요
이가 뽑혔으면 좋겠어요, 충치를 치료해줄 돈도 없어요
입술에 걸쳐있던 음식물 쓰레기를 목뒤로 넘길게요
딸이 놓고 나간 욕설들을 주워담아요
오늘 저녁은 욕을 먹일거거든요
밥통에 욕을 부으려는데 문자가 왔어요
처음 받아보는 사과일걸요
전화기가 꺼져있어요
이가 뽑혀서 전화를 못 받나봐요
오늘따라 딸이 좀더 늦네요
사람들이 딸의 몸은 지하철에서 없어졌다고 하더군요
욕이 들어있는 바구니를 선물로 줬어요
폐를 움켜쥐는 까만 연기들을 막을 수 없었을거라고
내 딸은 남자친구도 없어요
붉게 물든 지하철에서 녹아내리는 딸의 얼굴이라도 볼래요
부서지는 딸의 손가락이라도 주세요
발가락이라도 좋아요, 딸의 살점을 볼래요
내 딸은 원래 지각이 잦아요
뉴스에 딸이 나와요! 어서오렴.
나는 아직도 밥을 먹지 않았단다
우리들은 대구에 살아요
대구의 지하철은 아직 잘 다니고 있어요
오늘도 딸이 조금 늦네요
「엄마미안해」
개인보관함으로 옮겨주세요
소설 장원
퀵 문자메세지
안양예고 3학년 이상희
김씨의 ‘핸드판’에 새로운 휴대전화가 붙은 것은 지난 금요일이었다. 그날은 아들이 훈련소에 입소한 날이기도 했다. 아들 내일 군대 갑니다. 원체 무뚝뚝한 녀석이라 전화 한 통 하는 법없는 아들이엇따. 뚝뚝함이 묻어나는 말투였지만, 난생 처음 받아보는 아들의 문자메세지에 김씨는 조금 들뜬 마음이 되었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머리를 바싹 깎은 것도, 식탁에 고기 반찬이 잔득 올라온 것도 이해가 되었다. 그날 저녁, 김씨는 한우 등심을 잔득 사서 집으로 돌아갔지만 아들은 집에 없었다.
“빨리도 오셨수, 손에 든 건 또 뭐예요?”
김씨는 부랴부랴 아들의 문자메세지를 확인해 보았다. 아뿔사, 어제 온 문자였다. 퀴익써어비스으? 웃기고 있네. 아내의 핀잔에 김씨의 등줄기로 땀이 흘렀다.
김씨는 퀵서비스 오토바이 기사였지만, 가족에게는 완행 열차같은 사람이었다. 더러는 결항된 항공기가 더 잘 어울리기도 했다. 아들의 문자메세지만 해도 그랬다. 퀵아저씨들끼리 ‘핸드판’이라고 부르는 플라스틱 판에는 스마트폰과 단말기를 세 개나 붙여놓았으면서, 정작 가족들과 연락하는 것은 낡은 휴대전화였다. 세 개의 스마트폰에 각각 다른 어플리케이션을 띄워놓고 남들보다 빨리 주문을 잡는 것이 김씨의 일이었다. 물론 일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지정된 장소에서 물건을 싣고, 다시 지정된 장소까지 배달해 줘야 했다. 임금은 턱없이 적지만, 그래서 더 빨리 움직여야 해다. 악순환이다. 자연히 가족의 안부는 뒷전이 되어 무소식이 희소식이려니, 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김씨가 이 구구절절한 변명을 끝내기도 전에, 아내의 성화가 다시 시작되었다.
“그래서 지금 잘 했다는 거야? 에라이, 고기나 사오지 말든가, 이 등심같은 인간아!”
아내는 김씨의 핸드판에 낡은 휴대전화를 무작정 붙였다. 거, 자리가 없잖아…… 하는 김씨의 목소리는 가볍게 무시당하고 말았다. 결국 핸드판에는 네 개의 휴대전화들이 자리를 잡았다. 당신은 말여, 문명의 이이기를 이용으을 좀 하한 말이여어. 아내는 몹시 화가 날 떼에만 말끝을 늘였다. 김씨는 두 손으로 핸드판을 꽉 붙잡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잘못했어, 하고 사과하는 것도 잊지 않고.
어쨌든 김씨는 배달을 계속했다. 남들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단말기로 전송된 일감들을 오토바이 뒤에 차곡차곡 싣고 나면 100킬로그램은 가뿐히 넘기기도 했다. 앞바퀴 들리겠는데, 하고 김씨가 염려하면 정말 앞바퀴가 들렸고, 이거 터지겠는데, 하면 정말 터졌다. 그 정도야 늘 있는 사고였다. 대형 사고는 아들이 군대에 입대한 지 사 주째 되는 날 일어났다. 전라도에서 온 꽃게를 배달하고 돌아오는 길, 요란하게 전화벨리 울렸다. 꽃게 다 어디 갔어요? 여자의 새된 목소리에 김씨는 당황했다. 예에? 꽃, 게, 말이예요. 다 없어졌다구요. 김씨는 그제야, 스티로폼 상자의 한 쪽 테이프가 모조리 떨어진 것을 기억해냈다. 급하게 배달하는 바람에 뚜껑이 조금 열리기라고 한 모양이었다. 설마 도망가겠어, 김씨는 생각했었다.
“어쩐지, 아파트 앞에 집게발 ?인 꽃게들이 몇 마리 돌아다니더라구요.”
“저어, 손님이 집 앞에 두고 가라고 하셔서 시키는 대로 했는데요.”
“그럼 난 어디서 보상 받아요? 엄연히 배달 실수잖아.”
노발대발하며 클레임을 걸겠단 말에 김씨는 꽃게 값을 고스란히 변상해 주겠다며 여자를 달랬다. 안 그래도 빡빡한 데, 괜히 빌미를 잡혀 잘리고 싶지 않았다. 결국 김씨의 하루는 완전히 꼬여버렸다. 가까운 은행에서 돈을 입금해주고, 배달은 밀려 저녁을 굶을 수 밖에 없었다. 녹초가 되어 집으로 돌아가는 길, 아내에게서 문자메세지가 도착했다. 등심. 김시는 마트에서 등심을 사 집으로 돌아갔다. 여지고 배달, 저기도 배달, 모두들 김씨를 부려먹지못해 안달이 난 사람들 같았다.
대체 십만 원은 또 어디 쓰려고 인출한 거냐며 귀신 같이 캐묻는 아내에게 대충 얼버무린 김씨는 소파에 누워 텔레비전을 보는 아들의 모습에 화들짝 놀라 손에 든 등심을 툭 떨어뜨렸다.
“너 왜 여기 있니?”
아들은 심드렁하게 “저 공익이에요” 하고 대답했다. 훈련소만 다녀온 거예요. 모르셨어요? 저번에 멀티 메일로 보냈는데…… 김씨는 후다닥, 문자메세지를 다시 열어보았다. 맨 밑에 ‘멀티 메일 다운로드’가 쓰여 있었다. 김씨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등심 구워 먹자, 했다. 세 가족이 모두 모여 구워먹는 소고기 등심은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김씨는 오늘도 오토바이를 달린다. 네 개의 휴대전화가 달린 핸드판을 들고, 누구보다 빠르게, 문자메세지도 제대로 읽을 줄 모르고, 꽃게를 다 풀어주는, 여러 등심 같은 그는 퀵서비스를 하는 완행 아버지다.
소설 차상
문자메세지
신도림고 3학년 강예송
영숙 씨는 콩나물국을 끓였다. 칼칼한 맛을 낸답시고 청양 고추를 잔뜩 썰어 넣었는데 간은 멎지 않고 알큰하기만 하니 참으로 기형적인 맛이었다. 식탁엔 자질구레한 반찬이 널려 있다. 계란 후라이는 노른자가 터져 걸쭉한 잡탕의 난장으로 뵌다. 기어코 콩나물국에 소금을 치긴 했으나 하도 들입다 붓는 바람에 소금국이 되고 말았다. 영숙 씨는 물을 부을까 심각하게 고민하다 결국 그냥 내어놓았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영숙 씨는 가족 전체에게 문자메세지를 보냈다. 식탁으로 오세요, 여러분.
그러나 어느 방에서도 움직이는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영숙 씨는 다시끔 문자를 보냈다. 하지만 기척이 없는 것은 여전하다. 잠자코 기다리다 못한 영숙 씨는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가장 먼저 안방 문을 열어제꼈다.
성호 씨는 TV를 보고 있었다. 아니, 잠을 청하고 있었다. TV의 요란한 웃음소리를 자장가삼아 아내가 옆에 있는 줄도 모르고 비몽사몽 눈꺼풀 밑을 헤매고 있는 것이다. 영숙 씨는 기가 막혀 성호 씨를 흔들어 깨운 뒤 문자를 보냈다. 저녁 차린다고 기다리랬더니 뭘 벌써부터 퍼질러 자고 있어요! 성호 씨는 머리 맡을 더듬어 안경을 찾은 뒤 차근차근 답장을 했다. 졸리면 잘수도 있지, 뭘 그런 걸 가지고…. 액정을 누르는 영숙 씨의 손가락에는 거침이 없다. 잔말라고 식탁으로 가요! 성호 씨는 뭉기적뭉기적 몸을 일으켰다. 영숙 씨는 석우의 방으로 단걸음에 내달았다.
석우는 영숙 씨가 끔찍이도 싫어하는 총게임에 몰입해있다. 여기저기 쏘다니다 상대방을 발견하지만 하면 무참히 총을 갈겨대고 남는 건 핏자국밖에 없는 게임을 즐기는 이유를, 영숙 씨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석우의 휴대폰은 침대에 덩그러니 놓여있고, 석우는 귀레 헤드폰을 끼고 있다. 폭탄이 터져서 자기 캐릭터가 죽자 상소리도 서슴치 않는다. 여숙 씨는 도저히 더는 못 보겠다는 듯 컴퓨터의 코드를 뽑았다. 석우는 천재지변이라도 일어난 듯한 표정으로 뒤를 쳐다보다 영숙 씨의 손에 들린 자신의 휴대폰을 낚아챘다. 석우의 손가락이 흥분으로 미세하게 떨린다. 아ㅏ 엄ㅁ마 왜 ㅈ진짜 자기 맘대ㅜㄹ 컴퓨터 끄는데. 영숙 씨는 석우와 달리 차분하게 답장을 보냈다. 네가 나오랄 때 나왔으면 이런 일 없었지. 잔말라고 저녁먹으러 나와. 석우는 분을 주체할 수 없는 듯 침대를 계속 걷어찼다. 영숙 씨는 유유히 빠져나와 세희의 방으로 발을 옮겼다.
세희는 침대에 엎드려 통화를 하고 있었다. 아양섞인 목소리를 들어보니 며칠전에 생겼다던 남자친구가 분명해 뵌다. 영숙 씨가 들어온 줄도 모르고 뭐가 그리도 좋은지 입꼬리에 미소가 떠나질 않고 시시때때 벽까지 쳐가며 박장대소를 한다. 영숙 씨는 메시지를 보냈다. 꼴깝을 떤다. 그러나 세희는 문자가 온 줄도 모르고 통화 삼매경이다. 영숙 씨는 세희의 휴대폰을 낚아챈다.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고 보니 통화 시간이 한 시간을 훌쩍 넘겼다. 세희가 표독스러운 표정을 하고 영숙 씨 손의 휴대폰을 뺐는다. 곧이어 영숙 씨에게 문자가 왔다. 아, 왜 중요한 얘기 하고 있는 때 끊는데! 왜 맨날 엄마 멋대로야. 영숙 씨는 답장을 하는 대신 또 다시 세희의 휴대폰을 뺐었다. 식탁 위에 그것을 올려놓자 세희는 짜증난다는 듯 거친 동작으로 의자에 앉았다. 멀뚱멀뚱 앉아있던 성호 씨가 젓가락을 집어들었다. 식사가 시작됐다.
다들 깨작깨작 밥을 먹는다. 젓가락질이 전부 시원찮다. 제일 심한 것은 세희였다. 세희는 밥알을 한 톨씩 먹고 있었다. 영숙 씨는 즉시 세희에게 문자를 보냈다. 제대로 좀 먹어라. 세희는 답장은 않고 인상만 찡그린다. 식사는 여전히 한 톨 한 톨이었다.
성호 씨가 힐끔힐끔 영숙 씨의 눈치를 본다. 한참을 그러던 성호 씨는 식탁 밑으로 슬며시 휴대폰을 꺼냈다. 성호 씨는 DMB를 실행한다. 작은 액정 속에서 야구 경기가 흘러나온다. 성호 씨는 밥을 먹는둥 마는둥하며 소리없는 경기에 몰입했다.
세희는 메신저 어플을 실행했다. 그리고 남자친구와 메시지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영숙 씨가 이를 눈치채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영숙 씨는 곧바로 문자를 보냈다. 아까 한찬 했으면 됐잖니. 식탁에선 밥 좀 먹으렴. 그러나 세희의 휴대폰엔 문자가 온 기색이 없다. 세희는 여전히 남자친구와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다. 영숙 씨는 이상하단 생각이 들어 세희의 휴대폰을 뺐었다. 확인해보니 스팸차단목록에 영숙 씨의 번호가 올라와있다. 영숙 씨는 기가 막혔다. 목록에서 번호를 해제한 뒤 세희에게 돌려주었다. 다시 보낸 문자는 올바르게 전송되었다.
아니, 어떻게 엄마 번호를 차단할 생각을 했니? 엄마가 보내는 문재는 다 헛소리다, 이거야? 엄마가 맨날 자기 고집만 부리니까 그렇지. 엄만 남의 사정도 좀 헤아릴 줄 알아야 돼. 뭐 사정? 남자친구랑 시시덕대는 게 퍽이나 중요한 사정이겠다. 봐봐, 엄만 들을 생각도 안 하고 있잖아. 중요한 일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고 아까부터 몇 번을 말해? 넌 뭘 잘했다고 아까부터 계속 그렇게 당당하니? 밥상머리 앞에서 하지 말란 일 엄마 말 무시하고 스팸차단해놓고 계속한 게 그리도 자랑이야? 왜 자꾸 나만 가지고 그래? 아빠는 나보다 먼저 핸드폰으로 TV보고 있었는데? 아빠랑 너랑 같니?
세희의 손가락이 더욱 빨라진다. 영숙 씨 역시 밥먹는 것도 그만두고 두 손으로 두들기고 있다.
그럼 아빠랑 나랑 뭐가 다른데? 아빠는 식탁에서 맘대로 핸드폰해도 되고 나응 그러면 안돼? 그런 억지가 어딨어. 아니, 애초에 왜 아빠를 걸고 넘어졌니? 아빠는 아빠고, 너는 너지. 아[바른말 고운말을 사용합시다.] 뭘 했든 니가 잘못했단 사실은 변하지 않잖아? 왜 차별을 두는 건지가 궁금한 거지. 봐, 엄마는 또 제멋대로 잖아.
그 순간, 성호 씨가 휴대폰을 꺼내들고 모녀에게 문자를 보냈다. 그만 좀 해, 언제까지 계속 할건데? 그 뒤로는 화난 표정의 이모티콘이 잔뜩 붙어있다. 세희는 마뜩찮은 표정으로, 영숙 씨는 건조한 표정으로 휴대폰을 집어넣었다.
한동안 다시 정적 속에 젓가락질이 오갔다. 숟가락을 집어든 성호 씨는 콩나물국을 한 숟가락 떠먹고 미간을 찌푸렸다. 영숙 씨에게 문자를 보낸 것은 거의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여보, 국이 너무 짜다. 영숙 씨는 슬며시 몸을 일으켜 냉장고 앞으로 갔다. 돌아오는 그녀의 손에는 1.5L들이 생수병이 들려있다. 누가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영숙 씨는 그것을 성호 씨의 콩나물국에 부어버렸다. 모두가 우두커니 국그릇이 넘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소설 차하
문자메세지
고양예고 3학년 김지민
엄마의 손을 잡고 들어온 사내는 별 볼 일 없는 한량이었다.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술을 마시고 흥에 겨워 엄마의 품 안으로 픽 쓰러지는 것뿐인, 동네 양아치. 그럼에도 엄마는 사내를 꼭 안아주었고, 그러면서 ‘괜찮다’는 말을 연신 반복했다. 몇 달 뒤, 사내는 계부가 되었다. 엄마는 계부와 팔짱을 낀 채로 이제야 제 반쪽을 찾았다며 해사하게 웃었다. 그 웃음 때문에, 나는 속옷 안으로 들어오는 계부의 손을 차마 뿌리치지 못했다. 아무 말도 하지마. 말하지 마. 네 엄마 나 때문에 미쳐 날뛰는 꼴 보고 싶지 않으면, 입 다물어. 계부는 주문을 외듯 내 귓가에 대고 끊임없이 그런 말들을 중얼거렸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계부는 신고 있던 양말 한 짝을 벗어 내 입에 쑤셔 넣었다. 내 입에선 계부의 발냄새가 났고, 내게선 그보다 더한 냄새가 났다.
그날 이후, 나는 말을 하지 못했다. 말을 하려 입을 열어도 입에선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내가 일주일 때 말이 없자, 엄마는 나를 데리고 병원에 갔다. 물론 계부도 함께였다. 계부는 제 손으로 직접 번호표를 뽑았으며, CT 촬영을 하러 가는 길엔 충실한 개처럼 내 뒤를 졸졸 쫓았다. 나는 형용할 수 없는 살의에 사로잡힌 채로 눈부신 터널을 지났다. 의사는 내 뇌 사진을 가리키며 아무런 이상이 없다고 했다. 실어증의 구십 퍼센트가 뇌졸중에 의해 발병되는데, 이런 경우엔 정신적인 문제일 가능성이 높다며 제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결국 나는 정신과로 걸음을 옮겨야 했다. 정신과의 여의사는 엄마와 짧은 상담을 마친 뒤, 빠르게 진료 챠트를 써내려 갔다. 그 다음엔 내 손을 꼭 붙잡으며 일주일에 한 번씩 심리 치료를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간호사를 따라 간 심리 치료실엔 상담자로 보이는 중년의 아줌마가 서 있었다. 상담사는 내 안부를 물은 뒤, 현재 내 심리 상태를 그림으로 표현해보라고 했다. 나는 한 손에 크레파스를 쥔 채 묵묵히, 그러나 계부가 내게 한 짓이 드러나지 않게끔 그림을 그렸다. 그림은 언제나 기괴한 형상을 하고 있었다.
계부가 사라진 건 심리 치료를 하기 시작한 지 삼주 째 되는 날의 일이었다. 열 평 남짓한 집 안에서 계부의 짐이나 흔적은 물론 머리카락 한 올 조차 나오지 않았다. 엄마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방 한 구석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나는 그런 엄마를 가만히 지켜보다가 이내 휴대폰을 꺼내들어 문자메세지를 작성했다.
‘엄마, 괜찮아. 아버지는 꼭 돌아올거야.’
나는 화면 위에 떠오른 문구를 오래도록 바라보다가 전송 버튼을 눌렀다. 엄마는 멍하니 앉아 있다가 곧 휴대폰을 확인했다. 엄마의 얼굴이 전차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엄마는 어린애처럼 서럽게 울다가 내게 엉금엉금 기어와 미안하다는 말을 끊임없이 반복했다.
나는 계부가 떠난 집안을 허망하게 둘러보았다. 계부는 떠났지만 계부의 목소리는 여전히 이곳에 남아 있었다. 눈감고 입 다물어. 평생 그렇게 조용히, 뒤 죽은 듯이 살아. 평생, 나는 눈을 감고 귀를 틀어막았다. 여전히 계부와 함께 있는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계부는 아직 내 안에 남아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아마 나는 죽을 때까지 계부를 끄집어 내지 못하겠지. 그 무렵, 엄마는 독한 향수를 뿌리기 시작했다.
상담사는 내게 말도 부패한다고 했다. 가방에 든 우유처럼 무엇이든 오래 내버려두면 썩고 썩어서 결국에는 터져버리고 말 것이라고. 그러니까 살고 싶으면 무슨 말이든 뱉어내보라고. 나는 죽고 싶지 않아서 필사적으로 말을 해보려 했지만 입에선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목구멍에 검고 응어리 진 타르 덩어리가 달라붙어 있는 느낌이었다. 엄마는 소리없이 꺽꺽대는 나를 보며 조용히 눈물을 흘렸고, 나는 엄마의 눈물이 정말이지 싫어서 어떻게든 말을 해보려 했다. 목구멍에 손가락을 집어넣어 그 언저리를 마구 헤집거나 가슴을 두드리면서……. 그러나 나오는 것이라곤 한 줄기 눈물뿐이었다. 상담사는 정 말이 안되겠으면 글을 쓰라고 했다. 나는 상담사의 말대로 무엇이든 좋으니 닥치는대로 끼적거리기 시작했다. 문자 메시지 창을 띄워 자판을 치거나 연필로 글을 썼다. 그때 그때 생각나는 것들을 마구 써내려 갔고, 그러는 손의 속도는 미처 생각의 속도를 쫓아가지 못했다. 자판을 치기가 버겁거나 글을 쓸 종이가 없어질 무렵엔, 벽에다가 글을 써내려 갔다. 어느새 나의 끼적거림은 벽에 들러붙어 계속해서 무엇인가 써내려 가는 나를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러는 엄마는 언제나 독한 향기를 내뿜는 채였다.
글자에 묻혀 검게 변한 벽에 기대어 깜빡 잠이 들었다. 어째선지 벽 너머에선 누군가의 말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나는 벽에 가만 귀를 갖다댔다.
“미안해. 내가 미안해. 잘못했어. 용서해줘. 다신 안 그럴게. 딱 한 번이었다. 당신 나 사랑하잖아. 사랑해. 살려줘. 미안…….”
벽 너머의 목소리는 계속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그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울컥 눈물이 차 올랐다. 나는 서럽게 울며 벽에 몸을 좀 더 밀착시켰다. 벽 너머의 목소리를 쓰다듬으며, 벽 위의 내 중얼거림을 훑으며……. 문득, 나는 표정을 굳히고 벽에서 멀찍이 떨어졌다.
벽에서 악취가 진동하고 있었다. 나는 벽과 멀리 떨어져 벽을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검고 꼬부라진 글자 뒤에 내가 알지 못하는 엄청난 비극이 숨겨져 있을 것만 같았다. 엄마는 집안을 돌아아니며 향수를 뿌렸고, 내 관심을 돌리기 위해 무던히도 애썼다. 그러나 나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주인집 할머니는 코를 킁킁대며 빌라 여기저기를 돌아다녔고, 할머니의 발걸음은 매번 우리 집 문 앞에서 멈춰 섰다.
“문 열어! 이거 안 열어?”
할머니는 밤낮으로 우리 집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엄마는 절대로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참다 못한 할머니는 비상 열쇠로 문을 땄고, 열린 문틈으로 반쯤 넋이 나간 엄마와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걸쇠는 단단히 잠겨 있었다. 집안에 들이닥친 경찰관들은 차마 눈조차 뜨지 못했다. 이내 한 경찰관이 악취의 근원을 찾기 위해 코를 킁킁대기 시작했고, 벽 앞에 가서 걸음을 멈춰 세웠다. 그 모습을 본 엄마는 사나운 짐승처럼 벽 앞을 막아 섰다. 그때 해머를 든 경찰관이 집안으로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엄마는 자리에 풀썩 주저앉아 조용히 어깨를 떨었다. 내 앞으로 기어온 엄마는 나를 자신의 품안에 가둔 채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눈 감고, 귀 막아. 아무것도 보지 말고 듣지도 마. 다 괜찮아, 내 딸. 정말 다 괜찮아. 내일은, 내일은 다 잘 될거야. 나는 부를 몸을 떨었다. 쿵, 쿵, 쿵. 엄마의 목소리와 대조되는 커다른 굉음이 연신 내 귓가를 때렸다. 시멘트 가루가 바닥으로 와르르 쏟아져 내렸고, 나는 엄마의 벌어진 손가락 사이로 벽 너머를 볼 수 있었다. 그 안엔, 계부가 있었다. 계부는 사라지기 전날과 똑같은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다만 양말 한 짝이 벗겨져 있을 뿐. 계부의 옆엔 짐이 든 가방과 살인에 쓰였던 망치와 피묻은 걸레 같은 것들이 함께 있었다. 경찰관들이 엄마의 손목에 수갑을 채웠다. 엄마는 이번에도 역시, 울고 있었다. 서럽게 우는 엄마를 쫓아 경찰차 앞까지 달려 나갔다. 동네 주민들이 우리를 구경하고 있었다. 엄마는 끝까지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러면서 숟가락으로 밥 퍼먹는 시늉을 하며, 밥 먹어, 밥 꼭 챙겨 먹어야 돼 하고 입모양으로 중얼거렸다. 나는 여신 고개를 끄덕이며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엄마에게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문자 메시지를 보내기 위해서 였다.
‘나는 괜찮아. 나는 진짜 괜찮은데. 엄마…는’
나는 거기까지 쓰고 휴대폰을 떨어뜨렸다. 내 안에서 무언가 나오려고 하고 있었다. 나는 목구멍에 손가락을 집어 넣어 그 주위를 매만지다가 이내 힘주어 기침했다. 켁, 하는 소리와 함께 입에서 무언가 튀어 나왔다. 그건, 계부의 양말이었다. 휴대폰 위로 눈물 한 방울이 톡 떨어졌다.
소설 차하
하나뿐인 당신에게, 안녕?
고양예고 2학년 이정문
2013/ 4/ 18/ 오후 10시 01분
- 안녕? 당신을 위해 새로운 휴대전화를 개통했어요. 전화번호부엔 당신의 이름밖에 없네요.
- 안녕하세요? 하지만 당신의 말을 들어줄 사람은 저뿐이니 번호가 제 것 하나밖에 없어도 괜찮아요.
- 그렇겠네요. 이렇게 문자한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제 고민을 들어주셨으면 해서요.
- 네. 말씀해보세요. 이렇게 제게 고민을 털어놓아주시다니, 기쁘네요.
- 저, 그 새끼를…… 그 새끼를 만났어요. 제 입술에 침을 뱉었다던 고등학교 동창 그 새끼요.
- 아, 당신은 못견딜만큼 괴롭혔다던? 같은 대학에 다니는 건가요?
- 네. 절 전학가게 만든 원흉인……. 대학교 OT에는 오지 않았었는데, 개강하고 강의실에 가니 [바른말 고운말을 사용합시다.]가 있었어요.
- 아아, 어떻게 그런 일이…….
- 끔찍하죠? 절 보고 입꼬리가 말려올라가는 그 새끼 얼굴을 봤을땐 정말이지 울고 싶었어요.
- 괜찮아요? 많이 힘들죠.
- 걱정해주는 사람은 당신뿐이네요. 고마워요. 하지만 아니나다를까 [바른말 고운말을 사용합시다.]가 다른 사람들에게 말한 것 같아요.
- 고등학교때의 일을요? 아니면 당신이 게이라는 것을요?
- 둘 다요……. 전 이제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어요. 자판을 치는 이 순간에도 몸이 떨리고 땀이 나서 미칠 것 같아요. 해결책을 원하는게 아니에요. 누군가 들어줬으면 해서…….
- 힘을내요. 당신은 잘 버틸 수 있을 거예요. 당신을 믿어요…….
- 고마워요…….
2013/ 4/ 21 오후 4시 30분
- 오늘은 제가 커피잔을 들어올렸는데 [바른말 고운말을 사용합시다.]가 제 손짓이 계집애같다고 한참을 웃었어요, 그것도 아주 크게.
- 힘내세요. 그런 놈릉 무시해요. 당신을 응원해요.
2013/ 4/ 30 오후 7시 30분
- 저, 사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어요. 그 사람은 저를 게이라고 동정하지도, 괴롭히지도 않아요. 같은 교양수업을 듣는데, 가끔 캔커피도 사줘요.
- 아 정말 잘되었어요! 그 사람에게 의지해봐요. 그 사람은 분명 당신을 도와줄 거예요.
- 아녜요……. 그 사람은 누구에게나 친절한걸요. 전 그에게 특별한 사람이 아니예요.
- 그래두요, 꼭 좋아하는 감정 뿐만이 아니라 친구로 친하게 지낼 수 있는 거잖아요.
- 그런가요? 심란하네요. 어쨌든 내 얘기 들어줘서 고마워요.
2013/ 5/ 6 오후 9시 10분
- 정말 [바른말 고운말을 사용합시다.]를 죽여버리고 싶어요.
- 왜그래요, 무슨 일이에요! 말해봐요.
- 공강시간에 저는 제가 좋아하는 그와 캠퍼스에서 산책하고 있었어요. 여러 이야기를 많이 했고 분위기가 참 좋았어요. 근데 [바른말 고운말을 사용합시다.]가 우리에게 와서는 그의 팔을 잡아당기며 데려가는 거예요.
- 아니, 도대체 왜요?
- 그냥 제가 싫은거겠죠. ‘야, 저새끼랑 같이 다니지 마. 너도 물들라’
[바른말 고운말을 사용합시다.]가 그를 데려가며 한 말이에요.
- 정말 [바른말 고운말을 사용합시다.]는 구제불능이네요!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우울해하지도 말구요. 전 당신 편이에요.
2013/ 5/ 11 오후 5시 18분
- 제가 좋아하던 그가 저를 피하기 시작했어요. 이렇게 될 줄 예상은 했지만……. 죽어버리고 싶어요.
- 기분 탓일지도 몰라요. 너무 슬퍼하지 말아요. 당신은 잘 해나갈 수 있어요. 뭐든지요!
- 그럴까요……. 고마워요.
2013/ 5/ 17 오후 11시 45분
- 이게 당신에게 보내는 마지막 문자메세지가 될 것 같아요. 오늘 저녁, 자취방에서 나와 캠퍼스에서 산책하고 있었어요. 분수대 주변을 걷고있는데 벤치쪽에 두 사람의 실루엣이 보이더라구요. 좀 더 가까이 다가갔는데, 벤치에 있는 사람은 다름아닌 그였어요. 제가 사랑했던 그요. 옆에는 한 여자와 함께 있었어요. 전 멍하니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어요.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그의 얼굴과 여자의 얼굴이 포개졌어요. 두 사람의 얼굴이 떨어진 후, 그는 여자에게 사랑스러운 어투로 말했어요. ‘며칠 후면 성인식이야. 그리고 성인식엔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유의 키스를 선물해 주는거야. 방금처럼.’ 그의 말을 듣고 저는 끝없는 갈망을 느꼈어요. 자유에 대한 갈망을요. 전 아마 지금도 성인식 후에도 그것을 누릴 수 없겠죠? 그걸 생각하니 죽고 싶다는 것 외엔 다른 생각이 들지 않네요.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것 같아요. 사랑하고 고마웠어요, 재석씨.
- 재석씨 그동안 잘 버텼어요. 사랑해.
- 재석씨, 재석아, 마지막까지 내 옆을 지켜주는건 나인 너뿐이구나. 안녕! 다음 생에선 행복하자, 재석아. 나, 너, 나인 너, 너인 나, 나인 모두.
2013/ 5/ 20 오전 12시
- 개통되지 않은 기기이므로 메시지를 보내실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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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장원
문자 메세지
고양예고 3학년 김우영
엄마가 손을 크게 흔들며 집을 나섰다. 여섯시 사십분. 엄마는 고등학생인 나보다 일찍 집을 나선다. 나는 식탁 위에 올려놓은 휴대폰을 들었다. ‘카카오톡’이라고 적힌 어플에 손을 가져가다 말았다. 엄마는 스마트폰이 아니지… 머리를 긁적이며 꾹꾹 문자를 입력했다.
학교에 가려면 아직 한시간이나 남았다. 집에서 학교까지 십분밖에 걸리지 않지만 나는 엄마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더 보기 위해 일찍 일어난다. 엄마도, 아빠도 일찍 출근해서 집에는 침묵과 나만 남았다. 밥도 잘 넘어가지 않는 고요함에 텔레비전을 틀었다.
“지난 21일, 7층 백화점 옥상에서 뛰어내려 숨진 직원 김모씨가 자살 전 같은 매장 직원 관리자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낸 것이 밝혀졌습니다.”
저 사건이 일어난지 삼일이 지났지만 뉴스와 신문, 라디오에서는 계속 사건에 대해 말하고 있다. 텔레비전 화면 속 김모씨가 마지막으로 보낸 한 통의 문자 메시지가 눈에 들어왔다.
‘제가 대표로 떠납니다. 이제 직원들 좀 그만 괴롭히세요.’
그것이 김모씨가 남긴 유서였다. 엄마랑 주고 받은 문자가 유서가 될 수 있다니… 김모씨의 자살이 남 얘기 같지 않았다.
“자살을 왜 해? 먹여 살릴 가족이 있으면 악착같이 벌어야지 세상에 안 힘든 일이 어디 있어?”
어제 엄마와 같이 뉴스를 볼 때 엄마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자기는 저런 허튼 생각은 하지 않는다는 듯이… 하지만 나는 엄마가 누구보다 힘들게 일한다는 걸 알고 있다. 백화점에서 직원 휴게실이라고 지어준 눅눅한 공기로 가득 찬 좁을 창고에서 의자고 없이 앉아 쉬는 엄마, 가매출 때문에 엉망인 장부를 보며 한숨을 쉬는 엄마가 힘들지 않다면 누가 힘들까. 그래서 나는 엄마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낸다. 누군가에게는 절망에 가득 찬 유서인 문자가 엄마에게는 힘든 하루를 견디게 해주는 희망이 가득 찬 문자일 것이다. 일 때문에 엄마가 자주 문자 확인을 못한다는 것도, 문자 보낼 시간에 공부하라고 잔소리를 할 거라는 것도 알지만 그래도 나는 문자를 보낸다. 엄마, 힘내… 언제나 고마워… 사랑해… 부끄러워서 얼굴 보고는 못 할 말을 문자를 통해서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것밖에 없으니까.
시간이 지날수록 애들이 하나둘씩 책상 위에 엎드렸다. 사회 선생님은 신경쓰지 않고 빨간색 분필로 중요한 부분을 칠판에 썼다. 일어나 있는 몇 안 되는 애들은 선생님이 던져주는 시험문제를 열심히 받아 챙겼다.
“시대별 출산 포스터에 표시 해라. 시대별로 출산 장려 포스터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시험에 낼 거야.”
포스터는 오른쪽으로 갈수록 아기를 많이 낳자는 내용이었다.
“사람들이 그 포스터 말 따라서 애 좀 많이 가졌으면 좋겠네. 매출 좀 오르게.”
엄마가 이 포스터를 봤으면 아마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나는 포스터 위에 크게 별표를 쳤다.
수업 끝을 알리는 종이 쳤다. 나는 가방 안에 넣어둔 휴대폰을 꺼냈다. 지금쯤 점심을 먹고 있을 테니까 문자를 보내면 바로 확인할 것이다.
‘엄마, 밥 꼭 챙겨 먹고 퇴근할 때까지 조금만 더 힘내. 학교 가기 전에 보니까 파스 다 떨어졌던데 내가 집에 가면서 살 테니까 걱정 마요.’
문자를 보내고 씩 웃었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몰래 백화점에 가서 엄마를 놀래켜 줄 것이다. 빨리 수업이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점심을 먹으러 가기 위해 짝을 깨웠다.
엄마의 매대가 또 자리를 옮겼나 보다. 백화점에서는 매출이 낮으면 손님이 뜸한 곳으로 보낸다던데… 요즘들어 얼굴이 어둡던 엄마의 모습이 떠올랐다. 1층 한 바퀴를 거의 다 돌았을 때 엄마를 찾았다. 엄마는 에스컬레이터 옆 구석에 서 있었다. 엄마의 앞에는 임부복으로 꽉 찬 매대가 있었다. ‘10%’라고 적힌 종이 때문에 엄마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분명히 엄마는 웃고 있을 것이다. 엄마가 백화점에서 일한다고 하면 친구들은 검은색 유니폼을 입은 날씬하고 예쁜 직원들을 떠올린다. ‘백화점에서는 예쁘고 잘생긴 사람들만 직원으로 뽑는다던데 너희 어머니도 예쁘신가 보다’라던 친구들이 엄마의 저런 모습을 보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고개를 저어 귓가에 맴도는 친구들의 말을 지우고 엄마 쪽으로 향했다.
“왜 환불을 못 해주냐고요. 여기서 샀으니까 여기서 환불을 해 줘야지. 나 일주일도 안 입었다니까?”
날카로운 여자의 목소리가 귀를 찔렀다. 엄마보다 열 살은 어려 보이는 여자가 엄마의 매대 앞에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저 여자가 누구한테 소리를 지르는 거야. 욕이라도 해 줘야겠다고 생각하고 뛰는데 엄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엄마는 매대에 이마가 닿을 정도로 허리를 숙이고 사과를 하고 있었다. 엄마는 뭘 그렇게 잘못했길래 사과를 하는 걸까. 엄마가 왜 허리에 파스를 붙이고 사는지 알 거 같았다.
“자살은 왜 해? 먹여 살릴 가족이 있으면 악착같이 벌어야지. 세상에 안 힘든 일이 어디 있어?”
갑자기 들리는 엄마의 목소리가 발목을 잡았다. 나는 가만히 엄마를 보다가 몸을 돌려 문으로 향했다.
눈물이 쉴 새 없이 떨어졌다. 왜 사람들은 백화점 직원이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엄마, 누나, 동생, 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걸까. 더 이상 엄마의 그런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내 딸이 하고 싶은 거 다 할 수 있을 때까지 일 할 거야.”
힘들면 그만두라는 아빠의 말에 대답하던 엄마가 떠올랐다. 나는 손에 쥐고 있던 휴대폰의 전원을 켰다. 그리고 꾹꾹 손가락에 힘을 줘 문자를 보내기 시작했다.
‘엄마,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요… 내가 정말 다 갚을게.’
문자 메시지를 전송하고 눈물을 닦았다. 내가 보낸 문자를 보며 웃을 엄마의 모습을 떠올리며 파스를 사기 위해 약국에 들어갔다.
수필 차상
눈망울
수원장안고 3학년 조소현
누렁이가 새끼를 낳았다. 할아버지는 장갑을 낀 채 외양간에 들어가 있었다. 누렁이는 지쳐 있었다. 이제 막 태어난 누렁아의 새끼는 제 어미 품에 파고들었다. 누렁이는 분홍색 혓바닥을 길게 뺀 뒤 가쁜 숨을 몰아 내쉬었다. 새끼는 누렁이와 꼭 닮아 있었다.
누렁이는 내가 중학생 때 처음으로 이 곳에 왔었다. 누렁이는 아직 새끼였고 어미는 없었다. 누렁이는 커다란 눈망울로 나를 바라보았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 낼 것만 같았다. 나는 누렁이의 뿔과 뿔 사이를 쓰다듬었다. 노란털이 부드러웠다. 누렁이가 두 눈을 꾹 감았다.
나는 누렁이의 구시통 안에다가 사료를 더 넣어주었다. 괜스레 안쓰러운 마음에 나는 사료 속에 여물을 더 넣었다. 누렁이는 그저 자리에 앉아 새끼에게 젖을 물려 주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쭉 내밀고 누렁이 새끼가 암컷인지 수컷인지 구별했다. 구별하는 것은 쉬웠다. 뿔이 크고 길면 수컷이었고, 뿔이 작고 짧으면 암컷이었다. 아직 새끼라서 뿔자체가 작았지만 새끼의 뿔은 유독 작고 짧았다. 암컷이었다. 가슴이 답답해왔다.
할아버지는 누렁이 새끼 귀에 노란 명찰을 달았다. 누렁이의 귀에도 똑같은 명찰이 달려 있었다. 내일이면 누렁이는 귀에 달고 있는 명찰을 떼야 했다. 암컷들은 새끼를 낳으면 도살장에 갔다. 여물을 꽉 쥔 손이 까슬까슬했다. 누렁이는 그저 혓바닥으로 제 새끼를 핥았다. 새끼는 그럴수록 누렁이 품에 파고 들었다. 나는 여물을 구시통에 넣은 후 외양간을 빠져 나왔다.
허공은 뿌연 수증기로 가득했다. 구름은 비에 젖은 것 마냥 축 늘어져 있었다. 곧 비가 내릴 것만 같았다. 나는 하늘을 힐끗 바라본 뒤, 주머니 속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아날로그 시계가 깜박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부재중 전화도, 메시지도 온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답답해져 오는 가슴을 꾹 누른 채 문자 메시지함을 열었다. 수신 0통이라는 문구가 반짝였다. 나는 익숙한 번호를 손끝으로 눌렀다. 참 오랜만이었다.
‘엄마, 누렁이가 새끼를 낳았어.’
나는 마지막 문구까지 친 다음에 한참이나 메시지 함을 바라보았다. 깜박이는 커서에 눈을 맞추었다. 나는 마른 침을 삼킨 후 전송버튼을 눌렀다. 엄마에게 수신중이라는 글자가 머릿속을 한참이나 헤집어 놓았다.
엄마는 내가 어렸을 적에 할아버지 집에 나를 맡겼다. 엄마 번호야. 연락해. 세은이 여기서 잘 지내고 있으면 엄마가 곧 데릴러 올게. 엄마는 작은 내 손바닥 위로 종이를 쥐어 주었다. 마치 누군가에게 쫓기는 사람처럼 보였다. 엄마는 억지로 울음을 집어 삼키고 있었다. 종이를 쥔 손에 눅눅한 땀이 배어 있었다. 엄마가 떠난 뒤, 처음에는 연락이 닿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엄마와의 연락은 자연스레 끊겼다. 발신함은 쌓여갔지만 수신함은 텅 비어져 있었다. 나는 내가 엄마의 기억 속 가장자리에 있어 엄마가 날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 그 이후로 나는 엄마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
나는 누렁이가 온 이후로 주로 외양간에서 시간을 보냈다. 누렁이를 바라볼 때에 누렁이는 마치 내게 무어라 말을 하고 싶은 것처럼 보였다. 그리움이 가득 차오른 누렁이의 눈은 나와 많이 닮아 있었다. 어미를 그리워 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런 누렁이에게서 동질감을 느꼈다. 누렁이의 어미는 누렁이를 기억 해주길 바랐다.
할아버지, 누렁이 팔지 말자. 나는 울리지 않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할아버지는 두꺼운 돋보기 안경 위로 나를 바라보았다. 뭔 소리여. 이미 다 처리했어. 할아버지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다른 소 데리고 가면 되잖아. 할아버지가 인상을 구겼다. 왜 이런담, 너 급식비도 내야 하고 학교에 돈도 내야 할 것 아니여. 그리고 소 값 떨어지기 전에 얼른 팔아야혀. 할아버지는 손사래를 치며 내 말을 듣지 않았다. 누렁이도 결국은 나 때문에 제 새끼 품에서 떠나야 했다. 새끼, 아직 젖도 못 뗐잖아. 쓸데없는 소리 말어. 누구 때문에 이러는 건디. 잔말 말어. 목구멍이 후끈거렸다. 휴대폰은 여전히 조용했다. 나는 고개를 들고 창문을 바라보았다. 창문 너머로 외양간이 눈에 들어왔다. 희뿌연 안개에 나는 두 눈을 비볐다. 손등이 축축했다.
비가 내렸다. 흙은 진흙이 되어 물방울에 계속 젖어갔다. 나는 안개 사이를 비집고 외양간으로 들어갔다. 누렁이는 제 새끼와 떨어져 있었다. 할아버지가 떨어트린 모양이었다. 누렁이는 앉지도 못한 채 계속 새끼만 바라보았다. 새끼는 아는 지 모르는 지 잠을 자고 있었다. 부슬부슬 떨어지는 빗소리가 처마 끝에 매달렸다. 누렁이는 구시통에는 사료가 아직 남아 있었다. 옆에 있던 소가 혓바닥을 길게 내밀어 누렁이의 사료에 입을 댔다. 누렁이는 가만히 있었다. 나는 소의 콧등을 살짝 때렸다. 너꺼 있잖아. 소는 입맛을 다시더니 혓바닥을 입 속에 넣었다. 누렁아 좀 먹어. 누렁이는 내 말에도 새끼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여물을 한가득 품에 안고 가마솥 안에 넣었다. 뚜껑을 열자 펄펄 끓고 있는 물과 함께 커다란 연기가 빗속에서 흩어졌다. 여물이 물속에서 흐느적거렸다. 누렁이는 여물을 물에 삶은 것을 참 좋아했다. 가마솥 뚜껑을 닫자 연기도 멈추었다.
나는 구시통에 삶은 여물을 넣었다. 얇은 연기가 기다랗게 피어 올랐다. 누렁이가 고개를 돌렸다. 자, 먹어. 네가 좋아하는 거야. 누렁이가 커다란 눈망울로 나를 바라보았다. 갈색 속눈썹이 파르르 떨린다. 누렁이는 새끼를 바라본 뒤 천천히 여물을 먹었다.
야속하게도 어둠은 벌써 하늘에 물들어 있었다. 누렁이의 구시통도 바닥이 드러났다. 누렁이는 먹던 것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입가가 축축했다. 나는 어렸을 때처럼 누렁이를 쓰다듬었다. 누렁이도 그때처럼 두 눈을 꼭 감았다. 괜스레 가슴이 먹먹해졌다. 알전구 위로 모기가 하염없이 맴돌았다. 나는 고개를 돌려 하늘을 바라보았다. 시커먼 하늘 위로 창백한 하현달이 파르르 떨었다. 누렁이는 계속 나를 바라보았다. 무슨 할말이 있는 것처럼. 주머니 속이 묵직했다. 나는 엄마에게 마지막으로 문자를 보냈다. ‘누렁이 이제 이 곳에 오지 않아’ 나는 전송버튼을 꾹 눌렀다. 발신함이 또 다시 쌓여갔다. 그리움이 가득 차오른 누렁이의 눈 위로 눈물이 고여 있었다. 나는 휴대폰을 꺼 버린다. 엄마는 오지 않는다. 밤하늘이 오늘따라 유독 차갑다. 시야가 흐릿하다. 누렁이가 길게 울었다.
수필 차하
마음의 문자
서울 휘경여고 2학년 여희주
컴퓨터의 커서가 일정한 속도에 맞춰 깜박인다. 한참동안 모니터만 보고 있으니 눈이 뻑뻑하게 감긴다. 잠시 자리에서 일어나 뻐근한 어깨를 돌리며 창문 앞에 선다. 어느새 연초록의 잎들이 점점 색을 갖춰가고 아스팔트에는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자린고비 사서 선생님도 더운지 부채 대신 선풍기를 튼다. 점점 올라가는 기온에도 에어컨을 틀지 않는 우리 도서관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간다. 이 도서관은 보통 도서관과는 다르다. 일반 책들보다 두껍고 두 배나 큰 책의 크기, 매끈한 표면 가운데 울퉁불퉁 제각기 튀어나와 있는 암호들. 시각 장애인들이 이용하는 점자 도서관이다.
나는 몇 달 전부터 이곳에서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원래 봉사활동에는 관심이 없어 헌혈이나 어린이 집에서 도우미로 시간을 때우고는 했다. 하지만 어느 날 시각 장애인 판정을 받은 책벌레 할아버지가 책을 못 읽지만 돌아가시면서도 그 종이 무더기들을 손에서 놓지 못한 기억으로 이런 봉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낭독 봉사, 입력 봉사 많은 종류가 있지만 나는 그 중에서도 교정 봉사를 한다. 한 봉사자가 책을 골라 그것을 입력하여 보내면 틀린 곳이 있는지 꼼꼼히 따져보고 교정하는 것이 내 임무이다. 주말마다 도서관에 나와 이 이을 하는데 컴퓨터 모니터만 쳐다보고 있노라면 지루하여 하품만 연발할 때가 많다.
크게 기지개를 켜고 다시 자리에 앉으려는데 나의 동공에 한 시각 장애인의 모습이 담겼다. 허공을 응시하는 초점 잃은 두 눈, 천천히 아기를 만지듯 책들을 더듬는 조심스러운 손길. 어느 곳에서는 바로 보이는 책 제목들을 그는 오로지 촉각에 의존하여 알아간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한참 책들을 어루만지던 그의 손이 잠시 멈춘다. 도서관을 울린 짧은 벨소리 때문이었다. 그는 서둘러 바지 주머니를 뒤적인다. 하지만 이내 자신이 읽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도움을 청한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에게 다가가 핸드폰을 건네 받는다. 대출이 가능하다는 흔한 스팸 메시지다. 내 목소리를 들은 그의 얼굴에는 실망한 기색이 역력하다. 누군가의 연락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그 누군가가 궁금해질 때 쯤, 그는 나에게 보관 메세지함을 열어보라고 했다. 그러자 수신자 ‘딸’의 애교 섞인 문자가 내 눈 앞에 띄워졌다. 그가 시력을 잃기 한 달 전에 딸에게서 받은 문자라고 했다.
그는 꽤나 잘 나가는 회사원이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받은 시각 장애인이라는 진단에 자식들은 그를 외면하기 시작했다. 결국, 자신의 편이 되어주던 아내가 세상을 떠나자 자식들은 더 이상 그를 찾지 않았고 항상 전화를 걸때면 다시 연락하겠다며 긴 통화를 피했다. 그는 그 말을 굳게 믿고 애타게 그들의 목소리를 기다렸지만 핸드폰은 울리지 않았다.
사람들에게는 두 개의 눈이 있다. 그러나 그 누군가에게는 두 개 모두 제 기능을 하지만 어떤 이의 것은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또, 갑작스럽게 시각 장애인이 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처음부터 앞을 보지 못한 이도 있다. 시각 장애인들은 삶에 대해 좌절을 하고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하기도 한다.
반면에 눈으로 세상을 훤히 볼 수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눈에 대해 불만을 갖는다. 쌍꺼풀이 없다던가, 눈이 너무 작다던가, 안경을 끼면 못생겨진다던가. 시각 장애인들은 할 수 조차 없는 고민을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삶의 중대한 문제처럼 여긴다.
언젠가 신문에서 한 시각 장애인의 인터뷰를 본 적이 있었다. 그는 갓 태어난 아들 하나가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불투명해져 징그러운 눈을 아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아 다가가지 못하고 멀리서 소리로만 감지한다고 했다. 제일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단 한 번이라도 아내의 말로만 듣던 아들의 해맑은 미소를 보고 싶습니다.’ 라는 애잔한 말을 남겼다.
지금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마음을 달래줄 책을 찾고 있는 저 시각 장애인에게도 가장 하고 싶은 것이 있을 것이다. 아마 자식들에게서 전화보다 따스한 진심을 담은 문자 메시지 한 통을 받는 것이 아닐까. 방금 그가 쓸고 간 자리에서 눈을 감고 올록볼록한 그 마음의 문자를 느껴본다.